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드라큘라’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영국의 메탈밴드 주다스 프리스트와 뉴욕 디스코, 뉴웨이브의 히로인 가수 그레이스 존스는 개기일식처럼 희귀하게 만난다. 함께 ‘러브 바이츠’(Love Bites)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고, 공히 이 노래에서 흡혈귀를 언급한다. 러브 바이츠는 미국에서는 ‘히키’(Hickey. 키스자국), 한국에서는 콩글리시로 ‘키스 마크’, 은어로 ‘쪼가리’에 해당하는 영국식 표현이다. 피부가 얇은 목이나 쇄골, 가슴 등의 부위를 입으로 강하게 빨아들였을 때 작은 혈관이 터지면서 생긴 병변을 가리킨다. 장년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지만 청년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심지어 ‘키스마크 만드는 법’을 정리해 올려놓은 블로그도 있다.)
러브 바이츠는 그들의 끓어오르는 사랑을 있는 힘껏 표현한 흔적이자 훈장이다. ‘나 경험 있어’라고 스스로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봐줘야 멋있다고 생각하는 나이, 태양이 달 뒤에 가려질 수 있다는 걸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가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 영국의 소설가 브램 스토커에게 목에 퍼붓는 키스는 악몽이었다. “젊은 남자는 밖으로 나가고 여자들을 만나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입술이 아닌 목에 키스하려고 한다. 늙은 백작이 가로막는다. 악마적인 분노. 이자는 내 거야. 나에게는 그가 필요해.” 스토커가 자신의 꿈을 기록한 일기의 일부이자 그가 쓴 소설 <드라큘라>의 기원이다. 소설 속에서 트란실바니아 성의 여자 흡혈귀 세 명이 등장인물 조너선 하커를 성적으로 유혹하자 드라큘라 백작이 이를 가로막으려고 등장하는 장면이다.
브램 스토커가 쓴 <드라큘라> 초간본. <한겨레> 자료 사진
목에 하는 키스는 섹스의 이전 단계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입은 맞추지 않았어도 목에는 얼마든지 키스하는 관계가 있다. 입술에 담긴 순결, 약속, 사랑 등의 의미에 구애받지 않고 단지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것이다. 스토커가 목에 하는 키스에 담긴 성적인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기독교를 앞세워 모든 악과 퇴폐를 물리치려는 시대에는 꽤 난감한 성적 상징이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 대목이다. 스토커에게는 악마적인 분노를 드러내는 드라큘라 백작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를 더블린에서 런던으로 이끌어준 연극배우이자 극장 경영자, 사교계의 유명인사 헨리 어빙이다.
심하게 말하면 스토커는 헨리 어빙의 수발을 들었다. 쇼가 끝난 뒤의 정찬을 스토커가 준비해주기를 바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에게 헨리 어빙은 자신을 비즈니스 매니저로 취직시켜준 ‘사장님’이면서 ‘은인’이자 ‘멘토’였던 것 같다. 드라큘라의 고결한 품위와 집요한 성격은 헨리 어빙에게서 비롯됐다고 뭇 문학평론가들은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사장님을 악마로 등장시키는 소설을 쓰는 스토커의 입장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오던 낭만주의적 인생을 산 남자, 그럼에도 영국에서 배우 최초로 ‘경’ 칭호를 받을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산 남자(말년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를 오로지 존경의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때로는 존경이 질투가 되고 그의 완전한 남성성에 좌절한 나머지 남성성 자체를 부정하는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스토커는 더블린 성의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무급으로 기고를 하고 석사 학위를 따고 파트타임 편집자로 쉼 없이 일하는 것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헨리 어빙에게서 봤을 것이다. <드라큘라>는 한 완벽한 남성을 제거하는 이야기다.
브램 스토커가 쓴 <드라큘라> 초간본. <한겨레> 자료 사진
드라큘라에게는 인간을 뛰어넘는 힘이 있고, 박쥐, 늑대 등 동물을 부리고, 안개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어떤 영화나 드라마, 연극을 통해서든 지금까지 유지되는 설정은 목을 깨문다는 것, 피를 마신다는 것, 이를 통해 상대방을 또 하나의 흡혈귀로 만든다는 것뿐이다. 섹스가 1차적으로 일체감을 추구하는 행위라면 이 세 가지는 그 이상의 성적 능력이다. 목을 깨무는 것과 키스가, 두 개의 이빨 자국과 러브 바이트가, 섹스에서만 거리낌 없어지는 ‘내 것’이라고 말하는 표현과 인간의 흡혈귀화를 한 쌍처럼 놓을 수 있겠다.
따라서 온갖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의 가장 흔한 소재가 흡혈귀인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트와일라잇>, <버피 더 뱀파이어> 시리즈를 비롯한 할리우드산 흡혈귀물을 줄줄 읊을 수 있겠지만, 이 소재에 정치와 상상력을 더한 건 오히려 3류라고 평가받는 저예산 포르노 쪽이었다. 헤스 프랑코의 <피메일 뱀파이어>(Female Vampire)는 여자 뱀파이어를 등장시켜 남성의 거세 콤플렉스를 희롱하고, 장 롤랭의 <리빙 데드 걸>(Living Dead Girl)은 타인의 피를 통해 이어가는 생명을 거부하는 한 여자 흡혈귀의 결단을, 기존의 영웅적 남성 서사와는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중에서 최악으로 손꼽히는 <박쥐성의 무도회>는 남자들이 드라큘라를 두려워하는 지점을 정확하고 유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앤디 워홀이 만든 뜻밖의 흡혈귀 영화 <블러드 포 드라큘라>(Blood for Dracula)에는 뉴욕의 정신이 살아 있다. 처녀의 피를 찾아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 스며든 드라큘라, 하지만 그 집안의 네 자매는 처녀는커녕 하인과 난교를 일삼는 중이다. 드라큘라가 그들의 피를 마시고 토하는 장면을 가장 공들여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선택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스토커의 의도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그가 바란 것은 남성성에 대한 응징이 아닌 질서였다.
그 질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평한 대로 “기독교적 진리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스토커는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에게 선물한 <드라큘라>의 증정본에 “이 책에 천박한 내용이 조금도 없기를” 바란다는 메모를 적기도 했다. 1908년에 발표한 평문 ‘픽션의 검열’에서는 “인간에 내재한 악의 힘을 활용한” 소설과 연극에 대한 “지속적인 검열”을 주장했다. 스토커는 일생에 딱 한 번 <드라큘라>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본 것 같다. 다만 등장인물은 등장인물일 뿐 작가와는 딱히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팀 버튼의 영화 <에드 우드>에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걸 누구나 신기하게 여기는 왕년의 배우 벨라 루고시(1931년 최초의 드라큘라 영화에 등장한 이래 드라큘라 그 자체가 된 배우)가 지방순회공연에 쓸 관에 누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 평생 이렇게 불편한 관은 처음이야!” 당대의 질서가 몹시 불편한 사람도, 편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스토커의 시대는 관 속에 누운 듯이 사는 게 미덕인 시대였다.
목에 생긴 상처를 자랑할 수도 부끄러워할 수도 욕망할 수도 있는 지금에도 스토커는 관의 수호자가 됐을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가 관의 시대에 관에 누우려는 사람이었다면 <드라큘라>는 조용히 묻혔을 것이고, 그 사실이 꽤 합당하고 썩 마음에 든다.
정우영(지큐 에디터), 참고문헌 <드라큘라>(펭귄클래식 코리아 에디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