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이사부장군배 삼척그레이트맨 트라이애슬론대회’에서 정인선 기자가 양손을 들며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신현두 제공
지난달 트라이애슬론(수영·사이클·달리기로 구성된 철인 3종 경기)에 처음 도전했다. 하루 전날 아침, 대회가 열리는 강원도 삼척으로 떠나려 차에 자전거를 실었다.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벅찬 감정이 몰려왔다. 대학생 때부터 ‘버킷리스트’에 담아둔 일을 10여년 만에 실행에 옮기다니!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코에선 노래가 절로 나오고 있다.
지금은 “운동할 돈 벌려고 회사 다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큼 각종 운동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지만, 학창시절의 나는 말 그대로 운동과 담쌓은 학생이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체육을 맡으셨던 담임 선생님이 졸업장을 건네며 “왜 내 과목에만 관심이 그토록 없었냐”고 서운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선생님은 그럴 의도가 전혀 아니었겠지만, 반 친구들 40명 앞에서 ‘운동 못 하는 학생’이라고 공개 망신을 당한 것 같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학에 입학하고 체중이 급격히 늘었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수영과 걷기 등 운동을 시작했다.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고 3년 뒤, 동네 수영장 아주머니들 손에 이끌려 한강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열린 장거리 핀(오리발) 수영 대회에 나갔다. 강에서 3㎞를 완영하면 누구나 메달을 받을 수 있는 비경쟁 대회였다. 오리발을 착용했어도 25m 길이 수영장 60바퀴를 쉬지 않고 돌 수 있기까지의 훈련이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어려움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오직 완영 메달을 손에 넣은 순간의 기쁨만이 생생하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외치고 싶었다. “선생님, 저도 몸 쓰는 일로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2012년 한강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열린 장거리 핀수영대회에 처음 참가해 받은 메달. 정인선 기자
그날 이후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할 거야.” 학교 앞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첫 월급으로 장만해,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한강을 쏘다니던 25만원짜리 ‘티티카카’ 미니벨로(바퀴 20인치 이하 소형 자전거)로는 턱도 없는 소리란 걸 깨닫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봐도,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려면 튼튼한 몸뚱아리보다도 경제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볍고 날쌘, 그리고 웬만한 자동차 한 대 가격은 우습게 넘기는 도로용(로드) 자전거와 물속에서 체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웻수트 등 각종 장비 구입 비용부터, 수십만원에 이르는 대회 참가비까지. 철인이 되려면 드는 돈이 어마어마했다.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겠다’는 호언장담 앞에 “서른 살이 되면”이라고 슬그머니 단서를 덧붙인 이유다.
서른을 두 해 앞둔 2018년, 늦깎이로 일을 시작해 모은 돈으로 중고 로드 자전거를 마련했다. 친구 생일 파티에서 만난 ‘친구의 친구’ 다운이가 중고 자전거 거래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생일파티에 멋진 로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고 내가 관심을 보이자 “마침 네 키에 맞는 괜찮은 매물이 나왔으니 한 번 와서 시승이나 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 홀린 듯 ‘스페셜라이즈드 아미라 엑스퍼트’ 자전거를 사서 타고 돌아오는 길, 페달을 밟는 발이 어찌나 가볍던지. 그동안 무거운 줄도 모르고 철제 미니벨로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닌 과거의 내가 가엾게 여겨질 정도였다.
같은 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달리기에도 본격 입문했다. 1년 뒤 2019년엔 딱 5시간이 걸려 풀코스 마라톤 경기를 완주했다. ‘내년이면 철인 3종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돌출했다. 서른살이 되던 2020년, 코로나19로 스포츠 경기는 물론 동네 수영장까지 모조리 기약 없는 ‘셧다운’에 들어간 것이다. 내 마음 속 도전 시한이 다시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로 늘어났다.
지난해 11월 메디오폰도(100㎞ 미만 중거리 사이클 경기)에 참가한 모습. 정인선 기자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에스레터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한겨레신문을 정기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정기구독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지난해 가을, 큰 맘 먹고 장만했던 자전거를 다용도실에 모셔만 두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다운이는 메디오폰도(100㎞ 미만 중거리 사이클 경기)에 함께 나가자고 내 손을 끌었다. 그전까지는 평탄하게 뻗은 한강에서, 속도를 내기보다 풍경 감상, 맛집 탐방 등에 목적을 두는 ‘샤방 라이딩’만 즐기고, 서울의 다른 라이더들이 업힐(언덕 오르기) 훈련을 위해 찾는 남산·북악산 등 구불구불 언덕진 코스는 가 볼 생각조차 안 했다. 대부분의 자전거 대회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코스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출전한 첫 메디오폰도 성적표는 처참했다. 그란폰도(100㎞ 이상 장거리) 경기 참가자들과 비슷한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결승선을 통과했다. ‘어디 가서 취미로 사이클 탄다고 하면 안 될 실력이구나’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트라이애슬론에 정말 도전하게 된다면, 수영과 자전거, 달리기 중 자전거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떤 종목이든 대회 도중엔 ‘이 짓을 다시는 하나 봐라’ 이를 갈다가도, 그 놈의 결승선만 통과하고 나면 힘들었던 순간은 금세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희열만 남는다. 곧 다음 대회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첫 메디오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의 흥분은 좀 남달랐다. “이제 수영·달리기·자전거 대회에 모두 한 번씩은 나가 본 사람이 됐으니, 내년엔 진짜 트라이애슬론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딱 1년 뒤, 나는 정말로 트라이애슬릿(철인 3종 선수)이 됐다.
트라이애슬론이란 수영·사이클·달리기 세 종목을 순서대로 겨루는 스포츠 종목이다. 체력이 달릴 때 위험할 수 있는 종목 차례(수영→사이클→달리기)로 실시한다. ‘동호인 코스’, ‘스탠더드 코스’라고도 불리는 ‘올림픽 코스’(수영 1.5㎞-사이클 40㎞-달리기 10㎞)와 극한의 지구력을 시험하는 ‘풀 코스’(수영 3.8㎞-사이클 180㎞-달리기 42.195㎞) 외에 단거리로 구성된 ‘스프린트 코스’(수영 750m 미만-사이클 20㎞ 미만-달리기 5㎞ 미만), ‘하프 코스’(수영 1.9㎞, 사이클 90㎞-달리기 21.1㎞)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한겨레신문 스포츠팀 기자. 일하지 않는 시간엔 요가와 달리기, 수영, 사이클, 케틀벨 등 각종 운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