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하루아침에 난민이 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건 그들의 이웃, 바로 우리 자신이다. 부룬디 난민이 모여 사는 마하마 캠프의 소년. 사진 조혜정 기자
콩고민주공화국 난민이 모여 사는 기헴베 캠프에서 만난 어린이들. 사진 조혜정 기자
지난 5월16~18일 한국과 일본, 중국, 프랑스의 유니클로 임직원 20여명이 중앙아프리카 르완다의 콩고민주공화국·부룬디 난민 캠프를 방문해 의류 54만벌을 전달했다. 소비자한테는 불필요한 옷을 기부받아, 옷이 필요한 난민이 입을 수 있도록 해 옷에 새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현재 지구상의 난민은 모두 6천만명.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보다 1천만명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 인종 갈등, 종교 분쟁 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입은 옷차림 그대로 남의 땅을 떠돌고 있다. 출근해 일하고, 친구와 밥을 먹고, 가족과 하루 일을 이야기하던 평범한 일상은 누군가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하루아침에 산산조각났다. 언제, 어떻게, 존엄한 인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시간이 쌓이면 희망을 떠올릴 기운조차 사라진다.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킬 수 있는 건 또다시 사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행복은 성립할 수 없다. ‘재미’를 추구하는 이에스시가 난민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다.
나는 엔지사비라입니다
엔지사비라(왼쪽). 사진 조혜정 기자
내 이름은 엔지사비라(사진 왼쪽), 올해 스물셋입니다. 제 꿈은, 이 세상 어디든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지난해까지 저는 부룬디에서 제일 큰 사립대학교인 희망 아프리카 대학교(Hope Africa University)에서 경영기술을 공부했어요. 부모님과 저, 형 둘과 남동생 둘, 여동생 넷까지 식구 11명이 부줌부라(부룬디의 수도)에 살 땐, 공부를 할 수 없어 고통스러운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지난 1월, 엄마,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곳 르완다 동부주 키레헤의 마하마 난민 캠프에 왔습니다. 제 조국 부룬디는 지난해 4월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헌법을 어기고 3선 출마에 나서면서 준내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곳곳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폭력과 저항이 반복되면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죠. 저희 가족도 1년 가까이 숨죽인 채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렸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부룬디를 떠난 사람이 23만명이 넘는대요. 그중에 국경을 맞댄 르완다로 넘어온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작년에 만들어진 마하마 캠프는 지금 르완다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난민 캠프입니다. 최근까지 등록된 난민은 4만8천여명에 이르고, 지금도 일주일에 수백명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하마 캠프에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카게라 강과 정수시설. 강 건너편이 탄자니아다. 사진 조혜정 기자
이곳에선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유엔난민기구와 옥스팜, 유니세프 같은 국제기구가 탄자니아와 르완다를 가르는 카게라 강의 황톳물을 정수해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충분하진 않아요. 사업을 하다 총에 맞고 이곳으로 피신해 온 옆집 아저씨의 소원은 아이 8명이 먹을 음식을 한꺼번에 요리할 수 있는 큰 프라이팬입니다. 농부로 살았던 앞집 아주머니의 소원은 자녀 10명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매트리스를 사는 겁니다. 전, 주머니에 단돈 1천르완다프랑(약 1500원)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일할 기회가 필요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요. 르완다는 실업률이 30%를 넘습니다. 이 나라 국민들도 직업을 못 찾는데, 난민인 저한테까지 기회가 올 리 없죠. 가족은 많지만 엄마도, 형도, 동생도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학에서 정보공학을 전공하던 두살 아래 동생 니욘쿠루(오른쪽)가 텅 빈 눈으로 “난 더 이상 어리지 않아. 가족을 지켜야 해. 하지만 여기선 답이 없어. 누구든, 공부를 계속할 수 있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으로 보내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아”라고 말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캠프 안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더 어린 동생들은, 이런 절망을 느끼지 않아도 될까요? 그런 날이 올까요?
