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페미니스트 여친과 헤어진 저, 도망친 걸까요?

등록 2018-10-10 21:00수정 2018-10-11 09:57

[ESC]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김 여사’ 발언으로 시작된 성차별에 대한 대화
게임 카페가 여혐 카페라며 탈퇴하라던 여친
“페미니즘,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는 말 듣고 헤어져

A. 우리사회 여전히 뿌리 깊은 성차별
과거에 머무른 젠더 의식이 가져온 어긋남
성차별 덜 민감한 당신, 이 문제 숙고해보길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A 안녕하세요? 6개월 만난 여자친구를 3개월 정도 전에 헤어진 남자입니다. 아직도 종종 생각납니다.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마음이 남아있는 듯해요. 어느 것 하나 다른 마음 없이, 같은 생각 같은 방향이어서 ‘나와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한 이였죠. 6개월 동안 일주일 정도 빼고 매일 만난 것 같아요. 근데 미투 운동이나 여성 혐오, 남성 혐오에 대한 글이나 기사들이 한창이던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선 발단은 골목길에서 위협 운전을 하던 차를 보고 제가 “저거 김 여사야 틀림없어”라는 얘기를 하면서부터였어요. 그때부터 매사 성차별 문제로 대화가 끝이 났고 힘들었어요. 심지어 여행 가서 좋은 시간 보내면서도 그런 얘길 꺼내더라고요. 이후 다시 싸움의 발단이 된 사건이 터졌어요. 인터넷 커뮤니티가 원인이었죠. ‘도탁스' 라는 커뮤니티입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 온라인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과 교류하기 위해 가입했어요. 활동 기간이 길다 보니 요리 게시판이나 패션 게시판, 웃긴 게시물 등에 글을 올리면서 지냈지요. 제겐 작은 오락 공간이었어요. 근데 여자친구가 다른 친구에게서 제가 여기서 활동한다는 얘길 듣고 왔더라고요. 여혐 카페라면서 절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카페에서 탈퇴하라고, 강하게 얘기하기 시작했어요. 저에게는 사소한 오락 공간이기 때문에 그냥 탈퇴했어요. 결국….

그 후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민감한 대화가 한동안 오갔고, 저는 항상 그런 부분에서 기준 미달이었습니다. 제가 헤어지자고 한 날 여자친구가 말하길 “페미니즘은 항상 옳아 절대적인 부분이야. 네가 알아야 해. 너는 남자라 잘 몰라.” 제가 대화를 통해 수용의 여지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노력해보겠다고 누차 얘기했어요. 그렇게 말했는데 돌아온 답은 “너는 남자라 잘 몰라”였죠. 그리고 네 기준에 맞지 않는 내가 잘 모르는 것 같다면 좀 알려달라고도 말했어요. 그런데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며 공부하라고 하더군요. 여자친구는 자기가 설명을 해도, 결국 제가 이해하는 척만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은 날, 저는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사귀자고 따라다닌 것도 저였고 만나는 동안 세상 없을 행복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날들 많았는데 말이죠. ‘내가 이렇게 차별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도 생각이 나고 연락해보고 싶은데 꾹 눌러 참고 있어요.

어떤 방법이 현명했을까요? 도망쳐 버린 것도 같아 마음이 아직 일렁거려요.

