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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달그림자 아래서 꿈을 읽는 집

등록 2013-09-11 19:43수정 2014-07-04 10:39

고혜경 신화와 꿈 아카데미 원장의 집 서재. 책상 위엔 김부타스의 책 <여신의 언어>가 펼쳐져 있다. 노트북 옆에 놓인 것은 김부타스의 목걸이.
고혜경 신화와 꿈 아카데미 원장의 집 서재. 책상 위엔 김부타스의 책 <여신의 언어>가 펼쳐져 있다. 노트북 옆에 놓인 것은 김부타스의 목걸이.
[esc] 살고 싶은 집 꿈분석가 고혜경씨의 부암동 빌라
▷ [화보] 서울 한복판 깊은 산속의 ‘꿈을 읽는 집’

신화학자이자 꿈분석가인 고혜경(51) ‘신화와 꿈 아카데미’ 원장이 이 집으로 이사를 온 뒤, 딸을 찾아 서울에 온 아버지는 길게 탄식했다.

“흡사 유배지 같구나. 서울 시내라더니 이런 데 집을 구하다니….”

종로구 부암동이지만 인터넷으로 주소를 검색하면 북한산 자락 등고선 위에 화살표가 놓인다. 북악스카이웨이 곁길의 은밀한 산골짜기인데다, 군부대 옆에 자리잡고 있어선지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내비게이션이 저절로 멈춰버린다. 차를 몰아준 택시기사마저 “서울 한복판에 이런 시골이 있을 줄 몰랐다”고 할 정도니, ‘유배지’라는 아버지의 깊은 한탄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세속을 등진 수도자의 거처로 삼더라도 손색없다.

집 앞 골목길.
집 앞 골목길.

아버지 눈에는 딸이 그저 가엾게만 보일지 몰라도, 이 집을 찾은 방문객들은 대체로 현관에서부터 탄성을 내지른다. 맞은편 마루 통창으로 북한산 숲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시사철 모습을 달리하는 앞마당이자, ‘자연 액자’인 셈이다. 빌라 2층 25평의 소담한 집이지만 좁아 보이지 않는다. 방이라곤 서재, 침실, 드레스룸뿐인데 방문이 따로 없고, 바깥으로 시야가 탁 트여 자연을 실내로 끌어오는 효과가 있다. 고 원장이 여기로 이사를 온 건 2006년 가을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서울이 너무 심하게 개발돼 있더군요. 하지만 이곳은 고요한데다 자연과 가까워서 좋았달까? 차 소리가 들리지 않고, 풍광이 아름다운 건 물론이고요.”

전 주인은 까다롭게 매수인을 골랐다
이웃과 잘 지낼 만한지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살 수 있을지
깐깐한 면접을 통과해 둥지를 틀었다

전 주인이던 할머니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출신이었다고 한다. 아끼던 집이라선지 남에게 넘겨줄 때도 까다로운 면접을 거쳤다. 이웃과 잘 지낼 만한지, 집을 훼손하지 않고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유지할 수 있을지 봐서 깐깐하게 매수인을 골라냈다는 것이다. 그 관문을 무사통과한 고 원장은 “정말로 집은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부암동이라 거리로는 시내에서 멀지 않다. 하지만 눈만 오면 큰일이다. 도로로 나가는 가파른 언덕 때문에 자동차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고, 계단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걸어 오르내리는 것도 아이젠이 없으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편함쯤이야 견디는 쪽을 택했다. “밖에서 아무리 지쳐 있다가도 집에만 오면 에너지가 살아나고, 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싱글들의 흔한 반려동물인 고양이나 강아지 한마리 들이지 않았다. 공부하고 명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홀로 온전하게 누리고 사는 것이다. 산과 마주보는 서재는 선방을 닮았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붙박이 책장에는 신화, 상징, 꿈 분석에 대한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세계적 고고학자이며 여신문명을 발굴한 마리야 김부타스의 사진이 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의 사진과 함께 놓여 있다. 세계꿈연구협회 초대회장이자 고 원장의 스승인 제러미 테일러 박사의 사진은 책상 옆에 자리잡았다. 이 세 사람은 그에게 지적 세례를 준 장본인들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빌라 겉모습.
2층으로 올라가는 빌라 겉모습.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김부타스의 역작 <여신의 언어>(랭귀지 오브 가디스)를 번역하는 데 쓴다. 서재 창밖으로는 검푸른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우람한 호두나무가 보인다. 매년 청설모가 독식하는 탓에 사람이 얻는 수확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뿌리깊은 나무는 외롭고 고단한 작업을 위로하는 공이 크다.

