‘구름아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젓고 있는 소지섭 양조사. 윤동길 스튜디어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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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애주가인 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희진(40)씨의 가장 즐거운 취미는 직접 술 만들기다. “매일 마시는 술인데, 어느 순간 시장에서 파는 술맛에 질리기 시작하면서” 직접 만들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만들 때 필요한 재료는 무엇이고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어떻게 보관하고 언제 마실 수 있는지 궁금한 점이 산더미였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뒤지다가 우리 술 전문 교육기관에 대해 알게 됐어요. 우리 술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준다 해서 반신반의로 찾아간 것이 벌써 10년 전쯤 됐죠.” 계절마다 좋은 과실이나 한약재, 직접 덖은 찻잎이나 꽃잎을 넣어 술 만들기를 시작하며 최근에는 소규모 양조장 창업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김씨의 경우처럼 직접 만든 술을 소비자에게 판매까지 하는 소규모 양조장에 관심 있는 젊은층이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양조장에서 빚은 서울 오리지널(왼쪽부터), 서울 핑크, 서울 스파클링. 윤동길 스튜디어 어댑터 실장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는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있다. 가양주는 집에서 빚은 술을 말한다. 수년 동안 술 빚는 법과 주류 유통 체계를 가르쳐온 류인수 한국가양주연구소장은 연구소 안에서 서울양조장도 함께 운영한다. 양조장은 소규모 주류면허가 있어야 운영할 수 있는데 2년 동안 술을 만들어 유통하지 않으면 면허는 박탈된다.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공부한 동문들의 양조장도 이미 충분히 많은데, 가르치는 교육기관에서 상업용 술을 만들고 유통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고 류 소장은 말했다. 하지만 많은 고민 끝에 “가양주 방식이 아닌, 상업 방식으로 술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과정을 직접 체득해 학생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사라질 뻔한 양조장을 되살리게 됐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술은 총 4가지. 첫 제품인 ‘서울 오리지널’을 시작으로 ‘서울 스파클링’, ‘서울 골드’, ‘서울 핑크’다.
이 양조장의 술은 아주 독특하다. 기존의 어느 양조장에서도 사용하지 않았고, 지금도 사용하지 않는 ‘설화곡’이라는 누룩을 사용한다. 류 소장이 직접 만든 누룩인데, 쌀가루로 만든 포실포실한 누룩이 눈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맛과 포장 용기도 남다르다. ‘어른이 먹는 우유’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뽀얀 흰색이 도드라지는데, 그 옛날 우유병을 연상시키는 유리병을 사용한다. 병따개로 뚜껑을 따야 하는 크라운 캡을 일부러 사용해 소비자의 호기심과 즐거움을 자극했다. 맛도 역시 별명에 걸맞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부드러운 질감과 쌀술 특유의 차분하고 깔끔한 맛이 돋보인다.
33㎡(10평) 남짓되는 서울양조장 모습. 윤동길 스튜디어 어댑터 실장
생긴 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양조장인데도, 서울양조장에 대한 시장의 반응 역시 남다르다. 케이(K)-푸드 열풍을 타고 싱가포르 등지에 수출까지 할 정도다. “소규모 양조장으로는 최초의 수출이라 감회가 남다르다”는 류 소장의 말이 수긍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술을 제조하는 양조장의 크기는 ‘겨우 이 정도에서 그 많은 술을 생산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작다. 약 33㎡(10평) 남짓, 성인 남자 3명만 들어가도 복작거릴 정도로 좁디좁은 공간인데, 오히려 좁아서 좋은 면이 많다고 류 소장은 말한다.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으니까요. 효율적으로 공간을 배치한다면 작은 양조장의 장점은 정말 많아요.”
한국가양주연구소에 있는 소줏고리들. 과거에는 이 용기로 가정에서 소주를 내렸다. 윤동길 스튜디어 어댑터 실장
서울 마포구 구수동 골목에 있는 ‘구름아 양조장’ 역시 눈여겨볼 만한 작은 양조장이다. 이곳에서 신동호(40), 소지섭(33) 양조사가 술을 빚는다. 요즘 우리 술 시장을 대표하듯, 젊은 나이다. 젊은이들이 만드는 술답게 기존의 막걸리와는 다르다. 이곳의 대표 술은 남해 토종 유자로 만드는 막걸리 ‘유자가’와 쌀 약주 ‘농담’이다. 작은 양조장인데다 일손도 달려 유자철에는 박스 단위로 산 유자의 껍질을 하나하나 직접 세척하고 껍질을 벗겨내는 일만으로도 일주일가량 걸린다.
