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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 시베리아 벌판에서 십상시들과 개나리나 깔까요?

등록 2014-12-24 17:33

[esc] 욕의 전략
욕은 더 이상 은밀하지도 비속하지도 않다. 2013년 만우절을 맞아 “우리 욕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로 서울 상수동 그문화갤러리에서 열린 〈상년전〉에 전시된 욕그림 ‘니기미쌍쌍바’(곽사과 그림)와 ‘조카 크레파스’(기린 그림).
욕은 더 이상 은밀하지도 비속하지도 않다. 2013년 만우절을 맞아 “우리 욕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로 서울 상수동 그문화갤러리에서 열린 〈상년전〉에 전시된 욕그림 ‘니기미쌍쌍바’(곽사과 그림)와 ‘조카 크레파스’(기린 그림).
팟캐스트, 케이블 프로그램, 웹툰 등
하위문화 매체들이 활용하는 욕의 전략, 욕의 진화

“욕이라는 건 말이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얼어죽을 년 같으니 옘병 땀병 속병에 가다 버릴 십장생 시베리아 벌판에서 감귤이나 까라 그래 개나리나 까라 그래 소나리나 까라 그래 니 눈앞의 내 꼴이 천진난만하냐 쌍화차야 욕지거리 토 나오게 들어볼래 (…) 신발샛길 밤식빵에 포도씨유 바른다 호랑말코 볼따구를 허벌나게 쳐분다 (…) 아이고 왜들 이러세요 지지지지 진정들 하세요 왜그러냐 하면 말이다 욕을 잘 만들라고 맛있게”(‘하늘에서 내리는 1억개의 욕’, 시유 노래)

하늘에서 수억개의 욕이 쏟아지고 있다. 4년 전 한 드라마의 욕쟁이 할머니를 패러디한 노래가 유시시로 만들어졌던 것을 애니메이션 캐릭터 시유가 다시 고쳐 불렀고, 인터넷을 돌고 돌며 여러 재야의 가수들 입으로 재창작되다가 최근엔 ‘하늘에서 내리는 2억개의 욕’까지 나왔다. 번외편까지 모아놓고 보니 공교롭게도 죄다 우리 옛 시조인 3.4조 혹은 4.4조 형식에 가깝다.

욕의 일상화를 이루어낸 일등공신은 아무래도 에스엔에스와 수많은 비(B)급 미디어다. 예전 같으면 화장실 벽이나 독서실 칸막이 같은 곳에 끄적였을 욕들이 개인 미디어들을 타고 공개된 장소로 쏟아져 나왔다. 이박사(이종우)와 이작가(이동형)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는 다음과 같은 경고로 시작한다. “이 방송은 19금으로 과도한 비속어와 욕설이 난무하니 임산부와 노약자, 심신이 미약한 사람은 청취를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사회 및 문화 분야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 전문 팟캐스트에서 두 진행자는 열심히 욕을 하는데, 이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방송심의위원회와 관계없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있고 기존 권위주의와 엄숙주의를 깨기 위해서 일부러 욕을 한다. 특히 방송 초반엔 서울대 종교학과 박사 과정을 마친 이박사에게 더 열심히 욕을 하도록 격려했다. 엘리트들이 뒷구멍에선 욕 나오는 일을 다 하면서 공개 석상에선 점잖게 행세하는 행태가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추임새처럼 의도적으로 하지만 ‘이승만 특집’ 같은 방송을 할 땐 우리도 모르는 새 욕이 막 터져 나온다. 개새끼.” 팟캐스트 <철수와 존슨의 취업학 개론>을 진행하다가 지금은 유튜브에서 같은 이름의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는 철수도 ‘욕쟁이’로 인기를 얻었다. “욕은 약자끼리 주고받는 추임새와도 같다. 회사가 취업준비생을 앉혀 놓고 집의 자산상태나 부모님 학력을 물어봤다는 사연을 소개할 때 진행자들이 어떤 시베리아 새끼들이 이딴 걸 요구하냐고 대신 화를 내줘야 한다. 워낙에 술 먹고 울분을 토하듯 하는 방송”이라고 했다. 얼마 전 유튜브로 방송한 ‘칼퇴 특집’에서 최근 취업한 철수와 존슨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선 수요일을 ‘족데이’라고 불렀어. 회사에서 ‘가족의 날’이라며 붙인 이름인데 이 말 자체가 욕 같지? 수요일만 칼퇴라면 월·화·목·금은 법정 근로시간을 넘어 야근하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냐, 이 주옥같은 새끼들아!”

