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이용원 1927년 문을 연 뒤 건물조차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해 왔다. 지금 이발관을 운영하는 이남열씨는 1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발 기술을 전수받았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서울시 선정 미래유산
지금도 3, 4년이면 동네 풍경이 확확 변하는 서울 거리에 반세기 넘는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 가게들이 있다.
서울시는 옅어져가는 시민들의 기억을 모아모아 아주 오래된 서울을 증언하는 307곳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변치 않는 모습, 변치 않는 인심
종로양복점 한쪽 벽을 두른 커다란 수납장은 이 양복점의 역사 전시관 같은 곳이다. 일본 쇼와 시대의 날짜가 적힌 영수증은 1916년 종로양복점을 처음 연 이두용씨가, 손님들이 옷을 맡길 때마다 써서 주던 것이다. 그 옆에는 손님 몸에 맞추다 한껏 늘어난 줄자들이 잔뜩 똬리를 틀고 있다. 서울 장안 멋쟁이들 옷에 빳빳하게 날을 세웠을 손바닥만한 다리미는 시커멓게 변해서 웅크리고 있다.
1927년 문 연 만리동고개 이발소
130년 된 독일제 면도칼
서슬이 여전히 퍼렇다 종로양복점 백년 흔적을 찾아온 방문객을 위해 주인 이경주(68)씨가 서랍에서 재단 가위를 꺼내 보여준다. 일본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온 할아버지, 전쟁 속에서 재봉틀을 돌렸던 아버지 이해주씨에 이어 이경주씨가 양복점과 함께 재단 가위를 물려받았다. 아이 팔뚝만했던 일제 가윗날은 3대를 물리면서 닳고 닳아 원래 길이보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줄었단다. 아버지는 이 가위를 들고 통 넓고 어깨 높은 신사 양복을 만들었는데 아들은 이제 가늘고 긴 유행의 남자 슈트를 만든다.
서울시는 시민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울의 오래된 것들 307가지를 모아 미래 유산으로 선정했다. 대를 물려가며 한자리를 지켜온 작은 가게들도 근현대 문물을 담은 미래 유산이 됐다. 서울 만리동 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 성우이용원도 3대째 하는 이발소다.
1927년 외할아버지 서재덕씨가 처음 시작한 이발소를 아버지 이성순씨에 이어 아들 이남열(65)씨가 지킨다. 지은 지 100년도 넘은 낡은 1층집에선 손님이 샤워기 대신 머리에 물조리개를 뿌려가며 머리를 감는다. 이발사는 전기면도기 대신 날을 세운 면도칼로 머리를 깎는다. 이남열씨는 매일 아침 면도날과 가위를 꺼내 직접 날을 세운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침에 지나가는 여자가 있어도 날이 안 서. 자칫 딴생각을 하거나 기가 빠져도 날이 망가져.” 130년 된 독일제 면도칼, 50년 된 일제 가위들은 아직도 서슬 퍼렇게 손님 목덜미를 오간다.
“쇠로 만든 도구가 왜 닳나. 쓰는 사람 마음이 먼저 닳겠지.”
이남열씨는 가위와 칼을 쓸 줄 모르는 요즘 미용사들을 한탄한다. 날을 바짝 세운 칼로 손님 얼굴을 문지르자 칠순 넘은 손님의 얼굴이 뽀얗게 변했다. 문짝도 잘 닫히지 않는 성우이용원엔 온종일 손님이 들고 나갔다.
사소하고 소박하지만 3대가 해온 가게 안쪽은 깊고도 넓었다. 대를 물려 해오다 보니 세월만큼 이야기도 쌓였다. 서울 돈암동 시장 입구에 있는 태조감자국은 1958년 할아버지 이두환씨가 연 가게를 아들 이규회씨와 며느리 박이순씨가 하다가 지금은 손자 이호광(42)씨가 물려받은 것이다.
