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이창연 에디터의 서울 평창동 집 거실 풍경.
[매거진 esc] 살고 싶은 집
부자동네 평창동의 거실 넓고 전망 좋은 주택 ‘틈새 전세’ 살며 공유의 삶 즐기는 이창연씨
부자동네 평창동의 거실 넓고 전망 좋은 주택 ‘틈새 전세’ 살며 공유의 삶 즐기는 이창연씨
이창연(44)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에디터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언덕 위의 집에 산다. 그는 늘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살기를 원했고, 함께 살아야 할 이웃과 동네를 중요한 조건으로 꼽았다. 이 집에 오기 전, 산을 끼고 있는 다른 동네에 살다가 재개발을 둘러싸고 배타적으로 변질되는 마을 인심에 깜짝 놀라 다른 집을 찾게 됐다. 하지만 남들이 다 살고 싶어하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주택에서 컸고, 아파트에선 엘리베이터만 타도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부동산 소개 업체에 “물레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테라스가 있는 전셋집으로 구해달라”고 부탁해 얻었다. 도자기를 직접 빚어야 했기 때문이다.
2010년께 인연이 닿은 이 집은 한쪽에서 보면 주택 1층, 다른 쪽에서 보면 반지하가 되는 50평형(약 165㎡)대 공간이다. 집주인은 위층에 사는데 입구가 따로 있어 독채나 다름없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널찍한 거실이 나온다. 거실 한쪽 벽엔 새파란 풀장 사진을 커다랗게 인쇄해 붙여놓았다.
“사람들 불러 뭘 해먹이고 놀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빈방을 지인과 심지어
외국인 손님들한테도 열어둔다
“집에 풀장이 있으면 좋잖아요?” 이 에디터가 웃으면서 말했다. 방은 모두 세개. 본인은 커다란 침대가 놓인 문간방을 쓰고, 안방엔 ‘위빙’이라는 직조기를 들여놓았다. 취미로 가끔 쓰는 베틀 같은 기계다. 안방 맞은편 작은방은 손님방인데, 비어 있을 때가 잘 없다. 지금도 ‘아는 동생’이 쓰고 있다. 집에는 수시로 객식구들이 찾아든다. “사람들을 불러 뭘 해먹이고 놀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빈방을 지인과 심지어 한국을 방문한 낯선 외국인 손님들한테도 열어둔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곧잘 이 집을 찾는다. 얼마 전, 직장을 옮기자마자 회사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와 직접 만든 바질 페스토에 파스타를 버무려 먹어가며 회의를 했을 정도다. “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와요. 지인이 아파서 몸조리하면서 몇달간 머물렀고, 서울에 일 있는 지방 사람들도 오고, 케이팝에 열광하는 외국 여성도 오고, 일본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주인 어머님도 아들이 강남에 사는데도 저희 집에 머물다 가시곤 했어요.”
손님들이 가장 감탄하는 건 거실 쪽 테라스의 정면 통창으로 보이는 전망이다. 높은 지대라서 낮에는 아랫동네가 환하게 들어오고, 밤엔 세계에서도 아름답다고 손꼽는 서울의 야경이 영롱하게 펼쳐진다. ‘부자 동네’라는 평창동에서도 잘 찾아보면 아파트보다 비싸지 않은 이런 ‘틈새 전세’가 있다. 그의 친구들도 덩달아 부근에 이사를 많이 왔다.
이 동네로 오게 된 건, 거리와 기동력 때문이다. 이 에디터는 2008년 서촌이라 일컫는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카페 고희’를 열었다. 서촌의 사랑방으로 이름이 높은 이 카페는 지금까지 그의 경험이 송두리째 들어간 곳이다. 이 에디터는 대학 졸업 직후부터 지금까지 촘촘하게 일했고, 끊임없이 뭔가 만들었다. 서울 한가운데 특1급 호텔에서 10년 동안 근무했고, 또다른 특1급 호텔을 열 때 세일즈 팀장으로 합류했다. 외국 항공사에서 1년 동안 취항 준비를 하면서 브랜드 홍보를 전문적으로 익혔다. 마케팅 홍보 회사를 만들어 운영도 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카페를 운영하고, 도자기를 배우고, 푸드 스타일링을 익히고, 직조기로 천을 짜기도 했다. 카페에서는 작가를 선정해 무료 전시회를 마련했고, 1년에 두차례 주변 상인·이웃들과 함께 벼룩시장(플리마켓)을 열었다. 집안 곳곳에 걸린 회화들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전시 작가들의 작품이다.
