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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의 새로운 모색
사유지 침해 논란으로
주민과 갈등 빚기도
버려진 공유지나 사유지에
기습적으로 꽃·채소 등 심는
게릴라 가드닝
배타적 땅 소유권 벗어나
누구나 화단 가꿀 권리 주장
도시농부의 새로운 모색
사유지 침해 논란으로
주민과 갈등 빚기도
버려진 공유지나 사유지에
기습적으로 꽃·채소 등 심는
게릴라 가드닝
배타적 땅 소유권 벗어나
누구나 화단 가꿀 권리 주장
지령이 떨어졌다. 5월4일 밤 9시 서울 홍대 앞으로 집결하라. 전 대원, 얼굴에는 복면을 두르고 연장을 챙길 것. 북소리를 신호로 행동에 돌입하라. 클래식 기타 연주팀 여연, 반도네온 탱고팀, 우쿨렐레 연주자들이 선동을 맡아 적진을 교란하라. 은밀하게 위대하게, 30분 안에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군중 속으로 숨어야 한다. 대원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드레스코드. ‘에지있는 농부 패션’을 하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그들은 명랑시대(명랑한 청년들이 시골에서 대안을 찾다) 모임의 대원들이다. 이들의 임무는 ‘걷고 싶은 거리’에 있는 공터 3곳을 경작지로 바꾸는 일이다.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는 ‘주차하고 싶은 거리’로 바뀐 지 오래다. 밤이 되면 차와 사람들로 빼곡한 이곳에도 원래는 화단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치이고 밟혀 지금은 풀 한 포기 없는 모래 화단이다. 이들은 그 땅에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지주대를 올려 농작물의 영토를 만들 셈이다. 한밤중, 소비와 문화의 거리 한복판에 기습적으로 식물을 심을 그들은 자신들을 ‘게릴라 농부’라고 부른다.
5월4일은 남의 땅에 불법으로 침범해 씨를 뿌리고 도망가는 게릴라 가드닝이 한국에서도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시작되는 날이다. 왜 하필 불법인가. 거주권이나 경작권보다는 소유권이 앞서는 땅의 운명을 바꾸자는 생각이다. 자기 땅 한 평 없어도 누구나 화단을 가꾸고 채소를 기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대신 그 땅에서 자라는 꽃은, 채소는 모두의 것이다.
그전부터도 국지전은 있었다. 4월18일 저녁 7시, 서울 이화여대 앞 한 골목에 6명이 모였다. 어떤 이는 흙을, 다른 사람은 꽃 모종을 들고 왔다. 그들의 작전 지역은 늘 쓰레기가 쌓여 있던 어느 창고 앞. 얼마 전 창고 맞은편에서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김아영(33)씨는 가게에서 건너다보이는 이곳을 바꾸자고 네이버 카페 ‘게릴라 가드닝’ 회원들에게 제안했다. 김아영씨가 이웃주민들과 벽을 칠하자 만화가 김승원(28)씨가 벽화를 그렸다. 온라인으로 하나둘 모인 사람들이 같이 심고 돌보기를 약속했다.
이상한 일이다. 도시화와 재개발은 높고 번듯한 빌딩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꼭 그 주변 어디쯤인가 방치되고 쓰레기가 쌓이는 구석도 생겨난다. 소유권의 경계에 있거나 딱히 쓸모없는 땅의 한구석은 버려지기 때문이다. 게릴라 가드너들이 즐겨 공략하는 곳도 이런 곳이다. 세계의 ‘게릴라 가드너’ 중에는 “쇠스랑과 꽃으로 쓰레기와 싸우자”며 아예 쓰레기를 치우는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 일을 즐기는 듯 보인다.
18일 이화여대 앞에 모인 사람들도 그랬다. 하얗게 칠한 벽엔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는 팻말 대신 물뿌리개와 꽃 그림이 걸렸다. 흙을 깔고, 모종을 심고, 물을 뿌릴 때마다 방치됐던 창고벽이 변해가는 모습을 최대한 느긋하게 즐기려는 듯 보였다.
“어머, 애기별꽃 뿌리 좀 봐요!” 하얗고 촘촘하게 얽힌 애기별꽃 뿌리는 지워도 지워도 닦아지지 않던 도시의 얼룩을 화사한 꽃으로 피울 수 있을까. 이날 이곳에는 애기별꽃, 금잔화, 라벤더, 수레국화 같은 꽃과 허브들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4월20일에는 서울 종로 서촌에 ‘그린 게릴라’가 나타났다. 자연주의 패션 브랜드 이새에서 벌인 ‘아름다운 길 만들기’에 게릴라 가드닝을 해온 국민대학교 ‘그린 게릴라’ 프로젝트 팀과 자원봉사자들이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지하철 경복궁역 옆 버려진 화단, 체부동 한평공원, 통의동 백송터 근처로 흩어졌다. 체부동 막다른 한평짜리 작은 골목에 반평짜리 화단이 태어났다. 꽃뿐만 아니라 치커리, 상추, 토란, 쑥갓,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오이, 호박 같은 먹을 채소도 조금씩 알뜰살뜰 심었다. 게릴라들은 심고 도망간다. 키우고 거두는 것은 동네 주민의 몫이다. 서울 통의동 백송터 옆에는 담과 보도블록 사이 딱 한 뼘 자리가 있었다. 길이는 7m 남짓.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다져져 길처럼 보였던 이 땅을 호미로 일구니 애기동국이 한 줄로 쪼르르 설 자리가 나왔다.
무엇을 심을 것인가. 게릴라 농부들에게는 정부 수립만큼이나 중대하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이들은 씨를 뿌리거나 꽃을 심기 전에 종이에 수없이 밭을 그리고, 머릿속에 깊은 이랑을 판다. 은밀하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그렇다곤 해도 여름의 밭과 가을의 밭은 또 얼마나 다른가.
4월19일 열린 ‘홍대 앞 게릴라 가드닝’ 작전 모임도 주로 이 주제로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다. ‘우리가 심을 식물들을 보호하겠다고 경계선을 만들면 공연 볼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빼앗는 것 아닌가’ ‘풀도 생명인데 우리가 심어놓고 떠나버린다면 죽을 것 아니냐,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나’ 등의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앉을 자리를 남겨두고 여유있게 심고, 근처 상가 주민들과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이날 회의에서 수립된 지도부의 노선이다.
작전상 후퇴다. 20일 통의동에서도 이새와 그린 게릴라들이 한창 꽃을 심고 있을 무렵 한 동네 주민의 항의로 작업이 중단됐다. 이래서 게릴라들은 밤에 움직이나 보다. ‘그곳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채소라도 기르려고 봐두고 단장해둔 자리’라는 아주머니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런가 하면 산에 다니면서 씨를 받아뒀다가 게릴라들에게 건네는 주민들도 있다. 건설과 개발 논리와 싸우는 게릴라들에게 주민들은 적군이자 보급기지다.
설득이 통한 것일까. 1시간 뒤 백송터 왼쪽 구석에는 장미조팝이며 붓꽃, 물망초들이 자리를 잡았다. 물론 풀꽃이 유한한 것처럼 새로 만들어진 화단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홍대 앞 게릴라 가드닝에 참여한 신보연(54)씨는 “외국에서는 아스팔트를 부수고 나무를 심기도 하지만 우리는 최초로 게릴라 가드닝을 시작하는 국면이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지만 누구의 재산도 침해하지 않는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쯤에서 첫발을 디뎠다”고 했다. 게릴라 가드닝 첫해, 한국의 게릴라들은 평화전술을 택했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일러스트레이션 정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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