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천리 집 거실에 서 있는 최미애씨.
[esc]살고 싶은 집
낡은 집 고쳐 소박한 삶터로 바꾼 모델 최미애·가수 윤영배씨의 제주 집 이야기
낡은 집 고쳐 소박한 삶터로 바꾼 모델 최미애·가수 윤영배씨의 제주 집 이야기
마룻바닥을 네모나게 파서
가운데 난방 겸 취사 난로를 놓고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게 했다
제주도 전통 마른 부엌을
거실로 들여온 셈이다 잠시만, 하다가 1년이 됐다. 여행자로 왔다가 제주도민이 됐다. 건축가들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잠재력을 두고 ‘땅의 기운’이라고 하는데 제주도 땅의 기운은 사람의 발목을 잡아 주저앉히는 것이 틀림없다. 지난해 제주도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4876명. 이 사람들이 모두 제주도에 새집을 지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사랑했던 평화롭고 한적한 기운은 어떻게 될까. 제주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대신 오래된 집을 고쳐 살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을 찾아가보았다.
모델 최미애씨 ‘덕천 촌년의 집’
2001년 8월부터 2002년 7월까지 프랑스인 사진작가 루이와 한국인 모델 최미애(48)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서울까지 4만여㎞를 버스로 여행했다. 그토록 넓은 대륙을 쏘다녔던 미애씨가 지금 발길을 멈춘 곳은 제주시 구좌읍 덕천리. 그사이에 루이와 헤어진 미애씨는 지금 혼자 산다. 아빠와 독일에 살다가 여름방학이면 엄마에게 오는 아이들은 올여름엔 제주도로 올 것이다.
“2012년 6월, 한달 동안 제주도를 자전거 일주 하다가 살 곳을 수소문했어요. 그전부터도 50살이 되면 제주도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을 몇년 일찍 이룬 셈이지요.” 비어 있는 집 4곳을 돌아봤는데 유독 이 집에 ‘꽂혔다’. “옛날 돌집을 원했던데다 집 앞 숲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오랫동안 비어 있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기가 좋았어요.” 986.7㎡의 너른 땅에 보증금 20만원에 연 40만원이라는 믿기지 않는 저렴한 임대료다. 그러나 지은 지 40년도 더 된 벽은 손만 대면 바스러졌고 천장에서도 흙이 떨어져내렸다. 친구들이 손을 내밀었다.
“조형예술가 권순범씨가 집의 틀을 짜고 연기자 방중현씨가 인테리어를 해줬어요. 작곡가 방승철씨가 미장공사를, 미술가 황보령씨가 페인트칠과 창문, 수도 공사를 맡았죠.” 여러 작가들이 손을 합쳐 고친 이 집의 주제는 무엇일까? “평범한 사람 사는 집 모양새였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권순범씨가 ‘덕천 촌년의 집’으로 명명했어요.” 집 안으로 들어서는 대청마루 문은 열리지 않도록 마감해 거실창으로 바꿨다. 대신 숲으로 향하는 남쪽 벽을 터서 현관문으로 만들었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색은 마룻바닥을 네모나게 파서 그 가운데 난방 겸 취사를 위해 난로를 놓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나물을 다듬거나 음식 밑준비를 하던 제주도 전통 마른(건식) 부엌을 거실로 들여온 셈이다. 많이 고쳤지만 원래 집의 식구들을 내다버리지는 않았다. 처마에서 나온 흙은 도예가가 일일이 거두었다가 물에 개어 집벽에 다시 발랐다. 뒤틀려 있는 집의 나무 귀틀과 서까래도 그대로 두었다. 소박하게 고쳐진 옛집 마무리는 미애씨가 여행할 때마다 하나둘씩 모아온 화려한 색감의 패브릭(천)으로 했다. 부엌문, 안방 앞, 화장실 입구 등엔 인도며 타이, 티베트에서 사온 천을 걸었다. 우아한 거실등을 다는 대신 알전구에 베트남과 인도에서 산 갓등을 씌웠다.
지난해 11월 말에 시작한 공사는 2월 말에야 끝났다. 이 집을 고치는 데 들인 돈은 4000만원을 넘는단다. “고쳐놓으면 나가라고 한다는데 그건 몰라요. 하하. 내일 일은 걱정 안 해요. 오늘 좋으면 되지. 사실은 한군데 매여 있는 것을 못 참아요. 내일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있게, 여기 있는 물건 모두 버리고 가도 하나도 안 아깝도록 살아요. 비싼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 집에서 유일하게 묵직한 가구인 반닫이는 예전에 이 집에 살던 할머니가 쓰던 거란다.
미애씨는 일주일의 반은 전북 완주군의 백제예술대 모델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반은 제주도에서 ‘덕천 촌년’으로 산다. 제주도로 내려오면 시간은 갑자기 천천히 흐른다. “여기서는 뭐든지 천천히 하는 즐거움이 커요. 그런데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농사도 짓고 서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죠.” 도시에선 새벽 2~3시쯤 잠들고 9시쯤 일어나는데 제주도에 오면 7시엔 눈이 떠진다. 아침을 먹고는 노상 바깥일이다. 겨울엔 땔감을 마련해야 하고 봄에는 텃밭일로 하루가 후딱 간다.
