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와인농장 바지아니에서 생산한 와인과 전통 음식. 그 뒤에는 크베브리와 오크통이 전시돼 있다.
캅카스산맥(코카서스산맥) 남쪽에 자리한 조지아는 세상 모든 구름이 모이는 곳이자 개들의 천국이다. 조지아 어디를 가도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도시를 배회하는 개들을 만난다. 도시 건물에도, 와인농장에도, 바람 부는 흙길에도 친히 내려온 구름을 목도한다. 수도 트빌리시에 도착하면 거리마다 널브러져 있는 개들이 제일 먼저 환대한다. 덩치가 큰 개가 졸졸 따라오면 무서울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큼 친근하다. 국가가 관리해서일까. 개들의 귀엔 그 증표로 단추만 한 표지가 붙어 있다.
조지아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개. 귀에 국가가 발급한 표지가 붙어 있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그루지야로 불린 조지아. 독립을 선언하면서 영어식 표기 ‘조지아’를 선택했지만,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사카르트벨로’라 부른다. 조지아어다. 독자적인 자음·모음 체계를 갖춘 국어를 사용하는 흔치 않은 나라다. 소련의 권력자 스탈린이 태어난 곳이자 푸시킨, 톨스토이, 고리키 등 러시아 대문호들이 사랑한 나라 조지아. 이곳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함이 가득한 여행지다. 밤에도 노란색 조명으로 빛나는 ‘성 삼위일체 대성당’, 기하학적인 구조인 ‘평화의 다리’가 떠 있는 듯 서 있는 쿠라강, 종일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애드벌룬과 짖지도 않는 개들 등 뭐 하나 놓칠 수 없는 생경함이 공기처럼 깔려 여행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수도 트빌리시에 있는 ‘어머니상’. 왼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다.
특히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나리칼라 고대 요새 안에 있는 20m 높이의 ‘어머니상’은 그 위용이 당당하고 웅장하다. 한손에 큰 칼을, 다른 한손엔 커다란 와인 잔을 들고 있다. 적은 무자비하게 칼로, 친구와 손님은 달콤한 포도주로 맞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단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지아의 상징 ‘어머니상’에 와인 잔이 올라가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신의 물방울’ 와인의 양조가 처음 시작된 나라가 조지아이기 때문이다. 약 8000년(기원전 6000년) 전 시작된 양조 흔적이 조지아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이 와인의 종주국인 양하지만, 본래 와인의 요람지는 조지아다. 2013년 조지아 와인 양조법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런 이유로 조지아 여행의 필수 코스는 ‘와인 농장 투어와 시음’이다. 지난달 7일(이하 현지시각)부터 4일간 다녀온 ‘조지아 와인 여행’에서 ‘신의 물방울’을 인간에게 선사한 신의 의도를 맛봤다.
조지아 카헤티 지역의 와인농장 볼레로앤컴퍼니에 있는 크베브리 숙성실.
지난달 7일 트빌리시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조지아의 동쪽 카헤티 지역에 도착했다. 조지아 전체 포도밭 5만5000㏊의 70% 이상이 이 지역에 몰려 있다. 조지아 와인 전문가 마카 타라슈빌리가 1927년에 설립된 농장 볼레로앤컴퍼니로 안내했다. 와인 농장 투어 순서는 어느 나라든 대동소이하다. 포도밭, 발효실, 숙성실을 차례로 구경하고 와인 네댓 가지를 시음한다. 하지만 조지아에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이 업체의 마케팅 매니저 티나틴 엔델라제는 커다란 벽돌 창고로 안내하며 “여기가 ‘마라니’”라고 말했다. 타라슈빌리는 이곳이 “조지아 와인의 정수”라고 했다. 하지만 벽돌로 지어진 창고는 썰렁했고, 바닥에 구멍이 수십개 뚫려 있었다. 어디에도 ‘신의 물방울’ 흔적은 없었다. 이게 조지아 와인의 정수라고? 의문이 들었다. 무엇이 들어 있나 살펴보려 구멍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심해의 깊은 어둠을 진두지휘하는 괴물이라도 금세 나올 것만 같았다. 인간을 잡아먹을 것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기서 흥건하고 달콤한 알코올 향이 올라왔다. 심장을 2~3배 뛰게 하는 첫사랑의 흥분 같은 술 향 말이다. 엔델라제는 구멍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크베브리다. 우리는 224개 크베브리를 가지고 있는데, 1929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크베브리 보관소를 마라니라고 한다. 조지아 와인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했다.
