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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는 기억의 리모델링이다

등록 2014-01-22 19:49수정 2014-07-04 10:43

1 한귀은 교수와 어머니 박경순씨. 햇볕이 잘 들고 바깥이 시원하게 보이도록 창을 크게 냈다.
1 한귀은 교수와 어머니 박경순씨. 햇볕이 잘 들고 바깥이 시원하게 보이도록 창을 크게 냈다.
[매거진 esc] 살고 싶은 집
시행착오 겪으며 텃밭 넓은 집을 지은 육십대 엄마와 사십대 딸의 건축학개론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답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그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집짓기가 그랬다. 엄마와 딸은 집짓기를 시작했고, 이것이 삶의 답이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예순을 넘겼고 딸은 마흔이 넘었다. 집짓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모녀가 집을 짓는 모습은 어떨까?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래도 둘은 재밌다. 마치 ‘덤 앤 더머’ 같다. 집짓기는 기억의 리모델링이었다. 딸은 집짓기와 기억 리모델링의 과정을 책으로도 썼다. 제목도 <엄마와 집짓기>(한빛비즈)다.
2 토목공사를 지켜보는 어머니.
2 토목공사를 지켜보는 어머니.

시작은 이랬다. 딸의 삶이 고달팠던 게 먼저였다. 상처 입은 새끼처럼 딸은 엄마를 불렀다. 늙어 가는 엄마는 중년인 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먼저 땅을 샀다. 하루 만에, 모녀가 동시에 마음이 가는 땅을 샀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땅에는 개울이 있고 매실나무가 가득했다. 처음 봤지만 묘하게 낯설지 않은, 일종의 데자뷔를 느끼게 하는 땅이었다.

실내는 25평에 거실 하나, 거실과 이어진 부엌 하나, 엄마 방, 아버지 방, 화장실, 그리고 나중에 증축한 창고와 다용도실이 전부로, 모두 합해봤자 30평 남짓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당신이 소설 <토지>에서의 최치수 같다고 한다. 엄마가 바라보고 둘러보는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 땅은 엄마에게는 무척 넓으면서도 지나치지 않은 최적의 넓이인 셈이다. 딸은 엄마의 땅은 대지가 아니라 텃밭이라고 하며 지청구를 한다. 실제 집의 크기보다 엄마의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딸은 안다. 집도 그렇게 지어졌다.
3 창밖으로 싹이 올라오는 밭이 보이도록 집터는 높아졌고 밭이 될 땅은 넓어졌다.
3 창밖으로 싹이 올라오는 밭이 보이도록 집터는 높아졌고 밭이 될 땅은 넓어졌다.

집짓기를 계획할 때 예산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자신과 그 집의 공명 여부이다. 내가 그 집 안에 있을 때 얼마나 편안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상상이 집짓기의 전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설계의 기준은 엄마의 시선, 엄마의 동선, 엄마의 삶이었다. 평면도면을 그리면서 집 안에서 움직이는 엄마의 발걸음을 가장 많이 떠올렸다. 두개의 화장실 중 하나는 엄마의 방에 연결된 것으로 하고 싶었으나 엄마는 아버지 방으로 연결하게 했다. 엄마는 괜찮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사생활을 보호해줌으로써 당신 스스로 보호받으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났다. 처음엔 방을 하나 더 두려 했지만 작은방이 나올 정도의 면적조차 모두 거실에 편입시키기를 원하셨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희들이 오면 잘 공간이 충분해야지.”

엄마는 밭을 많이 내고 싶어하셨다. 엄마는 창밖으로 파릇파릇 싹이 올라오는 밭이 보이길 원하셨다. 그래서 집이 지어질 터는 좀더 높아졌고 밭이 될 땅은 평평하게 넓어졌다. 엄마의 시선이 토목공사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다만 엄마는 군데군데 수도시설을 원하셨다. 밭에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물을 주고 나서 발을 말갛게 씻고 당신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셨던 것이다. 엄마만의 차별화된 집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이뤄졌다.
4 튼튼한 벽돌집. 줄눈은 카키색으로 넣어 튀지 않도록 했다. 지붕은 오지기와다.
4 튼튼한 벽돌집. 줄눈은 카키색으로 넣어 튀지 않도록 했다. 지붕은 오지기와다.

