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한 판, 어때?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e-스포츠로 변신한 인류 최고(最古)의 게임 바둑…스타 기사들 지지 속에 성공 여부 주목
e-스포츠로 변신한 인류 최고(最古)의 게임 바둑…스타 기사들 지지 속에 성공 여부 주목
흰 돌 옆에 까만 돌이 나란히 놓이면 ‘탁’ 소리와 함께 그 위로 마우스 커서가 지나간다. 흰 돌과 까만 돌이 엎치락뒤치락 자리를 바꾸면서 끊어질 듯 말 듯 한 선을 이어가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면 돌이 ‘피시식’ 소리를 내며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네모반듯한 판은 점점 더 흑과 백으로만 이뤄진 면으로 채워진다. 판이 돌로 채워질수록 점수판의 숫자는 22에서 27로, 27에서 26으로 끊임없이 뒤바뀐다.
흰 돌과 까만 돌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설명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바둑이다. 그런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바둑판 위로 진짜 쥐면 몰라도 컴퓨터 마우스가 지나갈 리는 만무하니까. 그렇다면 컴퓨터로 하는 온라인 바둑에 관한 설명일까? 아니다. 바둑판 위의 돌이 연기를 내며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온라인 바둑치곤 지나친 설정이고, 한 번에 5점이 널뛰는 점수 역시 일반 바둑에서는 없는 일이다. 이는 바둑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게임 ‘바투’ 얘기다.
다음달 1돌을 맞는 신생 온라인 게임 바투가 최근 게임업계 안팎에서 다양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바둑의 지존 이창호 9단이 헤드폰을 쓰고 컴퓨터 앞에 앉았고, 이미 게임 방법을 알고 있는 온라인 바둑이나 고스톱, 장기, 마작 이외에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던 중년층이 새로운 규칙을 익히기 시작했다. 처음 열린 ‘월드 바투 리그’에는 중국은 물론 캐나다, 미국, 독일 등 10여 국가의 6000여명이 온라인 예선에 참가했다. 회원 수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무엇보다 현실 세계에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스포츠이자 게임인 바둑을 온라인 게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발은 땅에 딛고 몸은 가볍게 하고 머리는 회전 속도를 높인 바투는 새로운 온라인 게임의 탄생을 알렸다.
“바둑의 논리성을 현대인의 감수성으로”
바투 개발사인 이플레이온은 온라인 게임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미디어 회사 온미디어가 2006년 설립한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서비스 업체다. 회사가 설립된 2006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이(e)스포츠는 스타크래프트와 카트라이더 등 몇 가지 게임 말고는 새로운 게임이 없다. 역시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국내 게임업체는 이스포츠가 될 만한 게임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플레이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플레이온은 온미디어의 대표적인 게임 채널인 온게임넷의 이스포츠 중계 관련 경험을 바탕으로 이스포츠 문화가 될 만한 게임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게임 구상을 시작했다.
이스포츠의 조건으로는 두 가지를 꼽는다. 전략성과 속도전. 이플레이온이 선택한 것은 인류가 만든 가장 전략적인 게임이자 수천년을 이어온 불멸의 게임인 바둑이었다. 바둑은 온게임넷뿐 아니라 온미디어의 또다른 채널 바둑티브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장점이 있었다. 바둑을 변형한 온라인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한 다음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낼 기획팀이 꾸려졌다. 그리고 2년여의 고군분투 끝에 나온 게임이 ‘바투’다.
이스포츠가 될 만한 온라인 게임이 되기에 바둑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장 먼저 게임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것. 바둑은 몇 시간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두기도 한다. 승부에 변수가 드물다는 것도 온라인 게임이 되기에는 단점으로 꼽혔다. 완전한 논리 싸움인 바둑은 실력이 곧 결과다. 변수가 적으면 그만큼 게임을 할 때는 재미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판을 19줄에서 11줄로 줄였다. 판 크기가 작아져 원래 바둑이 갖고 있는 전략성과 심오함이 줄었지만 동시에 15분에서 20분 정도면 한 판을 둘 수 있게 됐다. 전략성을 보완하고 게임의 변수와 긴장감을 만들어내려고 ‘히든’ 등의 새로운 규칙을 더했다. 이플레이온은 이를 두고 “바둑의 논리성을 현대인의 감수성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라며 “‘전투바둑’이 ‘바투’”라고 설명한다.
웹 게임과 기능성 게임은 바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웹 게임은 웹 브라우저를 띄워 온라인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가벼운 게임을 말한다. 최근에는 설치하는 데만 6기가 이상의 용량이 필요한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보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웹 게임이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온라인 게임 웹진 ‘디스이즈게임’ 이재진 기자는 “어느 컴퓨터에서든 할 수 있고 20~30대 직장인들이 회사에서도 할 수 있는 웹 게임을 찾는 사용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폭력적이지 않은 웹 게임이면서 대전의 형태를 가진 바투 역시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게임을 말하는 기능성 게임 역시 지난해부터 게임업계의 화두인 게임 형태다. 콘텐츠경영연구소 원은석 부장은 “이미 국내 게임시장은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게임이 선택받기란 쉽지 않다”며 “그래서 신규 게임 시장에 대한 요구가 나오고 있는데 기능성 게임이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콘텐츠경영연구소에서 개발하는 교육용 온라인 게임 ‘지(G)러닝’ 등이 기능성 게임의 대표적인 예다. 바투 역시 바둑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하나의 기능성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원 부장은 “게임업체가 만드는 단순한 흥미성 게임이 아니라 제조업체가 특정한 목적에 맞게 아이디어를 내고 발주를 해서 게임업체가 개발을 맡는 식의 게임이 앞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바투는 온라인 게임이지만 오프라인 바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기획과 개발에서 프로 기사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했고, 프로 기사들의 관심이 신생 온라인 게임 바투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바투가 지난해 12월 공식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조훈현·이창호·유창혁·박지은 등 바둑계의 최정상급 기사 10명을 초청해 바투 경기를 펼친 ‘바투 인비테이셔널’을 개최한 것도 이런 이유다. 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바투 게임을 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들이 마우스를 잡은 데는 몇 년 동안 하향세를 보이고 있는 바둑 자체의 위기감이 한몫했다. 이들은 ‘낡았다’는 인상이 지배적인 바둑계가 ‘젊은’ 온라인 게임 바투를 통해서 바둑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바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바둑에 관심을 갖게 될 거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바둑이 온라인 게임으로 변질되면서 근본 정신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바둑계에서는 지금도 바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쉽게 지루함 느끼는 10대 벽 뚫기가 관건
바투는 게임 채널을 갖고 있는 회사에서 개발했다는 점과 비록 절반일지라도 기존 바둑계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게임에 비해 유리한 곳을 선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성공’ 여부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바둑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을 경우 바투를 즐기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은 다른 온라인 게임에 비해 높은 진입 장벽으로 버티고 있고,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을 만큼 유해하지 않다는 말은 온라인 게임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10대에게는 지루한 게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투가 온라인 게임으로서도 성공하고 바둑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게 될까, 아니면 온라인 게임으로서의 매력과 바둑 자체의 내공을 잃고 표류하게 될까. 시간이 더 지나야 확실한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도 있다. “바투 한 판, 어때?”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표지디자인 이상호 기자 silver3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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