약주 역시 마찬가지다. 쌀로만 만드는 순곡주인데, 싱어송라이터 ‘스탠딩 에그’와 함께 마음을 맞춰 만든 독특한 제품이다. 이 제품의 큐알(QR)코드를 찍으면 스탠딩 에그의 노래가 나온다. 소규모 양조장의 특성상 인터넷을 통한 통신판매가 어려워 이들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술을 판다. 20~30대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다. “에스엔에스에 익숙한 20~30대 고객들이 편하게 술을 살 수 있게 하려고 했어요.” 신동호 양조사가 설명했다.
작은 양조장인데다 양조사도 둘뿐이라 일주일에 만들 수 있는 술의 수량에는 한계가 있다. 발효 등 숙성기간이 한달 정도이기 때문에 생산하는 병 수는 많지 않다. 이 양조장을 찾는 소비자들은 적게는 일주일, 길면 한달가량을 기다렸다가 술을 산다. 이런 단점에도 ‘구름아 양조장’의 팬이자 구매자들은 그 시간과 불편함을 기끼어 감수한다. “오히려 소규모 양조장이라 가능한 일 같아요. 양조장에 직접 찾아와서 술을 사가면서 자연스레 우리 양조장의 크기를 알게 되고,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고 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고요.” 소지섭 양조사의 말이다.
소규모 양조장에서 빚어지는 술의 아주 독특한 개성도 소비자에게 소구하는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다. 경기도 여주의 복분자로 약주를 만드는 ‘술아원’ 역시 처음 시작할 때는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소규모 양조장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요. 다양한 부재료를 넣어 향미를 실험해보거나 숙성 기간을 아주 짧거나 길게 해보거나 여러 가지 주종을 섞어보는 일들이죠.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갖춘 양조장에서는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험들입니다. 상업 양조라지만 사람의 손이 하나하나 들어가는 ‘절반의 가양주’ 과정을 거치는 소규모 양조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일들이지요.” 강진희 대표의 말이다. 실제로 취재를 위해 방문한 마포 구름아 양조장에서는 취재 중에도 계속해서 쌀을 씻고 술에 들어가는 부재료를 하나하나 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까딱해서 한번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면 주문 수량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구름아 양조장’에서 만든 약주 ‘농담’(왼쪽)과 막걸리 ‘유자가’. 윤동길 스튜디어 어댑터 실장
방배동의 한국가양주연구소는 이런 소규모 양조장 창업을 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겐 성지로 통한다. “한국가양주연구소가 문을 연 10여년 전에 비해 확실히 20~30대 젊은 세대 수강생의 비율이 10배 이상 늘었다”고 류인수 소장은 말한다. 일주일에 두번, 3시간씩 3개월 가까이 들어야 하는 한국가양주연구소 정규반의 수강생은 약 40명 남짓, 그중에서 20~30대의 비중은 50% 이상을 차지한다. 정규반 수업을 듣고 있는 20~30대 수강생의 대부분은 소규모 양조장 창업을 목표로 둔 이들이다.
“소규모 양조장은 대형 양조장 창업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는데다, 술의 생산 수량이 많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초기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 이들이 소규모 양조장을 창업하려는 이유다. 소규모 주류면허를 취득한 업체의 수도 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발표한 ‘2021 주류산업정보 실태조사’를 보면, 탁주 부문의 소규모 주류면허를 취득한 업체의 수는 2020년 86개에서 2021년 105개로 22.1% 증가했고, 약주 부문 역시 2020년 28개에서 2021년 35개로 25% 증가했다. 맥주 부문 역시 2020년 161개에서 2021년 175개로 8.7% 늘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국가양주연구소에 진열된 수강생들의 ‘작품’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2023년 기준, 소규모 주류면허를 받을 수 있는 주종은 탁주(곡물을 발효시켜 탁하게 빚은 술), 약주(쌀·감자·고구마 등으로 만든 누룩으로 빚어낸 술), 청주(쌀로만 만든 누룩으로 빚어낸 술), 맥주와 과실주까지 총 5가지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술이 탁주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술이기도 하고, 그만큼 양조장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술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일 테다.