나는 요란다입니다
요란다. 사진 조혜정 기자
내 이름은 요란다(사진), 르완다 북부주 기쿰비에 있는 기헴베 난민 캠프에서 딸 셋과 외손자를 키우고 있습니다. 고향인 콩고민주공화국의 북키부주 마시시를 떠나온 지 20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그 밤이 떠오를 때마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이 시작된 1996년 어느 날 자정, 가족들 모두 조용히 잠들어 있던 우리 집에 무기를 가진 후투족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놀라서 깬 가족들을 향해 머셰티(낫처럼 생긴 아프리카의 칼)를 무차별적으로 휘둘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촌동생 2명이 그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와 남편은 간신히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지만, 그날 밤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피 흘리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또렷합니다. 그 일이 생각날 땐 지금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요. 우리처럼 습격을 피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꼬박 일주일을 걸어 도착한 곳이 르완다의 무덴데 캠프였습니다. 그곳도 안전하진 않았습니다. 이듬해 8월부터 후투족이 우리 투치족 사람들이 살고 있던 무덴데 캠프를 여러 차례 공격해 수백명이 죽었어요.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지금의 기헴베 캠프입니다. 이곳엔 1만4천여명이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마하마 캠프 전경. 사진 조혜정 기자
옷도, 음식도 부족한 곳 희망도, 행복도 꿈꿀 수 없는 삶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모두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다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난 20년 동안 내내 생각했습니다. 음식은 부족하고 집은 좁고 돈은 없어요. 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킬 방법도 없어요. 올해 3월까지 캠프 안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교사 자격 규정이 강화되면서 더는 일할 수 없게 됐어요. 바뀐 자격증을 따려면 8만르완다프랑(약 12만원)이 필요한데, 그럴 돈이 어딨나요. 캠프에서 매달 지원해주는 2만5천르완다프랑(약 3만7500원)이 수입의 전부인데 말입니다. 열아홉살 큰딸은 지난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빠가 누군지 모릅니다. 내 목숨 같은 자식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마하마 캠프 안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양식을 마시고 있다. 사진 조혜정 기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사람들의 93%는 절대로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아요. 정치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인종갈등의 불씨도 살아있어, 돌아가면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거든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미국에 가는 겁니다. 유엔난민기구와 협약을 맺은 미국 정부가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때 살아남은 난민들의 미국 내 재정착을 돕고 있거든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기헴베 캠프에선 3639명이 미국에 갔어요. 르완다 전체에선 1만169명이 갔고요. 미국에 가는 것,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기, 행복을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요.
나는 최경민입니다
내 이름은 최경민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중국 유학을 다녀왔어요. 지금은 한국 유니클로 명동중앙점에서 1층 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르완다의 난민 캠프 두 곳에 의류를 전달하는 행사에 동료들과 함께 다녀왔어요. 르완다에 갈 땐 우리와는 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입사해서 알게된 유엔난민기구에 6년 전부터 매달 후원금을 내고 있는데, 계좌에서 자동이체로 돈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단순한 봉사활동이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죠. 그런데 난민들을 만나보니, 그건 제 착각이었어요. 이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농부, 선생님, 목사님…. 나와 내 동료들처럼 각자의 나라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치적인 분쟁에 휩싸여 갑자기 일상이 무너져내린 거예요. 언제든 전쟁이 날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한테도 닥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나와 똑같은 사람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요? 부룬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룬디의 상황을 널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부룬디에 평화가 오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분을 함께 만난 동료 김미형씨는 “유니세프나 세이브더칠드런 같은 데서 홍보물을 나눠주는 걸 보면 피했었는데, 이젠 그분들 얘기를 들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만난 난민들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합니다. 채윤정 슈퍼바이저는 “앞으로 옷을 모을 땐 많이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난민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동복과 남성용 셔츠를 중심으로 모아야겠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족하게 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옷을 파는 사람이니까 옷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해보려고요. 옷을 기부해준 고객들에겐 그저 안 입는 옷이지만, 그 옷 몇 벌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키레헤·기쿰비/글·사진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