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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고 소중한 장소, 처박아 놓기는 아까워

등록 2014-01-08 19:50수정 2014-07-04 10:42

경기도 가평에 짓고 있는 ‘존경과 행복의 집’ 화장실. 정원을 향한 큰 창이 있는 전실과 세면대와 욕조가 있는 두번째 공간, 가장 안쪽에 변기와 샤워실로 구성해 화장실 공간의 휴식 기능을 극대화했다.
경기도 가평에 짓고 있는 ‘존경과 행복의 집’ 화장실. 정원을 향한 큰 창이 있는 전실과 세면대와 욕조가 있는 두번째 공간, 가장 안쪽에 변기와 샤워실로 구성해 화장실 공간의 휴식 기능을 극대화했다.
[매거진 esc] 살고 싶은 집
건축가 임형남이 제안하는, 창문으로 정원이 보이는 휴식같은 화장실
화장실 귀신은 머리가 긴 여인이란다. 그 여인의 취미이자 낙은 오로지 자신의 머리카락 수를 세는 일. 하루종일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집어 하나, 둘, 셋… 하면서 세는데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올 때 기척을 하지 않고 들어오면, 놀라서 그동안 세었던 머리카락 수를 잊어버리게 되어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인기척을 하고 들어가야만 한다고 어른들이 우리에게 싱글거리며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 우리에게 화장실이란 정말 무서운 곳이고 냄새 나는 기피의 장소였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은 집에서 제일 후미진 곳에 만들어놓거나,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이런저런 공간을 배치해놓고 마지막에 어딘가에 처박아 넣는다. 화장실은 늘 컴컴하고 답답하다. 보이는 것은 그냥 화장실 벽뿐이다. 그래서 화장실은 본의 아니게 아주 ‘실존적인 공간’이 된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는 벽을 보며 적막한 상념에 빠지고 자신을 뒤돌아본다.

경기도 가평에 짓고 있는 ‘존경과 행복의 집’ 화장실. 정원을 향한 큰 창이 있는 전실과 세면대와 욕조가 있는 두번째 공간, 가장 안쪽에 변기와 샤워실로 구성해 화장실 공간의 휴식 기능을 극대화했다.
경기도 가평에 짓고 있는 ‘존경과 행복의 집’ 화장실. 정원을 향한 큰 창이 있는 전실과 세면대와 욕조가 있는 두번째 공간, 가장 안쪽에 변기와 샤워실로 구성해 화장실 공간의 휴식 기능을 극대화했다.

10여년 전 경복궁 옆 통의동에 오래된 이층 양옥집을 고쳐서 사무실과 집으로 썼던 적이 있다. 일층은 사무실이었고 이층은 집이었다. 무척 오래된 집이라 화장실은 일층에만 있었고, 살림집으로 쓰려고 한 이층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이층에 있는 방 하나를 화장실로 만들어야만 했다. 고민 끝에 인왕산이 제일 잘 보이는 방을 화장실로 고치기로 했다.

그 방에는 커다란 창이 하나 있었고 바로 옆과 아래로는 오래된 동네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검고 뿌연 기와를 머리에 얹은 한옥들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고, 멀리는 인왕산이 하늘을 반은 가리고 있었다. 한옥이 보이는 정면에는 세면대를 놓고 세면대 옆으로는 90도 각도로 변기를 놓았다. 변기의 위치는 인왕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서울 통의동 이층 양옥집 화장실과 인왕산이 보이는 전경.
서울 통의동 이층 양옥집 화장실과 인왕산이 보이는 전경.

그 화장실에 앉는 시간은 내가 벽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적막과 참회의 시간이 아니라 멀리 있는 아주 잘생긴 인왕산과 마주 대하는 시간이었다. 봄이 되면 산에 연두색이 끼얹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교향곡이 시작된다. 연두색이 점점 진해지다가 초록이 무르녹아 주룩주룩 흐르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들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리고 가을이 지나며 그 색들이 모두 타버리고 나면 하얀색 눈이 덮으며 장엄한 교향곡이 끝난다. 나는 화장실에 앉아서 그 교향곡 전곡을 다 들을 수 있었고, 그런 감동이 내 집, 그것도 화장실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다시 나의 집을 짓는다면 꼭 그런 화장실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건 아직도 요원한 바람일 뿐이고, 대신 내가 설계하는 집에 그런 화장실을 끼워 넣으며 대리만족을 하곤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우선 물을 많이 쓰는 욕조 외의 부분에는 건식으로 마루를 깔기도 하고, 세면대와 욕조, 변기 등을 모두 칸막이로 분리하고 세탁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여럿이 동시에 사용 가능하면서 기능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화장실에 앉는 시간은
벽을 보는 적막의 시간이 아니라
잘생긴 인왕산과
마주 보는 시간이었다

서울 통의동 이층 양옥집 화장실과 인왕산이 보이는 전경.
서울 통의동 이층 양옥집 화장실과 인왕산이 보이는 전경.

