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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팰리스 73. 최근 분양 광고로 관심 끌기에 성공한 아파트 이름이다. 논란의 캐치프레이즈는 이랬다.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불평등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 필요가 아닌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에 차별화가 마케팅 전략으로 자리잡은 지는 오래되었다. ‘캐슬’에 살면 귀족이 되고, ‘자이’에서는 “남다른 라이프”가 기거하며, ‘브라운스톤’에서는 “미국 동부 상류 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이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그냥 ‘래미안’과 ‘래미안 퍼스티지’는 또 다르다. 아파트에 뜻 모를 이름이 붙기 시작한 21세기 초부터 이런 구별짓기는 대한민국의 주거 양식을 지배해왔다.
그러므로 저 소문난 문구의 문제는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선정적인 표현 방식이다. 보기 좋게 포장해서 감춰놓았던 욕망을 투명하게 전시함으로써 시장의 차별화 전략이란 결국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덕분에 그 욕망을 외면하고 싶었거나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막막해하던 이들에게 기묘하게 두려운 감정을 안겨줬다. 게다가 ‘더 팰리스 73’이 들어설 장소는 서울 서초구 반포다. 한채에 100억원에서 400억원에 이르는 오피스텔·아파트에는 오로지 73가구만이 ‘입성’할 수 있다. 이 광고에서 드러나는 불평등의 꿈은 그저 홍보를 위한 허세가 아니다. 이미 도래한 지옥도의 가장 천박한 구석이다.
더 팰리스와 드림팰리스
얄궂게도 비슷한 시기에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가 개봉했다. 만약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라는 말이 ‘드림팰리스’에 붙었다면 어땠을까? 경기도 외곽 어느 황량한 뉴타운에 들어선 미분양 아파트 단지. 집이 다 팔리지 않았으므로 시공사가 하자보수도 진행하지 않는 곳. 누군가에게는 ‘꿈에 그리던 궁전’이었을 드림팰리스. 그랬다면 저 경박함이 이렇게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을 터다. 물론 애초에 주목조차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관심 역시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으니까.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고층 아파트 단지 드림팰리스. 그곳에선 이제 막 이사 온 혜정(김선영)이 새집 단장에 여념이 없다. 그는 2년 전 반도체 공장 화재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회사 본사 앞에 천막을 치고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여왔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다. 심지어 동지들은 처음부터 혜정의 남편에게 사고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혜정은 결국 회사가 제안한 합의금을 받고 농성장을 떠났다. 그 일로 동병상련하면서 의지하던 수인(이윤지)과는 더 이상 말도 섞지 않는 사이가 됐다.
혜정은 그 돈으로 드림팰리스 입주권을 구매했다. 아들 동욱(최민영)은 아버지를 팔아 집을 샀다며 엄마를 원망한다. 혜정은 동욱에게 “아버지가 무고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을 떠난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그게 진심인지는 불명확하다. 그 선택은 돈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한데서 자는 것이 지겨워서였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유가족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혜정은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주울 것 같다가도 그냥 떠나버리고, 타인을 살뜰히 돌보다가도 어느 순간 한없이 모질어지기도 하는 사람이다. 다층적인 레이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혜정은 새 아파트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과거와 단절된 깔끔한 시작이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삶의 난감함은 입주 첫날 수도꼭지에서 콸콸 터져 나오는 녹물과 함께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진다. 시공사는 미분양 상태에선 하자보수를 해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입주민 회의에서는 집에 하자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분양에 지장을 줄 테니 조용히 하라고 다그친다. 혜정은 녹물을 해결하고 문드러진 인생을 수습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더욱 어그러질 뿐이다. 더러운 황토색 물은 현재의 시간을 휩쓸어 벗어나고픈 과거에 옭아맨다.
피해자이며 가해자 ‘인간 본성 탐구’
‘드림팰리스’는 한쪽에선 전세 사기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다른 한쪽에서는 400억원짜리 집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 그 자체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으로는 녹물이 흐르고, 지하에는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쌓여 있다. 그 안에는 “내 집값만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단지를 계획하고 건설한 시공사는 최소한의 수고조차 귀찮아하고,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좌절과 불안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먹으면서 야금야금 자라난다. 그렇다고 집만 문제인 것도 아니다. 혜정의 삶은 겹겹의 부정의 위에 서 있고, 혜정 본인조차 무고하거나 무해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를 본 지 수일이 지나도록 혜정을 연기한 김선영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집도 사람도 오로지 가격으로만 평가받는 땅 위에서 풍광은 버석하게 말라버렸고, 그 척박한 땅 위를 천개의 사연을 지닌 한 인간의 얼굴이 황망하게 떠돈다. 그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남편을 잡아먹은 회사건, 내 집 마련의 꿈을 짓밟은 건설사건, 권력은 취약해진 이들을 갈라치기 하면서 끝까지 버틴다. 결국 피해자들은 의도치 않게 서로를 해치고, 숨구멍이라도 뚫고 싶어서 내뱉은 사사로운 진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드림팰리스>는 피해를 생산함으로써 유지되는 구조와 그에 기생하는 권력의 문제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개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순수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건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의 스테레오타입이 얼마나 얄팍한지에 대한 우아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다. 감독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담하다 싶을 정도로 뻔뻔해지는 시대에도 그런 용기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이 복잡성의 용기를 물질화하는 것이 바로 김선영의 얼굴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