크베브리는 8000년 전부터 조지아인들이 만들어온 와인 발효·숙성 토기다. 와인 농장마다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아래쪽은 뾰족하고 위는 우리네 김장독처럼 구멍이 뚫린 타원형이다. 이것을 땅에 묻은 다음 압착한 포도즙에 껍질과 씨까지 넣어 최소 3~6개월간 발효·숙성시킨다. 한번 땅에 묻은 크베브리는 다시 꺼내지 않는다. 우리네 김장 문화와 유사하다. 완성된 와인은 도구를 이용해 퍼서 병입한다. 마라니에서 본 구멍은 땅에 묻힌 이 토기의 윗부분이었던 것이다. 수천년 전 전통 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방식이 조지아 와인 맛의 핵심이다. 물론 오크통 숙성이나 스테인리스스틸 발효 등의 방식을 채택한 곳도 있다. 하지만 크베브리 방식을 폐기한 농장은 거의 없다. 전통을 잇겠다는 조지아 농부들의 마음가짐이다. 이런 이유에선지 조지아 와인 산업은 국가 전체 산업에서 5%나 차지한다.
맛은 어떨까. 수천년 전 방식이라니, 위생 문제는 없을까. 발효가 진행되면 크베브리 내부 온도가 올라갈 텐데, 온도 조절 장치가 없는 토기에서 발효가 제대로 될까.
와인 농장 바지수바니에 도착했다. 수석 디렉터 조르지 므슈비도바제가 크베브리 숙성실을 보여주며 “첨가제도 넣지 않는 이 방식은 야생 효모가 제 역할을 한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철저하게 미생물을 관리하기에 ‘마이크로바이오 농법’”이라고 말한다. 이어 그가 시음용 와인 9병을 가져왔다.
조지아 와인 특징 중 하나는 530개가 넘는 토착 포도품종으로 맛을 낸다는 것. 이날 등장한 와인도 토착품종 르카치텔리, 므츠바네, 키시, 사페라비 등으로 만든 크베브리 와인이었다. 레드보다는 화이트에서 크베브리 와인 맛의 장점이 도드라졌다. 과일 향이 듬뿍 피어오르더니, 이내 꽃 향으로 이어졌다. 소량의 산소를 혀와 입술을 오므려 빨아들이자 허브 향, 기분을 들뜨게 하는 흙냄새 등이 입안을 점령했다. 토기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라고 했다.
‘오렌지와인’도 있었다. ‘앰버(호박)와인’이라고도 불리는 이 술은 최근 몇년간 한국 젊은 층의 미각을 사로잡았다. 이름에 ‘오렌지’가 있지만 오렌지는 들어가지 않는다. 내용과 이름의 불일치는 또 다른 재미 요소다. 2000년대 중반 영국의 와인수입상 데이비드 하비가 화이트와인 중 오렌지색이 나는 와인을 ‘오렌지와인’이라고 하자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청포도로 만드는 오렌지와인은 껍질과 씨도 함께 섞어 발효시켜 만든다. 이를 ‘껍질 침용’이라고 하는데, 숙성 기간에 따라 황금색, 오렌지색, 호박색, 홍차색, 구리색 등으로 색깔이 달라진다. 껍질 침용이 기본인 크베브리 방식 때문에 조지아 와인 중에는 독특한 풍미의 오렌지와인이 많다.
