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찬제씨의 캐치맙 밀대 걸레 시연. GS·CJ 홈쇼핑 제공
[esc] 라이프
홈쇼핑 매출 움직이는 시연의 달인들…극적 효과보다 과장 없는 리얼리티가 대세
홈쇼핑 매출 움직이는 시연의 달인들…극적 효과보다 과장 없는 리얼리티가 대세
땀으로 범벅이 된 그가
유리창을 닦기 시작하자
7분 사이 1000여통의
주문전화가 걸려왔다 “줍지 말고 (밀대 걸레로) 밀기만 하세요.” 8월29일 저녁 8시 지에스홈쇼핑에 쇼핑 게스트로 나온 해피콜 사업부장 우찬제(46)씨는 이 말을 한 서른번쯤 반복했나 보다. 그래도 좀처럼 주문은 늘지 않았다. 방송 종료 20분을 앞두고 그가 걸레를 밀기 시작했다. 같이 진행하는 쇼핑 호스트가 바닥에 잉크를 뿌리면 닦고, 과자 부스러기를 던지면 또 닦으면서 숨이 넘어갈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는 페인트를 유리창에 뿌리고 불을 붙인다. “가장 닦기 어려운 탄 얼룩도 슬슬 닦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가 유리창을 닦기 시작하자 갑자기 주문도 숨가쁘게 늘었다. 시연 7분 사이에 1000여통의 주문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날은 프라이팬이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양념을 넣어 태우고, 다시 씻어내고, 부침개를 하고 삼겹살을 굽는 1분 동안 그가 쏟아낸 말은 450글자. 말과 손이 각기 번개처럼 지나간다. 홈쇼핑에서 밀대 걸레, 프라이팬, 냄비 등을 시연 판매하는 그는 한달에 보통 25~30번은 방송에 나간다. 그가 팔던 게 히트상품이 되면서 거리에서 그를 알아보는 시청자들이 생겼다. “앗, 걸레질하는 아저씨다” 이렇게.
요즘엔 홈쇼핑 진행자를 양성한다는 여러 사설학원에서 게스트반도 두고 있지만 우찬제씨는 현장 판매 경력 15년이 만든 시연의 달인이다. 1998년 롯데백화점에서 채칼을 들기 시작해 여러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채칼, 프라이팬, 냄비, 믹서기를 시연 판매해 왔단다. 말솜씨와 화려한 시연을 무기로 2005년 양면 프라이팬을 들고 홈쇼핑 방송에 뛰어들었다. “우아하게 요리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많았어요. 전 요리사도 아니니까 살길은 지르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이름 없는 회사가 만들었는데 값도 비싼 이 프라이팬을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프라이팬에 비닐을 넣고 태웠어요. 그 팬으로 계란 프라이도 하고 부침개도 부쳤어요. 방송할 때마다 양념 부어서 태운 지는 5년이 넘었어요. 그 시연이 소비자 머릿속에 남는 거예요.”
“그래서 터졌다”고 했다. 1만~2만개 정도 준비된 물품이 방송에서 전부 팔리는 ‘터진 날’에는 잊을 수 없는 흥분이 찾아온다. 그러나 새 상품을 팔게 되면 다시 입안이 마른다. “무섭고 떨리고 방송 앞두고 열흘 동안 잠도 못 자요. 작은 공장이 수년 동안 투자하고 개발했어도 방송 한두번에 승패가 나거든요. 그 회사 직원들에 식구들까지 책임지는 기분이죠.” 새 물건을 팔기 전에 시연 동작은 세세하게 짜지만 멘트는 미리 정하지 않는단다. “전국구 방송이니까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멘트를 많이 해요.”
우씨는 요즘 다른 나라 홈쇼핑에도 자주 출연한다. 주로 동남아시아 국가를 돌며 한국어로 제품을 소개하고, 시연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인기가 있단다. 그가 생각하기엔 시연은 자제력이 필요하다. “제품 시연 시간이 짧을 땐 6분, 길어야 8분을 넘기면 시청자들은 지루해한다. 짧은 시간에 어떤 걸 보여줄 건가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오버액션이라도 하면 반품률이 높아진다. 결국 잘 쓸 수 있는 것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그가 밝히는 노하우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시연의 트렌드는 리얼리티다. 1주일 전쯤 씨제이오쇼핑의 한 냄비세트 판매 방송에는 거의 말도 하지 않는 조용한 게스트가 출연했다. 올리브채널에서 방송하는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 <마스터 셰프 코리아>(마셰코)의 이름을 딴 냄비여서 지난해 준우승을 거뒀던 박준우씨가 요리 전문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러나 홈쇼핑 진행자와 게스트가 입을 모아 상품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다. 이 방송에서 박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뒤편에서 말없이 요리만 한다. 제품 칭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지막에 그가 만든 요리를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이날 함께 방송을 진행했던 홈쇼핑 호스트 김민향(41)씨는 “마술 같은 기능이 아니라 스테인리스의 재질이나 강도 등 상품 설명에 주력하는 것이 이 방송의 특징”이라며 “시끄럽고 정신없는 홈쇼핑 이미지를 지우고 제품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씨제이오쇼핑 홍보팀 쪽은 “지난해 한 부엌칼이 쇠도 자르고 도마도 자르는 시연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그러나 실제 사용자들이 방송 시연처럼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지 못하면 다시 불만이 커진다. 화려한 시연보단 실제적인 시연이 추세”라고 했다.