벽엔 수십년 써온 글이 빼곡하다. 감잣국 끓이다가 만든 감잣국 노래, “어려울 때일수록 잡숫고 힘을 내주십시고” “인정, 순정, 감자국 정” 등 시와 격언이 가득한 벽이다. “글자대로 살라”는 할아버지의 말과 “남에게 손해주지 말아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쓰인 가게에서 3대째 사장은 아침 일찍 사골국을 우려내고 밤늦게 배추 절이기를 똑같이 한다. “고치지 못하는 게 또 있어요. 밥값을 올리지 말라던 어른들 당부가 워낙 엄했기에 지금도 쉽게 값을 못 올려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밥인심이 후하셔서 저희도 고봉밥을 담아요. 다 전쟁 기억 때문이지요.”
오래된 가게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을 이고 지고 산다.
전쟁 직후 문 연 서촌 중고서점
책 판매 줄면서
오래된 책 구경하는 북카페로 변신 쇠락에 맞서 살아남는 법 종로양복점은 이제 종로에 있지 않다. 보신각 뒤편에서 종로2가 피맛골로, 그리고 2010년부터는 신문로 한 오피스텔 건물로 왔다. 맞춤양복점이 집값 따라 유행 따라 밀려나면서 이제는 고급 옷의 흥취를 기억하는 손님들만이 재단사의 손맛을 찾아 그곳으로 간다. 서울 남영동 숙대입구 전철역에 있는 남영기원은 생긴 지 50년이 넘은 건물 3층에 있다. 밤늦도록 기원에서 바둑돌을 놓는 손님들은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었다. 기원 벽에 붙어 있는 1980년대 가격표엔 입장료가 5000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은 4000원이다. 기원이 흥하던 시절 주인이 전화번호까지 통째로 샀다는 ‘백색전화기’만 장밋빛 시절의 추억처럼 남아 있는 이곳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곳이다. 주인은 “많은 기원들이 도박 장소로 변하는 상황에서 기원만으론 운영이 어렵다. 앞날이 없다. 누군가에게 기원을 물려줄 수도 없다”고 했다.
오래된 가게는 쇠락에 맞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서촌에 있는 대오서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중고서점으로 꼽히는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조대식씨가 호구지책으로 열었던 헌책방이다. ㅁ자 한옥의 앞부분을 터서 서점으로 만들고 뒤쪽 방에는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책을 구해 오고 부인 권오남(84)씨는 책을 팔았다. 책이 귀해서 물려보고 나눠보던 시절이 대오서점의 전성기였다.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놓고 몰래 책을 훔쳐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옛날 참고서나 흔한 소설책을 그대로 안고 대오서점은 나이를 먹었다. 서촌의 명소가 됐지만 막상 책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고민 끝에 다섯째 딸 조정원(52)씨가 가게를 이어받아 북카페로 고쳤다.
“어릴 땐 싫었는데 꺼내놓고 보니 정겨웠어요. 책이며 옛 물건이며 가게를 팔았더라면 다 없앴겠죠.” 북카페로 고치면서 옛날 책방이었던 곳과 살림방이었던 곳에 오래된 테이블들이 놓였다.
손님들은 70년 된 오동나무 장과 재봉틀에 기대고 앉아 차를 마시고 옛날 책을 본다. 어쨌든 간에 “죽을 때까지 이곳을 지킬 작정”이라던 권오남씨는 행복하다.