혹은 욕조 옆으로 창을 달고 숲을 붙여서 언제나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하기도 하고, 혹은 화장실을 돌출시켜 외부와 접하는 면을 넓히기도 한다. 경기도 양평 문호리에 지은 집의 화장실이 그런 예다. 그 집을 의뢰한 분은 견고한 성과 같은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나는 요구대로 충실하게 그것을 현대적인 재료와 현대적인 형식으로 설계했다. 형태는 모서리가 둥글게 궁굴려진 형태였고 높은 언덕에서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게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 특히 건물의 북쪽 면에 툭 튀어나온, 혹처럼 돌출된 공간에 화장실과 다락방을 만들었다. 마치 성에 돌출되어 있던 망루처럼 화장실의 모습이 만들어졌는데, 당연히 그 자리의 전망이 무척 좋았다. 그리고 돌출되어 있어 삼면의 창을 만들 수 있었다.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전망이 좋은 곳을 거실과 식당과 안방에 내주고도, 뒤편에 공간을 돌출시켜 화장실을 배치하고 좋은 전망과 적당한 차폐가 되도록 했다.

경기도 양평 문호리 주택. 오른쪽 돌출부 1, 2층이 화장실이다.
경기도 양평 문호리 주택. 오른쪽 돌출부 1, 2층이 화장실이다.

물론 모든 화장실이 좋은 전망을 갖출 수 없고 넓고 커다란 창을 달 수는 없다. 아무리 넓은 집을 짓더라도 대부분 전망이 좋은 곳은 침실이나 거실을 두고 싶어하기 때문에, 땅이 무척 길어서 집을 일자로 길게 짓기 전에는 그런 좋은 조건을 모든 방들이 공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건축주와 집에 대해 상의하고 설계를 시작할 때 창문이 크고 정원이 딸린 화장실을 권한다. 물론 그 위치가 남향이나 집의 전면에 놓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비록 위치가 조금 후미진 곳이라도 적당한 가벽으로 막아주고 그 앞에 작고 예쁜 정원을 배치해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또 집이 그리 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쾌적하고 특별한 화장실을 만들 수 있다. 지금 가평에 짓고 있는 집은 이름이 ‘존경과 행복의 집’인데, 이 특이한 이름은 집주인인 젊은 부부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평생의 키워드인 ‘존경’과 ‘행복’, 두 단어로 만든 것이다. 오랜 시간 이야기하고 갈고 다듬어, 특이한 이름만큼 집도 재미있고 특이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늘 그렇듯이 마지막 단계에서 산고를 겪으며 마무리 중이다.

‘존경과 행복의 집’ 평면도.
‘존경과 행복의 집’ 평면도.

이 집은 크지 않은 두 개의 건물로 되어 있다. 한 채는 20평 규모의 사무실 겸 도서관이고 한 채는 15평 규모의 주택이다. 사무실은 높고 단순한 구성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주택은 아늑하고 오밀조밀한 구성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주택의 전망이 좋은 남쪽은 침실과 거실을 겸하는 식당에 내주고, 화장실은 북쪽에 두었다. 하지만 집 뒤에 만들어놓은 작은 정원과 면하게 만들어져 있고, 내부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공간은 접이식 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전실인데 거실보다 단이 높아 좌식으로 앉을 수 있으며, 정원을 향한 큰 창이 있다. 전실에서 한 단을 다시 내려가 낮게 구성되어 있는 화장실의 두번째 공간에는 세면대와 욕조가 있다. 세면대는 화장대를 겸하며, 욕조에 앉으면 전실의 벽에 걸린 티브이를 볼 수도 있고 벽에 열려 있는 창을 내다볼 수도 있다. 세번째 공간, 가장 안쪽에 있는 공간은 변기와 샤워실로 구성되어 있어 변기에 혹 오래 앉아 있거나 샤워를 할 때도 역시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가장 편안하고 긴장을 풀고 있어야 할 화장실 공간의 휴식 기능을 극대화한 집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전망 이외에도 화장실에 책을 꽂아놓거나 좋은 그림을 걸어놓거나 그윽한 향이 나는 꽃을 가져다놓는 집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고독하고 소중한 장소, 머리카락 세는 신경질적인 여인이 아니라 지식과 휴식을 주는 여신과 만날 법한 화장실에 앉고 싶다.

임형남 가온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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