자기를 욕하는 것
자기 인생의 가치를 욕하는 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고
경쾌하게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힘을 준다

〈하늘에서 내리는 1억개의 욕〉
〈하늘에서 내리는 1억개의 욕〉
아이고, 왜들 이러시냐고? 노래 ‘좆같은 세상 갈아엎어요’를 부른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김태춘에게 왜 자꾸 욕하는지 묻자 이렇게 답한다. “이유가… 좆같은 세상을 좆같다고 부를 수밖에… 달리 은유할 방법이 없어서요.” 그와 함께 활동하는 밴드의 이름은 ‘쌍년들’이다. 사회는 공식적으로 비속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2월엔 <호모 욕쿠스, 욕해야 사는 인간>(이병주 지음, 아포리아 펴냄)이라는 책이 나왔다. 현직 변호사가 쓴 책은 “자기를 욕하는 것, 자기 인생의 가치들을 욕해버리는 것은 우리가 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경쾌하게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힘을 준다”며 특히 “자신을 욕할 줄 모르는 바보들”을 욕한다. 방송에서 자신이 자신을 욕한 뒤 뜬 스타들이 여럿 되는 방송가의 유행어로 치자면 ‘디스는 셀프’인 셈이다. 그보다 앞서 2012년에 나온 책 <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에서 지은이인 송상호 목사는 아예 욕 기능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영국 런던대 존드웨일 박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욕은 일반 언어보다 4배나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했고, 또다른 영국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선 욕설이 신체적 고통을 줄이는 단기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면한 고통을 잊기 위해 욕을 하고 또 한다.

그러나 욕이 지나치게 범람하는 시대, 욕이 가져다주는 피로와 실증도 만만치 않다.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인 한동원씨는 “요즘은 우파도 좌파도 욕을 한다. 예전엔 욕이 소수자의 문화적 상징으로 쓰였지만 이제는 기본적으로 도구일 뿐이다. 듣도 보도 못한 욕을 다들 많이 하지만 리얼하긴 한데 욕에 숨어 있는 카타르시스나 재치는 많지 않다. 욕의 상상력이 점점 딸리는 추세”라고 한탄했다.

김이브씨의 인터넷 방송 장면. 사진 누리집 갈무리
김이브씨의 인터넷 방송 장면. 사진 누리집 갈무리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터넷 방송을 통해 매일같이 새로운 욕이 업데이트되는 시대에 요즘 뜨는 욕쟁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다. 채널 티브이엔(tvN) <에스엔엘(SNL) 코리아>를 통해 국민 욕쟁이 자리에 배우 김슬기의 이름을 올린 안상휘 피디는 “방송에서 욕이란 것은 금기어인데 파격을 깨는 방송으로 자리잡는 도구로서 욕 전략을 택했다”며 “동심을 대표하는 텔레토비나 젊은 여자가 욕을 할 때 주는 카타르시스와 언밸런스한 느낌이 있다. 슬기씨는 워낙 발음이 정확해서 얼버무리지 않고 또박또박 쌍욕을 하니까 효과가 컸다”고 전한다. 뛰어난 외모로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 티브이에서 ‘여신’으로 불리는 김이브씨는 욕으로 스타가 됐다. 시청자들과 채팅하면서 진행하는 방송에서 누가 진행자에게 욕이라도 하면 대부분 진행자들은 그를 퇴장시켜버린다. 그러나 “받은 욕의 2배만큼 되돌려주는 넉넉한 시골 인심을 자랑하는” 김이브씨는 공개적으로 그 시청자를 향해 욕을 해댄다. 한 방송에서 그는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공개적으로 야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막장 욕을 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저는 하니까)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방송을 많이 본다”고 말했다. 레진코믹스에서 <먹는 존재>라는 웹툰으로 연재중인 유아영(필명 들개이빨) 작가도 욕설계의 떠오르는 스타다. 사회에서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한 여주인공은 “배고픔이란 질 낮은 양아치 새끼”라는 말로 만화를 시작해 얼마 전 “내 마음속 욕 뚝배기, 언젠가는 영업종료 할 수 있겠죠?”라는 질문으로 시즌1을 끝냈다. 그동안 만화에서 욕은 “그만해 이 미친 놈들아, 와장창창!”으로 대표되는 이말년 작가나 “이런 니기미 썅썅바” 같은 수많은 새로운 욕을 창조해낸 메가쑈킹 등 남자 작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이제 사랑에 빠지는 순간 “좆 됐네”(<먹는 존재> 16화)를 외치는 여주인공이 나타났다. 진짜 억압이 있는 곳에 진짜배기 욕이 나타난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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