일어서려는데 미애씨가 다시 주저앉힌다. “제가 만든 노래 한곡 듣고 가실래요?” 혼자 있는 시간을 메우며 만든 노래가 30여곡. 올해 말쯤엔 음반도 책도 낼 계획이란다. 제주가 안겨준 생산성이다. 나지막한 노랫소리 사이사이로 끊임없이 숲속에서 새가 울었다.
가수 윤영배씨의 ‘고산방앗간’
제주 공항에서 서쪽으로 46.5㎞를 달려가면 바람도 비도 거센 한경면 고산리에 닿는다. 2010년 데뷔 17년 만에 처음으로 음반을 내서 사람들의 입에 올랐던 가수 윤영배(45)씨는 2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바람을 막아볼 요량으로 유리문에 판자를 댄 슬레이트 집, 지은 지 30년은 되어 보인다. 제주시에 사는 주인은 사람 잃은 빈집이 갑자기 늙는 것을 보다 못해 거저 세를 내줄 궁리를 했고, 그때 마침 살 곳을 찾던 윤영배씨네와 인연이 닿았단다. 가수 윤영배씨와 부인, 그리고 친구들은 이 집을 고산방앗간이라 부른다. 원래는 고산리 마을 방앗간 간판이 예쁘고 좋아서 따라 썼는데 얼마 전 가수 이효리씨도 제주도 내려오는 김에 들를 만큼 소통과 교류의 방앗간이 됐다.
고산방앗간을 찾던 날 마침 윤씨는 3집 음반을 녹음하러 서울로 가고 부인 고산댁(별명·29)과 친구 말랴(별명·37)가 손님을 맞았다. 집은 안거리(본채)와 밖거리(별채), 두채로 되어 있다. 집이라고 꼭 지붕 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마당에는 화로자리를 마련해 날씨 좋은 날엔 여기 둘러앉는다. “사람마다 눈높이가 다르겠지만, 저희는 충분히 살 만하다고 여겨서 많이 고치지는 않았어요. 집 밖은 흰색으로, 집 안은 초록색으로 칠했죠. 보일러를 놓을까 하다가 난로를 들였는데 한겨울에도 충분히 난방이 돼요.” 부인이 살아본 소감이다. 서울에 있는 윤영배씨의 말대로라면 “손톱만큼도 아쉬울 게 없는 집”이란다.
제주도 전통가옥은 집 가운데 마루가 있고 좌우에 방과 부엌이 있다. 지은 지 30년쯤 되는 이 집은 그 구조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 작은방엔 ‘벽감’이라고 부르는 붙박이 벽장까지 그대로다. 처음 들어올 때 공사를 많이 하지 않은 대신 살면서 필요한 만큼 고치고 다듬는다. 이 집의 특징은 방마다 마련된 책장이다. “바닷가에 가면 바다에서 떠내려온 나무들이 많아요. 잘 말려 선반만 만들어도 예쁘고 좋아요.” 침대 앞에 높인 날렵한 베드 벤치는 목수로 일하는 친구 말랴가 구해다준 나무로 만들었다. 고기를 구워 먹는 불판을 박박 씻어 옷장문으로 만들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산다는 것은 소비와 유통 구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집은 집주인의 생활방식을 담고 있다. 채소를 기르는 마당 옆 우영팟(제주도 텃밭)은 화장실 뒤쪽과 통해 있어 인분을 퍼서 거름을 주기 쉽도록 되어 있었다.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고 침대를 들여놔도 화장실은 재래식으로 고수한 이유다. 부인과 고산방앗간에 살기 전부터도 10년 가까이 제주도 생활을 해온 윤영배씨의 별명은 제 머리 제가 깎는다고 해서 ‘이발사’란다.
“열심히 음악 하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진짜 음악 건달”이라는 윤씨는 나무하다가도 밭에서 일하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노래를 만든다. “저기 철탑 위에 오르는 사람이 보이는가/ 저기 갯것가자 부르는 구럼비가 보이나”(3집 <위험한 세계>) 고산방앗간에서 만들어진 3번째 앨범은 치열했다.
제주/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가운데 난방 겸 취사 난로를 놓고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게 했다
제주도 전통 마른 부엌을
거실로 들여온 셈이다 잠시만, 하다가 1년이 됐다. 여행자로 왔다가 제주도민이 됐다. 건축가들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잠재력을 두고 ‘땅의 기운’이라고 하는데 제주도 땅의 기운은 사람의 발목을 잡아 주저앉히는 것이 틀림없다. 지난해 제주도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4876명. 이 사람들이 모두 제주도에 새집을 지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사랑했던 평화롭고 한적한 기운은 어떻게 될까. 제주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대신 오래된 집을 고쳐 살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을 찾아가보았다.
2 얼마 전 흰색 페인트로 단장한 돌집.
3 집주인 할머니가 남겨놓은 반닫이.
4 미애씨 집은 서울에서 오는 손님들로 항상 붐빈다.
5 고산리 윤영배씨 집 외관.
6 고산방앗간은 여럿이 둘러앉아 이야기하기 좋은 공간이다.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