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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등록 2014-06-18 19:17수정 2014-06-19 15:16

가슴을 펴고 다리를 곧게 뻗은 포즈를 취한 모델 김지양. “내가 나를 아름답다고 여긴 순간 나는 아름다워졌다”고 그는 말한다. 서민희 제공.
가슴을 펴고 다리를 곧게 뻗은 포즈를 취한 모델 김지양. “내가 나를 아름답다고 여긴 순간 나는 아름다워졌다”고 그는 말한다. 서민희 제공.
[매거진 esc] 스타일
몸매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패션계간지 <66100> 창간한 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지양씨
검은 수영복을 입고 두 팔을 활짝 연 채 빨간 문 앞에 선 여성. 눈빛부터 입매, 포즈까지 도발적이다. 가슴골이 깊게 파인 원피스 수영복은 165㎝에 70㎏, ‘88 사이즈’인 그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델의 배를 가로지르는 위치에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다. “WHAT IS PLUS SIZE?”(무엇이 플러스 사이즈인가?) 이제 갓 창간된 ‘플러스 사이즈 패션 문화 매거진’ <66100>의 표지다.

몸에 조금만 살이 붙어도 가리고 덮고 감추기에 급급한 한국 여성들에게 모델 김지양(28)이 잡지 창간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나섰다. 우리 사회가 평균, 혹은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사이즈인 ‘여성 66’과 ‘남성 100’ 사이즈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마지노선’을 넘으면, ‘플러스 사이즈’로 취급받게 되면, 그 몸뚱어리로는 아름다움을 꿈꾸길 포기해야 하는가?

“아름다움이란 건 내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아요. 사람들은 몇 년 전 사진을 보며 ‘아, 그때 내가 예뻤구나’ 놀라곤 하죠. 동시에 ‘그런데 그땐 왜 나 자신을 예쁘다고 해주지 못했을까’라며 한탄해요. 사실은 당신의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데 왜 그걸 모를까요. 그게 바로 ‘사이즈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에요.”

날씬한 사람이 예쁜 이유?
몸에 맞는 옷을 입어서다
사이즈가 어떻든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을 예뻐해주자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 앉아 이 말을 하는 김지양씨의 붉은 입술이 얼마나 예뻤는지 어떻게 문자로 기록할 수 있을까. “저는 밀크셰이크요.” 그는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짧은 팬츠를 입고 차갑고 달콤한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그는 ‘플러스 모델’로 살아온 나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여름처럼 더웠던 5월의 마지막 금요일, 그는 막 계간지인 <66100> 1호의 인쇄 작업을 마친 참이었다.

“잡지 한 권을 만든다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기획부터 취재, 기사 작성, 편집에 인쇄까지 신경쓰느라 잠 못 이룬 날이 며칠인지….” 광고도 없이 92페이지짜리 잡지를 36개의 기사로 꽉 채웠다. 김씨가 잡지사의 대표이자 편집장이고 표지 모델이자 커버스토리 인터뷰이였으니 그 분주함을 설명해 무엇하랴. 그런데도 지난봄, 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한 뒤로 창간까지 흔들림 없이 내리 달렸다.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한 덕분이었다. “내게 너무도 필요한데 세상에 없으니까, 아무도 안 하니까.”

그는 모델이되, 모델이기 어려웠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한민국 하늘 아래 무대에 설 수 없었다. 현재 한국에서 패션쇼 무대에 서는 여성 모델들의 평균적인 허리 사이즈는 23~25인치 정도다. ‘44~88’로 표현하는 방식의 사이즈로는 ‘44, 55’ 사이즈가 일반적이다. 백화점의 20대 대상 여성 의류 매장에서 ‘77 사이즈’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있나 싶더라고요. 여러 에이전시에 프로필을 보내봤지만 어느 곳도 당락에 대한 답변조차 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모델이다. 무대 위에 선 그의 아름다움은 여러 번 확인됐다. 2010년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인 ‘풀피겨드 패션 위크’에 참가해 정식 활동을 시작한 뒤 이듬해엔 패션 브랜드 ‘아메리칸 어패럴’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온라인 투표에서 전세계 991명 중 8위에 올랐다. 2010년 회사를 그만두고 무기력하게 집 안에서만 지내던 그를 세상으로 이끈 것이 “당신이 주인공입니다”라는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의 카피였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올라갔던 2차 비키니 심사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희열을 느낀 뒤 그는 모델로 다시 태어났다.

김지양 씨가 창간한 플러스 사이즈 패션 잡지 <66100>의 표지.
김지양 씨가 창간한 플러스 사이즈 패션 잡지 <66100>의 표지.
사실 미국 플러스 사이즈 모델 사이에 서면 김씨의 몸매는 왜소한 편에 속한다. 미국 기준으로 플러스 사이즈는 보통 ‘사이즈 12’ 이상을 뜻한다. 한국 식으로는 ‘99~100’ 정도다. 1920년대 미국의 한 의류회사가 당시의 ‘마지노선’이었던 ‘사이즈 10’을 기준으로 그보다 몸집이 큰 여성들을 위한 옷을 판매한 것을 시초로 본다. 그러니 미국에서 김씨는 ‘플러스 사이즈’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플러스 사이즈용으로 만들어진 옷조차 ‘55, 66사이즈’의 모델이 입고 광고를 찍는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살아갈수록 ‘플러스 사이즈’란 것은 한 사회가 만들어놓은 편협한 틀에 불과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깟 편견 때문에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못한 채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사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가진 돈을 톡톡 털어 잡지를 만든 이유다. 잡지 목표는 세가지다. “사이즈와 상관없는 아름다움을 지향합니다. 외모지상주의, 다이어트 만능주의를 지양합니다. 사이즈를 넘어서는 당신의 무한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덕분에 잡지는 1호부터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66100>을 만들어보겠다고 작정하고 모인 필진들이 둘러앉아 “통통? 뚱뚱? 그게 도대체 뭔데?”를 주제로 좌담회를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20대 플러스 사이즈 모델 애슐리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제안하는 패션 스타일도 마음껏 내보인다.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헤일리 모리스카피에로가 자신의 뚱뚱한 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보여주고 미국 플러스 사이즈 미인대회 소식도 전한다. 플러스 사이즈라면 주목할 브랜드와 아이템들, 코디법도 소개했다.

그는 가을·겨울호를 제작할 비용인 1000만원을 모으기 위해 온라인 소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스폰서를 모집중이다. 아직 사업자 등록, 출판물 등록 등의 절차를 거치지 못해 1호는 서점에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도 잡지 창간 소식을 듣고 한 중년 여성이 온라인 쪽지를 보내왔다. 보고 울었다. 서울 신당동에서 ‘러시아 빅사이즈 옷’을 만든다는 40대 여성은 가족들이 ‘엄청난 사이즈’여서 모두 소극적으로 조용히 살았다며 김씨에게 “하고 싶은 일 꼭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이즈가 어떻든 몸에 맞는,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당당하게 살자”는 이야기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온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그래서 김씨는 더욱더 당당하게 세상에 말한다. “날씬한 사람들이 예쁜 이유는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어서”라고. “사이즈가 어떻든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을 예뻐해주며 행복해지자”고. “사람들이 가끔 제게 날씬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냐거나 그때가 더 행복하지 않았냐고 묻곤 해요. 천만에요. 저는 제 사이즈가 내 행복이나 아름다움과 반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이즈가 어떻든, 당신은 그저 당신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그 여정에 <66100>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서민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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