카페를 열고 보니 그릇이 많이 필요해 도자기를 직접 빚기 시작했는데, 회사에 다니면서 “밤 12~1시까지 먼지 풀풀 날리는 방에서 미친 듯이” 물레를 돌리며 배운 실력이 이제 내놓고 판매할 수 있을 수준까지 올랐다. 부엌 겸 식당 한편에는 그의 ‘도예 인생’을 증명하듯 직접 빚은 도자기 그릇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릇장은 직접 주문제작한 원목가구다. 목공설치미술가 변석호 작가의 작품으로, 나무판과 지지대의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우아하다. 거실 통창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책상도, 박스와 지지대를 옮겨가며 구조와 용도를 바꿀 수 있는 책장도, 침실에 놓인 독특한 침대도, 8명 정도가 너끈히 앉아 밥 먹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도 모두 변 작가의 작품으로 무게감 있으면서도 기품있는 모양새를 뽐낸다. 식탁 옆에서 크고 작은 도자기 그릇을 안고 서 있는 앤티크장은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이다. “회사를 관둘 때 퇴직 기념으로 나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릇에는 담을 음식이 있어야 하는 법. 역시 주문 제작해 만든 테라스용 화단에는 허브나 고추 등 각종 채소를 심어 키웠다. 급기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친한 언니의 집 앞마당에 밭을 얻어 농사를 지으러 다니기도 했다. 유기농 채소들은 물만 뿌리면 탱글탱글 살아났다. 고수, 차조기, 바질, 로즈메리, 민트, 고추…. 식물들은 풍성하게 씨를 뿌려가며 먹을거리를 제공해줬고, 손님들이 오면 채소와 허브를 거두는 그의 손이 바빠졌다.
“음식 솜씨 좋은 엄마가 어릴 때 늘 ‘뭔가 해줄 테니 친구들을 불러 모으렴’ 했어요. 또다른 롤모델인 어머니가 계시는데, 일본에서 만난 게스트하우스 주인 아주머니예요. 우리 동포이신데 세계 곳곳을 다니며 밥해서 거둬 먹였던 아들딸의 집에서 머무세요. 젊은 친구들을 만나며 그들의 문화를 업데이트한 거죠. 조선통신사 순례길 만드는 단체에 들어가 한국 왕래도 하시는데 대단하세요. 저도 훗날 밥집과 민박집을 함께 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는 친구들이 많다. 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 ‘내 것’이 아닌 ‘우리 것’을 만들고 함께 어울리는 일이 그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카페 고희가 있는 서촌에 큰 애정이 있는 것도 ‘외지인’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나간 소중한 경험 때문이다. “서촌 커뮤니티 사람들 모두 서로 개성 넘치는 직업이 있지만 서로에게 배타적이지 않고, 인정하고 존중하며 도와주려는 마음이 커서”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회사 생활 뒤 파티시에(제빵사)인 동생에게 카페를 맡긴 이 에디터는 핀란드, 독일, 뉴질랜드, 일본, 중국 여행을 다녔고 스페인 부르고스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550㎞ 순례길을 걷기도 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가정집에 머물면서 그들의 문화를 익혔다. 가족 없이 홀로 사는 그는, 홀로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산다. 가족이 없는 대신, 더 많은 가족들이 생긴 것이다.
“내 것이 단지 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족 이기주의를 싫어하는데다, 나만의 가족이 없어서 수많은 싱글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공유하는 것도 좋고요. 정서적으로 충족된 사람들은 남에게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야박하지 않아요. 그런 친구들이 제 큰 재산이죠.”
최근 그는 호텔리어로서, 피아르 전문가로서의 경력과 카페 대표로서 경험을 모두 한데 모아 할 수 있는 또다른 일을 시작했다. 28일 론칭하는 새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것이다.
“제 인생의 미터기를 다시 꺾었어요. 여태 보지 못했던 우리 인생의 새로운 뉴스들을 모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제 별자리가 쌍둥이자리인데, 풀이가 그렇대요. 여러 개의 취미가 있어야 하고, 늘 분주하고… 이걸 보세요. ‘그녀는 통역사나 광고전문가나 영업간부나 기자나 작가가 될 것이다. 인터넷이나 언론사 같은 것은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 똑같지 않나요?”
이 집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나눠 먹고 수다 떨며 행복해했듯, ‘미터기 꺾은 인생’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확신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람들 불러 뭘 해먹이고 놀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빈방을 지인과 심지어
외국인 손님들한테도 열어둔다
“집에 풀장이 있으면 좋잖아요?” 이 에디터가 웃으면서 말했다. 방은 모두 세개. 본인은 커다란 침대가 놓인 문간방을 쓰고, 안방엔 ‘위빙’이라는 직조기를 들여놓았다. 취미로 가끔 쓰는 베틀 같은 기계다. 안방 맞은편 작은방은 손님방인데, 비어 있을 때가 잘 없다. 지금도 ‘아는 동생’이 쓰고 있다. 집에는 수시로 객식구들이 찾아든다. “사람들을 불러 뭘 해먹이고 놀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빈방을 지인과 심지어 한국을 방문한 낯선 외국인 손님들한테도 열어둔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곧잘 이 집을 찾는다. 얼마 전, 직장을 옮기자마자 회사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와 직접 만든 바질 페스토에 파스타를 버무려 먹어가며 회의를 했을 정도다. “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와요. 지인이 아파서 몸조리하면서 몇달간 머물렀고, 서울에 일 있는 지방 사람들도 오고, 케이팝에 열광하는 외국 여성도 오고, 일본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주인 어머님도 아들이 강남에 사는데도 저희 집에 머물다 가시곤 했어요.”
이 에디터가 앉은 뒤쪽에 주문제작한 책장이 보인다. 책장 위엔 부모님 사진과 로봇 모형, 로모 등 필름 카메라를 놓았다.
변석호 작가가 만든 그릇장과 손수 빚은 도자기들.
식탁 또한 변 작가의 목공 작품.
집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과 평창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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