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된 예산, 빡빡한 여행 일정 속에서도 아름다운 여성만 지나가면 세 남자의 표정은 온화해졌다. 사진은 최근 방송되고 있는 티브이엔 <꽃보다 청춘>에서 함께 여행을 떠난 이적, 유희열, 윤상이 지나가는 여성을 동시에 바라보는 장면.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여행지에서 만난 그 남자 그 여자
왜 우리는 여행길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는가…정신과 의사, 여행전문가 등이 분석한 설렘의 정체
왜 우리는 여행길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는가…정신과 의사, 여행전문가 등이 분석한 설렘의 정체
세 명의 남자가 여행을 떠났다. “똥을 못 눠 배가 나왔다”, “한 팬티로 3일째다” 등 원초적 불만에 가득 차 있다가도 이들이 눈을 빛내며 환하게 웃을 때가 있다. 낯선 도시 페루 리마에서 낯선 여성들과 마주칠 때마다 이들은 “역시 여행 오길 잘했어”란 표정을 발산한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티브이엔의 여행 버라이어티 <꽃보다 청춘> 속 이적, 유희열, 윤상의 모습이다.
나이가 몇 살이든 이렇게 우리는 여행지에서 청춘이 된다. 돌아오고 나면, 별일 없던 여행이 대부분이건만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며 설레는 걸까? 왜 그곳에서 만날 누군가를 기대하게 될까? 여행지에서 만난 그들, 그녀들에게는 왜 그리 관대해지는가? <꽃보다 청춘>을 제작한 나영석 피디는 한마디로 말했다. “와이프가 없으니까요.” 덧붙인다. “보는 눈이 없으니까 본능에 충실한 것.”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불확실성’을 열쇳말로 꼽는다. “여행이란 불확실성이 뜻하지 않은 우연한 만남, 지금 나의 사회경제적 환경에 기반한 네트워크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일단 기대를 건다. 늘 실망하던 현실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뭔가에 대한 기대다. 하루하루가 불확실한 여행지에서의 삶은 쉽게 사랑을 부른다. 하 교수는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반대편에 서 있는 여성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연구가 있다”고 말했다.
소개팅 나가기 전에 이미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해 상대의 정보를 죄다 파악할 수 있는 시대에 ‘정보 없음’은 상대의 매력을 상승시킨다. “거래처 직원도, 상사-부하도 아닌, 그냥 여행자라는 무책임한 정체성만 즐기면 되는” 상태에서 “계급장 떼고 만날 수 있는 평등한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정신분석가 이승욱씨는 분석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가 주입한 환상에 “저 사람이 내 운명의 상대가 아닐까”라는 의식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행지에서 좀더 쉽게 서로의 곁을 허락한다. “휴가지에서 만났으니까, 복잡한 일 이야기나 구질구질한 삶의 군살 같은 것을 보여줘가며 만날 이유도 없고, 즐기러 왔으니 환하게 웃는 모습들만 서로 보면 되니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다고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승한은 말했다. 여행 전문가인 김형렬 로얄캐리비안크루즈 한국사무소 아이티(IT) 기획실장은 “여행은 또다른 몽정”이라고 일갈한다. “꿈꾸고, 상상하고, 그리고 그 이상을 허해야 하는 게 여행의 본질”이며 “여행지에서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만남을 경험해본 사람과 못 해본 사람의 차이가 진짜 여행을 해봤느냐의 기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달콤한 만남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곧 깨질 환상인 경우가 많다. “여름방학 때 해변에서 만난 고등학생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리스>에서처럼 여행지에서는 내가 ‘흥분 모드’였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호감을 느꼈던 대상들이 일상으로 돌아와보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원래부터 싫어하던 것일 수 있다”고 하지현 교수는 분석했다.
하지만 어쨌든, 로맨틱했든 조금 찌질했든, 이 모든 것은 추억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좋아. 이렇게 생각해봐. 시간이 흘러서 10년, 20년이 지났어. 넌 결혼했고. 근데 결혼 생활이 전 같지 않을 거야. 넌 전에 만났던 남자들을 떠올리면서 그 하나를 선택했으면 어떨까 생각하지. 그게 바로 나야.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가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다면 너와 미래의 남편에게 얼마나 큰 선물이 되겠어? 나 같은 낙오자보단 네 남편이 백배 나을 테니까. 옳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행복할 거야. 가자.”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남자는 기차에서 함께 내리자며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는 말한다. “가방 가져올게.”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이 파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내 짝이여 이 열차 안에 꼭 나타나주오” 같은 마음으로 열차에 올라탄 게 아니다. ‘썸씽’부터 기대하며 가면 꼭 뭔가 뒤틀어지게 되어 있다. 괜한 기대 버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열린 마음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혹시 또 아나, 운 좋게 얻어걸리는 인연이 생길지도.” 이승한의 제안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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