지난여름 한국을 방문했다는 무슈비도바제가 맛 자랑에 나섰다. “당시 페어링해보니 김치 같은 한국 절임음식과 잘 어울렸다. 크베브리 와인의 산미가 매콤한 한식과 잘 맞는다”고 말했다. 타라슈빌리는 “화이트와인 탄닌을 느껴보라”고 했다. 탄닌은 레드와인에 많고, 화이트와인에 적다. 떫은 듯 혀를 조여드는 탄닌만의 매력을 화이트와인에서 찾는 이는 거의 없다. 포도 껍질, 줄기, 씨 등을 활용해 탄닌을 늘리는 방식은 레드와인 양조법이다. 하지만 조지아 화이트와인에서는 탄닌의 맛이 풍성하게 다가왔다. 타라슈빌리는 “이게 크베브리의 장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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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 온도 관리, 위생 문제 등에 대한 물음표는 젊은 양조자들이 2014년에 설립한 와인농장 실다와 또 다른 농장 바지아니, 9일 방문한 카피스토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실다의 수석 양조자 나나 졸로하바는 시멘트 창고에 묻은 크베브리에 연결된 냉각기능 시스템을 보여줬다. 옆에 있던 타라슈빌리는 크베브리 용기의 기본 쓰임에 대해 말했다. “크베브리는 땅에 묻기에, 또 그 형태와 흙이란 점 때문에 자연적인 온도 조절이 가능해 숙성·발효에 어떤 용기보다 효과적이다. 또 토기 안에 바른 석회 도료가 온도 관리에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김장을 마친 김칫독을 땅에 묻어 보관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유사하다. 투어에 동행한 김상미 와인평론가는 “내부에 벌꿀밀랍을 바른 크베브리에서 최상의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덧붙였다. 토기 안과 밖에 바르는 재료에 따라 온도 관리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졸로하바는 “옛날에는 내벽과 외벽 사이에 물을 흐르게 해 조절하기도 했다”며 “지금은 냉각 시스템의 파이프라인이 크베브리를 싸고 있다”고 말한다.
와인농장 카피스토니에서 숙성 중인 와인을 잔에 따르는 모습.
바지아니에 도착하자 마당 한가운데 드러누운 크베브리와 오크통을 발견했다. 그 뒤로 캅카스산맥 자락의 단조롭지만 힘찬 선이 배경화면처럼 깔렸다. 고즈넉한 목가적인 풍경이 와인에 배어 있었다. 직원 아우티카 킴이 나왔다. 그는 아버지가 ‘카레이스키’(1860년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가 1907년에 만들어진 점판암(점토가 굳어서 된 변성암) 크베브리를 보여줬다. “점판암은 곰팡이가 잘 안 생긴다”고 말했다. 토기에 바르는 석회는 항균 작용도 한다고 알려준다. 석회를 물에 타 세척제로 쓰거나 재로 천연세척제를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크베브리 세척가’란 직업도 있단다. 그만큼 위생에 신경 쓴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소박한 숙박시설을 갖춘 와인농장 슈미의 마당에 커다란 크베브리가 전시돼 있다.
와인농장 카피스토니의 주인인 니코 초치슈빌리가 생산한 와인을 보여주고 있다.
카피스토니 농장 주인 니코 초치슈빌리는 복원된 희귀 토착품종 사용에 앞장서고 있다. 그가 내놓은 와인들은 샤프카피토, 타프크베리 등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날마다 새 맛 개발에 나서는 농부가 조지아에는 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도 껍질의 양을 줄이거나 아예 빼는 이도 있다. 서유럽 품종과 섞은 포도즙을 크베브리에서 숙성하는 농부도 있다. 농장을 체험공간화한 슈미, 소박한 숙박시설을 갖춘 추비니, 전시와 결혼식 공간을 갖춘 샤토 무흐라니 등 지금 조지아 와인업계는 전통을 잇되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초치슈빌리의 확신에 찬 철학에서 ‘신의 의도’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이 빚은 포도의 제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핵심이다.”
조지아/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