국내에서 고생물학 석사학위를 받고 환경단체에서 일하던 고 원장은 1995년 미국에서 우주론을 비롯한 현대 과학과 명상·요가 같은 세계 전통의 지혜와 영성을 탐구하는 ‘창조영성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쳤고, 이어 신화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상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풀어놓은 김부타스에 대해 깊게 공부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김부타스는 인류 초창기에 신은 여신이었고 남신 등장은 인류 역사상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고 주장하죠.” 고 원장은 말했다.

별다른 가구 없이 조촐하게 꾸민 서재.
별다른 가구 없이 조촐하게 꾸민 서재.

거실엔 김부타스가 높이 샀던 고대의 여신상이 곳곳에 놓여 있다. 기원전 3만년께 만들어 가장 초기의 여신상 중 하나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모형이 10㎝가량의 실물 크기로 서 있고, 옆에는 기원전 3500년께 제작된 몰타의 ‘잠자는 여신’(슬리핑 레이디) 모형이 있다. 제주 설문대할망 신화 논문을 준비하면서 ‘할망이 길게 잠을 잤다’는 구절로 고민하던 때 우연히 몰타에 갔던 친구가 보내준 것이다.

여신들 위에 걸려 있는 큰 그림은 고 박봉수 화백의 ‘월영’, 즉 달그림자다. 박 화백의 작품은 고 원장이 2006년 펴낸 책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한겨레출판)를 쓸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됐다. 영적 상징이 가득한 그의 그림을 책에 쓰고 싶어 두루 알아본 결과 저작권자와 어렵게 인연이 닿았고 1년 강의료를 털어 작품을 구입하는 한편, <생명>이란 작품을 책표지로도 삼았다.

몰타의 ‘잠자는 여신’ 모형.
몰타의 ‘잠자는 여신’ 모형.

꿈 분석으로 내면의 자아를 만나는 일을 하고, 잠과 꿈을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에 고 원장에게 침실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침대 옆에는 매일 꿈을 기록하는 ‘꿈 노트’가 놓여 있고, 머리맡엔 미국 나바호 인디언 부족 창조여신을 그린 작품이 걸려 있다. “인디언 치유사의 아들이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란다. 침대 발치엔 인도의 칼리 여신 초상 액자가 놓여 있고, 침실 한쪽 느티나무 경기 반닫이 위엔 그리스 아프로디테의 모형이 놓여 있다. 고 원장은 “인간이 일생 동안 단일 행동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잠자는 행위이며, 여신들이 잠을 자는 것은 창조행위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자신도 “여신처럼 창조적인 잠을 자길 원했다”는 것이다.

거실에서 자세를 취한 고 원장.
거실에서 자세를 취한 고 원장.

사실 그는 몇년 전 큰 고통에 맞닥뜨렸다. 오랜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를 잃은 것이다. 김부타스의 동료이자 스웨덴의 고고학·신화학자로서 한반도 고대 문명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크리스티나 베리그렌(<한겨레> 2005년 9월6일치 21면 참고)은 고 원장의 책 서문을 써주기로 약속해놓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마친 뒤 유족들은 베리그렌이 지니던 김부타스의 호박 목걸이를 건넸다. 북유럽에서 호박은 치유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전 베리그렌이 그렇게나 비판하던 인류의 개발과 욕심에서 조금은 벗어난 고요한 집에서 그는 충분한 애도의 기간을 가졌다.

“이 집은 저에게 일상의 모든 활동이 태초에 여신들이 하던 행위였고, 그래서 순간순간이 신성하다는 걸 기억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 같아요.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라는 존재, 자연,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손님들에게 접대할 커피를 내리고, 감자를 구우면서 나지막이 그가 말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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