솔직한 시연을 기대하다 보니 요즘엔 쇼호스트들이 직접 시연하는 일이 많아졌다. “전문 모델들이 더 예쁘고 피부가 좋은데도 반응이 시큰둥해요. 예전엔 쇼호스트가 클렌징 제품 같은 걸 손등에 발랐다가 지우는 모습 정도를 보여줬다면 요즘엔 카메라 앞에서 세수를 해야 해요.” 그래서 김민향씨는 툭하면 민낯으로 방송에 출연한단다.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한쪽만 해서 화장한 얼굴, 안 한 얼굴 비교하는 화면을 내보내요. 반쪽 얼굴이 더 흐리멍텅해 보여서 너무 부끄럽지만 판매엔 도움이 돼요.”
30일 씨제이오쇼핑 스튜디오에서 헤어제품 판매 방송을 마친 지수진·권미란씨의 말도 비슷했다. “시연은 셀프”라는 것이다. 이날 방송에선 일반인들이 여럿 함께 출연해서 헤어 제품을 바르며 머리숱이 많아 보이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요즘 시청자들은 리얼한 걸 원해요. 말로 하기보다는 쇼호스트들이 몸으로 보여주거나 아니면 제가 집에서 쓰고 있는 사진이라도 들고 와야 해요.” 미용 전문 쇼호스트 권미란씨의 이야기다.
그래도 가끔 화장품에 불을 붙이거나 머리카락을 내주는 시연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마셰코’ 냄비 판매 방송에선 갑자기 박준우씨의 탄식이 들렸다. “불 나갔어.” 전기레인지가 고장나는 바람에 뜨거운 냄비에서 요리를 하는 연출조차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끝까지 화려한 시연은 없었지만 이날의 판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단다. “마지막에 냄비에 와인을 붓고 불꽃을 피워올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안 되잖아요. 아찔했지만, 그냥 솔직히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여러분 죄송합니다. 요리하는 장면은 보여드릴 수가 없군요.” 17년차 경력의 김민향씨는 입사 초기에 방송을 함께 진행하던 남자 선배가 던진 그릇이 깨지는 사고를 경험했다. 하필 “깨지지 않는다”고 광고했던 그 그릇이었다. “그땐 솔직해지는 게 제일이에요. 아무리 깨지지 않아도 이렇게 던지면 안 됩니다, 그랬죠. 하하.” 부엌칼을 팔기 위해 김밥을 썰다가 손을 같이 자르는 사고도 있었다. 언제나 생방송, 아찔한 홈쇼핑 시연은 계속된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유리창을 닦기 시작하자
7분 사이 1000여통의
주문전화가 걸려왔다 “줍지 말고 (밀대 걸레로) 밀기만 하세요.” 8월29일 저녁 8시 지에스홈쇼핑에 쇼핑 게스트로 나온 해피콜 사업부장 우찬제(46)씨는 이 말을 한 서른번쯤 반복했나 보다. 그래도 좀처럼 주문은 늘지 않았다. 방송 종료 20분을 앞두고 그가 걸레를 밀기 시작했다. 같이 진행하는 쇼핑 호스트가 바닥에 잉크를 뿌리면 닦고, 과자 부스러기를 던지면 또 닦으면서 숨이 넘어갈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는 페인트를 유리창에 뿌리고 불을 붙인다. “가장 닦기 어려운 탄 얼룩도 슬슬 닦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가 유리창을 닦기 시작하자 갑자기 주문도 숨가쁘게 늘었다. 시연 7분 사이에 1000여통의 주문전화가 걸려왔다.
2 ‘마셰코’ 냄비 판매 방송에 출연한 셰프 박준우씨. GS·CJ 홈쇼핑 제공
3 미용전문 쇼호스트 권미란씨가 헤어제품을 써보이고 있다. GS·CJ 홈쇼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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