술의 세계는 넓고도 무궁무진하고, 먹어야 할 술도 많다. 클릭 한번에 집 앞까지 배송되는 균일한 품질의 대규모 양조장 술의 장점도 물론 아주 많다. 집 근처 마트에서 편히 살 수 있는 술들의 미덕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마셔봐야 할 ‘불편하고 작은 술’도 한번쯤은 도전해보기를 권한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나만의 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신상 막걸리와 맞춤 안주, 모두 가능한 곳
좋은 술에 맛있는 음식이 빠질 수는 없다. 흔히 만나기는 힘든 소규모 양조장의 술과 안주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한다.
서울 종로구라고는 하지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근처에서 더 가까운 창신방앗간은 창신동 창신시장 안에 있다. 서울, 그것도 시내 한복판의 전통시장 방앗간이 무척 생경하다. 1970년대부터 방앗간이었던 자리를 그대로 살려내 술을 만들고 음식도 판다. 창신시장에서 파는 재료로 만든 음식을 소담하게 내고, 양조장에서 갓 빚은 ‘창신 막걸리’도 바로 병에 담아서 준다. 양조장에서 먹는 술만큼 맛있는 술이 없는데, 바로바로 병입한 ‘신상’ 막걸리 먹는 기분은 이곳에 방문해봐야 안다. 우럭 탕수, 맑은 복국, 고등어 초절임 회, 칠리 콘 카르네 같은 국적 불명의 음식들을 내는 것이 이곳의 매력 포인트다. 방앗간 건너편의 한옥 ‘창신집’도 이곳에서 함께 운영하는 공간이니 자리가 없을 때는 창신집으로 방문해볼 것. 서울 종로구 종로51길 36 1층, 0507-1448-4113.
서울 마포구 구수동 ‘구름아 양조장’과 한 공간에 있는 박연식당의 규모는 정말 작다. 양조장도 10평 남짓인데 식당의 규모도 그렇다. 셰프 테이블을 중심으로 바 테이블로만 구성된데다 저녁 예약만 미리 받아 운영하기 때문에 이곳에 식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도 드물다. 그런데도 한번 방문한 이는 두번이고 세번이고 이곳을 찾는다. 좁지만 편안한 분위기, 셰프가 그날그날의 좋은 재료로 알아서 만들어주는 시스템이 오히려 편안하다. 주문 뒤 몇주 이상씩 기다려서 구매할 수 있는 ‘구름아 양조장’의 막걸리와 청주를 이곳에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매력 포인트다. 추천 주류는 유자 막걸리 ‘유자가’와 신상 청주인 ‘농담’. 깔끔한 산미가 돋보이는 ‘구름아 양조장’의 술과 셰프 특선 메뉴의 조합도 추천한다. 서울 마포구 토정로14길 16 1층, 010-3864-8503.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미러볼밥술상은 2019년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는 동네의 소문난 술집이다. 음악 좋아하는 류민중 대표가 “스스로가 신나게 일하기 위해” 식당 한편에 번쩍대는 미러볼을 달고 어둑해지는 밤마다 손님을 받는다. 젊은이들이 가는 술집이라고 그저 그런 음식들을 팔지 않는다. 오랫동안 한식당을 운영한 류 대표의 어머니가 직접 무치고 끓이고 볶고 삶은 진짜 한식을 취급한다. 전통주를 오랫동안 공부한 류 대표가 직접 고른 각종 우리 술의 라인업은 거의 매주, 매달 바뀐다. 그 계절에 맞는 음식과의 조화를 고려해서다. 류 대표가 추천하는 안주는 이곳의 스테디셀러인 ‘보쌈’, ‘고등어 파스타’와 지금 가장 맛이 잘 든 ‘제철 생멍게’. 제주 생레몬과 맥주 효모를 넣어 만든 막걸리 전문 브랜드 오티오티(OTOT) 술도가의 ‘코리안 화이트’와 아주 잘 어울린다는 평을 덧붙였다. 서울 양천구 신월로 312-1, 0507-1401-8923.
백문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