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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완성된 문양도 애틋하게 사랑스러워

등록 2014-09-10 20:41수정 2014-09-11 17:37

거의 완성된 가방에 ‘불멸 잉크’로 조심스럽게 문양을 내고 있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거의 완성된 가방에 ‘불멸 잉크’로 조심스럽게 문양을 내고 있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매거진 esc] 스타일
임지선 기자의 폐기된 군용 텐트로 업사이클링 가방 만들기 도전기
앞에 놓인 짙은 회색 천은 얼마 전까지 어느 군대에서 쓰이던 군용 텐트의 것이었다. 24인용 군용 텐트로서 산으로 들로 훈련을 나간 수많은 군인들에게 노곤한 몸 누일 공간이 되어주었던, 오랜 시간 고생한 천이었다. 그렇게 오래 사용해 너덜너덜해진 텐트는 폐기됐다. 그러니까 이 앞에 놓은 반듯한 천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천인 셈이다.

종이 심지를 천에 덧대 붙이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종이 심지를 천에 덧대 붙이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한 무리의 사람들이 텐트들을 수거해 와 수차례 세탁하고 건조했다. 알고 보면 이 천은 견고하고 방수, 방염 처리까지 된 좋은 원단이다. 작업용 앞치마나 가방 등을 만들기에 이보다 좋은 천이 어디 있을까. 커다란 천에서 가로 36㎝, 세로 87㎝를 잘라냈다. 이제 이 천을 손질하면 ‘나만의 가방’이 만들어질 터다. 재활용, 리폼 등 많은 이름을 붙일 수 있으나 오늘은 이 체험을 ‘업사이클링’(up-cycling)이라 부르기로 한다.

군용 텐트, 낙하산 등을 활용해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이들은 코오롱인더스트리가 만든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RE;CODE)의 디자이너들이었다. 쓰다 버리는 물건을 재활용(리사이클링)하는 차원을 넘어서 기존 제품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업사이클링’이란 말을 사용했다. 코오롱이 만들었다가 사용되어보지도 못한 채 재고로 폐기처분되는 옷 등을 다시 분해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시작한 지 3년째다.

견고한 기능과 빈티지스러운 색감
버려진 군용텐트의 재발견
오리고 붙이고 박음질하고
잘못 찍은 문양까지 멋스러워

가방을 만드는 데 쓰이는 각종 공구들.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가방을 만드는 데 쓰이는 각종 공구들.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업사이클링 가방 만들기 체험을 위해 지난달 21일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코오롱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찾았다. 이날 만든 가방은 디자이너 윤영식이 ‘래;코드’와 협업해 군용 텐트를 활용해 디자인한 것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반듯한 천 가방에 소가죽 손잡이를 달고 염료로 무늬를 만들면 끝. 하지만 초보자에게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두시간 반 동안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천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쇠로된 묵직한 롤러로 심지 붙인 부분을 펴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쇠로된 묵직한 롤러로 심지 붙인 부분을 펴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천 가방의 양쪽 윗부분을 굳건하게 만드는 것이 디자인의 핵심이다. 폭 3.5㎝짜리 긴 종이가 필요하다. 일반 쇼핑백 수준의 단단한 종이면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다. 넓적한 스틱에 본드를 발라 천의 양쪽 끝에 반듯하고 깔끔하게 발라준다. 그곳에 심지를 대고 양 끝부터 손가락 끝으로 하나씩 눌러가며 붙여준다.

가방을 만들려면 바느질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본드에 이어 나온 재료, 양면테이프에 놀랐다. 천에 한쪽 면이 붙은 종이 심지 위에 이번엔 양면테이프를 붙여 다시 접어 천에 붙여준다. 쇠로 된 묵직한 롤러로 비비며 잘 붙여준다. 기다란 천의 양 끝은 종이 심지를 품어 단단해졌다. 이제 손잡이가 달릴 구멍을 펀치로 뚫어주면 된다.

재봉틀을 이용해 가방의 모양새를 만드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재봉틀을 이용해 가방의 모양새를 만드는 모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손잡이는 식물성 염료로 가공한 통소가죽을 쓰기로 했다. 39㎝짜리 기다란 소가죽 손잡이 한쌍의 비용을 굳이 따지자면 3000원 정도라고 한다. 가방 시접 부분 중간에 12㎝ 간격을 벌려 펀치로 구멍을 뚫는다. 여기에 소가죽 손잡이의 구멍을 맞추고 고정쇠를 끼운다. 1.6㎝짜리 원 모양의 소가죽을 덧댄 뒤 망치로 팡팡 쳐서 눌러주면 된다. 둥근 모양의 못을 대고 쳐주면 소가죽에 예쁜 문양도 들어간다.