2011년에는 서울 명동성당 뒤편 ‘삼일로 창고극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1975년 실험연출가 방태수씨가 ‘에저또 창고극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극장이다. 정신과 의사 유석진씨, 배우 추송웅씨 등 극장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지만 시시때때로 경영난에 부닥쳐 김치공장이나 인쇄공장이 되기도 하다가 한 기업의 후원으로 다시 열었다. 중학생 때부터 관객으로 이 극장을 드나들었다는 정대경(55) 대표는 “이곳은 공공재다. 삼일로 창고극장의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를 서울시와 시민들이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오래된 가게는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미래 유산 선정을 추진한 서울시 문화정책과 쪽은 “미래 유산은 명예의 전당 같은 것이라 실질적인 지원은 없다. 다만 오래된 가게에 담긴 스토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주목하도록 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시민과 서울연구원이 제안한 1000개 후보지를 사실조사해 미래 유산 307곳을 뽑았다. 서울 미래 유산을 소개하는 공식 홈페이지는 2월 중순 열릴 예정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서울시 문화정책과 제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130년 된 독일제 면도칼
서슬이 여전히 퍼렇다 종로양복점 백년 흔적을 찾아온 방문객을 위해 주인 이경주(68)씨가 서랍에서 재단 가위를 꺼내 보여준다. 일본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온 할아버지, 전쟁 속에서 재봉틀을 돌렸던 아버지 이해주씨에 이어 이경주씨가 양복점과 함께 재단 가위를 물려받았다. 아이 팔뚝만했던 일제 가윗날은 3대를 물리면서 닳고 닳아 원래 길이보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줄었단다. 아버지는 이 가위를 들고 통 넓고 어깨 높은 신사 양복을 만들었는데 아들은 이제 가늘고 긴 유행의 남자 슈트를 만든다.
대오서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고서점인 대오서점은 2013년 12월부터 대오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처음 문을 열었다.
태조감자국 서울 돈암동 시장 입구에서 1958년부터 지금까지 삼대를 이어 감잣국 국물을 낸다. 메뉴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사골 국물은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용마 방앗간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용마 방앗간은 54년 동안 방아기계를 돌려왔다. 주변 방앗간들이 떠난 뒤에도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책 판매 줄면서
오래된 책 구경하는 북카페로 변신 쇠락에 맞서 살아남는 법 종로양복점은 이제 종로에 있지 않다. 보신각 뒤편에서 종로2가 피맛골로, 그리고 2010년부터는 신문로 한 오피스텔 건물로 왔다. 맞춤양복점이 집값 따라 유행 따라 밀려나면서 이제는 고급 옷의 흥취를 기억하는 손님들만이 재단사의 손맛을 찾아 그곳으로 간다. 서울 남영동 숙대입구 전철역에 있는 남영기원은 생긴 지 50년이 넘은 건물 3층에 있다. 밤늦도록 기원에서 바둑돌을 놓는 손님들은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었다. 기원 벽에 붙어 있는 1980년대 가격표엔 입장료가 5000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은 4000원이다. 기원이 흥하던 시절 주인이 전화번호까지 통째로 샀다는 ‘백색전화기’만 장밋빛 시절의 추억처럼 남아 있는 이곳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곳이다. 주인은 “많은 기원들이 도박 장소로 변하는 상황에서 기원만으론 운영이 어렵다. 앞날이 없다. 누군가에게 기원을 물려줄 수도 없다”고 했다.
김봉수 작명소 1958년 김봉수씨가 시작한 이 작명소는 2002년부터 아들 김성윤씨가 운영하고 있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이곳은 전화도 받지 않고 물어서 찾아가야 한다.
종로양복점 1916년 보신각 뒤편에 처음 문을 연 이 양복점은 할아버지에서 아들, 손주로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이다.
남영기원 1956년쯤 생긴 이 기원은 여러 차례 팔리고 주인이 바뀌었다. 1978년 남영기원을 인수한 사장은 어릴 때부터 이 기원을 보고 자란 용산 토박이다.
수정여관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당산동 남선여인숙 등이 차례로 닫으면서 1966년 문을 연 문래동 수정여관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남았다.
창고극장 1975년 가정집을 고쳐 극장으로 만들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연극인들의 사랑방 같았던 이 소극장은 여러번 문을 닫고 열다가 2011년부터 다시 운영되고 있다.
신석탕 1962년 나무와 석탄을 때가며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으로 아버지, 아들에 이어 지금은 며느리가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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