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영국의 리처드 레이놀즈라는 청년은 세들어 사는 아파트 앞에 몰래 꽃을 심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그저 구청에서 쓰레기를 치워주기만 바랄 뿐 손놓고 있던 곳이다. 그가 꽃을 심은 뒤 공터는 달라졌고 레이놀즈가 그 변화를 사진으로 찍어 웹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하자 세계 곳곳에서 호응이 일었다. ‘게릴라 가드닝’이라는 말은 이렇게 유명해졌지만 그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그전에도 세계 곳곳에서 혼자 게릴라처럼 정원을 만들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뒤 민들레 씨가 퍼지듯, 죽순이 고개를 내밀듯, 웹사이트로 자신이 하고 있는 게릴라 가드닝 작업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녹색 집단지성 프로젝트는 번식력이 강하다. 2006년 봄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청년 4명이 도시 곳곳에 해바라기를 퍼뜨리는 ‘해바라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뒤 게릴라 가드너들은 해마다 5월1일을 ‘게릴라 가드닝 데이-해바라기의 날’로 삼았다.
3. 세계 게릴라 가드닝의 날을 상징하는 그림.
한국의 게릴라 가드너는 어떤 사람들일까. ‘경작 본능’이 빛나는 그들의 맨얼굴은 뜻밖에도 젊고 발랄했다. 5월4일 홍대 앞 게릴라 가드닝을 준비하는 명랑시대 모임 회원 자격은 40대 이하 솔로다. 사연이 있다. 모임을 주도하는 소란(명랑시대 닉네임·36)에 따르면 이 모임은 귀농운동본부 청년들 준비회의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1세대 귀농인들과 자신들의 생각이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랑시대 회원은 100명. 장애인, 레즈비언, 게이, 한량, 예술가 등 층위도 관심도 다양했다. 결혼과 가족, 농사와 봉사를 중심으로 한 기존 귀농정책으로 묶일 수도 엮이고 싶지도 않은 이들이었다. “어른들은 우리가 농촌에서 짝짓고 일하기를 원했지만 모인 청년들은 독신이 대부분이고 성정체성도 다양했다. 기존의 가족 중심 귀농공동체는 도시에서 이루지 못한 우리의 욕구들을 생생하게 구현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퍼머컬처(지속가능한 농업과 문화) 디자이너로 일하는 소란의 설명이다. 10년 가까이 지역생태공동체 활동가로 일해온 쥰(33)은 “최근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밭은 젊은 농부들로 북적인다. 선배들은 농사가 중요하다는 사명감으로 귀농했지만 지금은 내가 좋으니까 농사일에 손을 댄다는 식이다”라고 전했다.
3~4평의 땅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유기농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대체로 문화 접촉면이 다양하고 생태적 감수성도 높은 편이다. 그들이 구현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일까. 의류쇼핑몰을 운영하는 청지(36)는 “도시에서 사노라면 이렇게 사는 삶이 행복한가 수시로 묻게 된다”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활에서는 도시 생활의 피로가 상당수 덜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배이(31)는 프랑스 유학 시절 흙을 만지는 즐거움에 눈을 떴다. “우울증이 있었는데, 도시 텃밭을 하면서 나아졌다”고 했다. 그는 올여름 영국의 퍼머컬처센터에 유학한 뒤 자급자족하는 삶을 찾을 계획이란다. 꼭 전업농부여야 하는가. 서울 강남의 한 회사에서 마케팅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레오(30)는 올해부터 도시농부학교를 다니며 주말에 작은 텃밭을 일군다. 홍대 앞에 채소를 심는다고 자신이 거둘 리가 없다. “요리 프로그램인 <제이미 올리버 쇼>를 즐겨 보다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알게 됐죠. 제가 일구어 놓은 밭을 보고 누가 또 관심을 가지면 제가 그 사람의 제이미 올리버가 되는 거예요.”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 혜민(32)은 “나는 집에서 무순이나 길러 먹지만 여럿을 위해 채소를 심어두는 일은 생산적이고 사랑스러운 일 같다”고 말했다.
젊은 도시농부들
도심 한뼘 땅 경작에 관심
“도시가 이래도 되나
문제제기하고 싶다”
게릴라 가드닝의 배후세력은 해마다 무섭게 커가는 도시농업이다. 홍대 앞 게릴라 가드닝에 가담한 파주도시농부학교 교장 신보연(54)씨 말에 따르면, 도시농부는 2010년엔 15만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올해는 100만명, 2017년에는 3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땅이다. 도시농부를 감당할 땅이 모자란다. 명랑시대 활동가 소란도 “영국에서는 ‘도시텃밭 대기자 모임’이 가장 큰 압력집단으로 성장했다”고 전했다. 게릴라들은 그 땅을 얻기 위해 선도투쟁 중이다.
5. 경복궁역 주변 버려진 땅에 꽃을 심는 모습.
“게릴라 가드닝은 이 도시에 합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공간에서 도시가 이래도 되나,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이해되면 좋겠습니다.” 신씨의 말이다.
합법에서 비합법까지 게릴라 활동이 다양한 것처럼 게릴라 층위도 다양하다. 국민대 그린디자인대학원 졸업생들로 구성된 ‘그린 게릴라’ 팀은 도시에서의 창의적 녹화활동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그룹이다. 대학로 등지에서 가드닝을 비롯해 다양한 녹화방식을 실험하고 공유해왔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그들은 취미처럼 프로젝트를 계속한다. 그린디자인 워크숍센터에서 일하는 신정미(46)씨 말로는 “우리의 광고주는 지구”란다.
그밖에 얼마나 많은 게릴라들이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밭 하나 얻기 위해 관과 싸워야 하는 기간이 엄청나게 길다. 부동산 문화가 뿌리깊은 한국에서는 비어 있다고 해도 공유지 점거를 범법 행위로 보지만 유럽에서는 생존권 문제로 본다”고 했다. 게릴라 가드닝은 빈 공간을 공공점유로 삼자는 도시농부들의 시위인 셈이다. 한 게릴라는 “지금도 동네에 공터만 보이면 식물을 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원조 게릴라다”라고 말한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참고서적 <게릴라 가드닝>(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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