이제 재봉틀.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천을 반으로 접어 시접 부분을 박아준다. 이때 일반 리본끈 재질 같은 바이어스 테이프를 덧대고 박아주면 시접 부분이 감춰져서 깔끔해 보인다. 천과 비슷한 색깔인 어두운 녹색 테이프로 시접을 감싸 재봉을 했다. 바이어스 테이프는 여분이 있게 박고 위 양 끝은 불로 지져주면 된다. 요즘 재봉틀은 기능이 좋아져서 간단한 조작만 배우면 사용할 수 있다는데, 손 조작을 거의 도움받고 앞 밟기, 뒤 밟기의 발 조작만 하는데도 땀이 뻘뻘 났다.

완성, 삐뚤빼뚤 나만의 가방.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완성, 삐뚤빼뚤 나만의 가방.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주머니 모양으로 완성된 가방을 뒤집어 제대로 모양을 잡아준다. 뒤집어 팡팡 털면 될 것 같지만 이 단계에서 얼마나 세심하냐에 따라 가방 모양이 달라진다. 자, 송곳, 롤러 등을 이용해 모서리는 뾰족하게, 나머지는 반듯하게 펴준다. 다 됐다고 생각한 순간, 디자이너가 가져가서 몇번 더 만지니 몰라보게 반듯한 가방이 완성됐다.

마지막 단계는 꾸미기. ‘불멸 잉크’라고 쓰인 작은 병이 등장했다. 금속, 유리, 가죽 등에 사용하는 이 잉크를 사용해 각종 무늬를 만들 수 있다. 잉크와 여러 무늬의 도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순간의 선택이 불멸까지 간다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둥근 모양의 도장을 여러개 찍기로 했다. 삐뚤빼뚤 완성된 모양을 보니 불멸의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자신이 가방이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천을 이용해 나만의 가방을 만들고 나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빛바랜듯, 고단한 세월이 묻어나는 천에서는 빈티지의 세련된 느낌마저 배어나왔다. 소가죽 손잡이도 잡는 느낌이 좋았다. 가방 안에 수납공간은 따로 없지만 그 단순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보다 보니 삐뚤빼뚤한 둥근 무늬까지도! 가치를 높여 업사이클링 한다는 것, 그 자체를 체험한 느낌이었다.

업사이클링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전문 브랜드도 하나둘 생겨나고 뚝심있게 업사이클링 작업만을 하는 디자이너들도 여럿이다. 오는 10월에는 코오롱이 서울 명동성당 복합문화시설에 ‘래;코드 나눔의 공간’이란 이름의 업사이클링 체험 공간의 문을 열 예정이다. 한경애 ‘래;코드’ 상무는 “명동성당의 ‘래;코드 나눔의 공간’은 업사이클링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환경과 윤리적 패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사이클링으로 옷이나 소품을 직접 만들 수 있는 공간도 많아지고 있다. 코오롱의 이태원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언제든 사전 신청을 통해 가방 만들기에 도전할 수 있다. 공연, 강좌, 전시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문화예술공간 재미공작소(studio zemi)에서도 오는 23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바느질 등을 배우며 작품을 만드는 ‘리폼클럽’을 연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골목에 자리잡은 갤러리카페 ‘마음은 콩밭’의 주인인 김희(58)씨도 오는 21일부터 4주 동안 업사이클링 바느질 강좌를 시작한다.

2년 전 카페를 열면서부터 소소한 바느질 강좌를 열어왔다는 김희씨는 “함께 모여 업사이클링 작품을 만들면 각자 가져온 재료에서 또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의 강좌는 매주 하루씩 안 입는 청바지나 티셔츠 등을 들고와 바느질부터 업사이클 기법, 스텐실 기법 등을 배우며 새로운 디자인의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보는 내용이다. 앞으로 안 입는 한복으로 만든 원피스, 한번도 안 쓴 에코백으로 만든 소품 등 수강생들이 만든 작품을 모아 작은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조금만 신경쓰면 버려지는 재료로 나만의 애틋한 무언가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점이 그가 업사이클링을 추천하는 이유다. 듣고 보니 내 가방, 이렇게까지 애틋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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