일반적으로, 처음 집을 지으면 자재들을 비싼 것을 고르게 돼서 난감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엄마와 딸에겐 별로 그런 일이 없었다. 일종의 관성 같은 것이다. 비싼 것을 욕망하지 않는 것은 너무 오래된 습관이었던 것이다. 소박하고 비싸지 않은 것들 중에서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집 안에 사치품들을 모시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풍수적으로도 그렇다고들 한다. 자신의 형편을 초과하는 사치품을 지니고 있으면 ‘때’의 운기가 비켜갈 수 있단다.

엄마는 밭을 많이 내고 싶어하셨다
창밖으로 싹이 나는 밭이
보이길 원했다
집이 지어질 터는 좀더 높아졌고
밭이 될 땅은 평평하게 넓어졌다
엄마의 시선이 토목공사의 중심이었다

“집은 벽돌로 튼튼히 지어야지. 무조건 벽돌이다. 벽돌이 튼튼하다.” 엄마가 그러시는 이유를 딸은 모를 수 없다. 엄마의 불안이 벽돌을 찾은 것이다. 집이 지어지면서 과거의 슬픔과 미래의 불안이 섞였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더 짙게 했다. 아니 차라리 절박하게 했다. 엄마의 집짓기는 절박했고, 절박한 만큼 오히려 점점 소박해지고 있었다.

엄마는 그 집이 주위의 자연과 화해롭게 공존하기를 바라셨다. 집의 벽돌이 흙빛이 되었던 것도, 지붕의 색마저 비슷해졌던 것도, 모두 가장 자연스럽고 튀지 않기 위해서였다. 벽돌은 골드베이지색, 줄눈은 연한 황금빛이 도는 카키색으로 골랐다. 벽돌색과 묘하게 어울렸다. 벽돌 사이의 줄눈이 뭐 대수냐 하겠지만 그것이 집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꿀 수도 있다. 만약 줄눈이 하얀색이었다면 정말 뜬금없이 보였을 것이다. 반대로 검은색이었다면 무척 어둡고 무거운 집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붕 또한 붉은색이 도는 오지기와로 했다. 일종의 찰흙기와인데 무엇보다 번들거리지 않고 그저 흙 느낌이 나서 좋았다. 외벽은 콘크리트에 벽돌이지만 내부는 여리고 부드러운 나무와 한지를 썼다. 거실 벽은 나무로 감쌌고, 방의 벽은 한지 벽지를 둘렀다. 바닥은 거실, 부엌, 방 할 것 없이 모두 한지 장판이다. 새집증후군 같은 것이 없다. 방문객들은 거실에서 나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시각적 냄새도 한몫할 것이다. 누구나 공감각적 능력이 있어서 나무를 보면 나무 냄새가 나는 것이다. 시각의 후각화다. 방의 한지 벽지도 마찬가지다. 마른 꽃잎이 하나씩 붙어 있는 한지 벽지를 발랐는데, 그 압착화에서 소슬한 냄새가 났다. 벽지와 장판을 고르면서 엄마는 비염 증세가 있는 손자를 염두에 두었고, 딸은 그곳에서 주무시고 창밖을 바라보실 부모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5 집 내부는 나무로 꾸몄고 거실과 부엌을 이었다.
5 집 내부는 나무로 꾸몄고 거실과 부엌을 이었다.

집을 짓는 일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눅눅한 과거를 털고 산뜻하고 청량하게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 우리는 새집을 꿈꾼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과거의 삶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는 메타포로 그 집의 재료가 되어 하나씩 재구성된다.

결국 이렇게 좋은 집에 살게 되셨지만,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엄마는 종종 죽음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딸은 짐짓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다. “엄마, 엄마 죽으면 엄마 집 정원에 묻어 드릴게.” 엄마, 웃으신다. “좋잖아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에 묻히는 것보다 엄마, 아버지가 직접 가꾼 집 앞마당에 묻히는 거.” “에구, 니 아버지하고 묻히기 싫다.” 엄마는 단번에 거절하신다. “걱정 마. 엄마랑 아버지랑 가장 먼 거리 잡아서 대각선으로 묻어 드릴게.” 엄마의 집짓기는 많은 이야기와, 상처와, 비밀과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랭보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랑만 그럴까. 삶도 그렇다. 삶을 발명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바로 집짓기다. 새집에서도 여전히 부모님은 다투신다. 하지만 지금의 딸은 아이일 때처럼 울지 않고 무심한 판관이 되어 따뜻한 거실에 앉아 미소 짓고 있다.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행복 한 채를 지었다.

한귀은 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엄마와 집짓기> 지은이

사진 RICK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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