현명해지고 싶은 남자

Q 그녀를 정말 좋아했습니까?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마음이 남아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당신의 편지는 ‘여전히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음', ‘여전히 억울함', ‘여전히 나는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움'이라는 입장이 묻어나고 있네요. 모든 상황에서 당신이 피해자인 듯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골목길에서 위협 운전을 하는 차를 보고 ‘김 여사' 운운한 것은 백 퍼센트 당신의 잘못입니다. 운전을 못 하는 것을 여성의 특성으로 규정하고 조롱하는 것, 분명한 성차별적 발언이지요. 몇 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신문 기사에서조차 아무렇지 않게 쓰이던 김 여사라는 표현이었으니 당신도 무심코 썼을 것을 압니다. 하지만 무심코 썼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 아닌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당신이 문제적 발언을 한 것 자체보다는 그런 발언을 한 이후의 태도가 훨씬 문제가 됐을 겁니다. 왜 문제인지 모르니 그런 발언을 했을 것이고, 그러니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았겠지요. 그 후 매사 성차별 문제로 대화가 종료되었다고 하셨지요. 당신은 그녀가 사사건건 성차별의 문제로 몰고 갔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무슨 이야기를 해도 성차별의 문제로 환원되었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각 속에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그만큼 성차별적 요소가 많이 존재했다는 방증이겠지요.

우리의 부모 세대는 성차별을 어쩔 수 없는 것,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적 상황에서 성장했습니다. 성차별이 만연해 성차별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과도기를 완벽하게 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적 가부장제는 도시화, 핵가족화, 맞벌이 문화, 여성의 교육 수준 상승이라는 다양한 사회적 상황을 관통하면서 점점 갈 곳을 잃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지요. 가부장제 안에서 성장했지만, 가부장제 시스템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세대가 지금의 청년 세대가 된 셈입니다. 미투 운동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이슈도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냥 지나치던 것이, 이젠 지나칠 수도 지나쳐서도 안 되는 무엇이 된 것이죠.

그리고 그 과도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가치의 역동성이며 혼란입니다. ‘여자는 솥뚜껑 운전이나 해라'라고 여성 운전자에게 삿대질하는 사람들은 불과 수년 전에만 해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김 여사'라는 호칭이 혐오 표현이라고 규정하는 기사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죠. 네, 당신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성차별', ‘혐오 표현'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녀도 당신처럼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면 둘이 함께 비웃고 말았을 것이고, 큰 탈 없이 잘 만났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네요.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대해서도 인지가 되어 있지 않았을 테니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 버리고, 함께 여행을 떠나서도 대화가 어긋날 수밖에요. 당신에겐 어떤 인터넷 카페가 그저 오락용일 뿐이지만, 그녀에겐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보였겠지요. 젠더 의식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문제인 겁니다. 성에 따른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는 가치관 그 자체이니까요. 그냥 ‘너 왜 이렇게까지 예민해? 무슨 피해의식 있어?'라고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는, 개인의 삶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에 초점을 두는가에 대해 당신과 그녀가 이미 다른 선상에 있었기에, 한 번 불거진 가치관의 차이는 더는 좁혀지거나 이해되지 않았을 겁니다.

‘너는 남자라 잘 몰라'라며 ‘이해하는 척만 하게 될 거야'라고 말한 그녀의 의중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에게 젠더 의식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는데, ‘수용의 여지가 있다면'이라며 단서를 달고 ‘설명해 달라'고 말하기까지 한다면 그 말이야말로 더 실망스러웠을 수 있지요. 몇 번의 언쟁과 실망스러운 반응 속에서, 그녀는 ‘너에게 수용 따위 바라지 않고 알려주는 노력도 할 생각이 없어'라고 결론 내렸기에 그런 말로 당신을 이미 떠나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죠. 상대가 먼저 항복하게 하는 건, 연인 사이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당신이 ‘차별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차별의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고는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차별의 문제에 눈을 뜬 누군가에게, ‘차별의 문제에 민감하지 않음'은 크나큰 결격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자, 저는 당신이 한 번쯤 이 문제를 확장해 숙고해보길 바랍니다. 나에겐 대수롭지 않았던 문제가 누군가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일 때, 그때도 여전히 ‘난 잘 모르겠으니 일단 나를 설득해보라'고 이야기할지 말입니다. 그 문제에 당신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을 때, ‘어떻게 했어야 더 현명했을까'에 대한 답도 스스로 내릴 수 있겠지요. 시민사회의 성숙한 일원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곽정은(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당신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무협소설 10선 1.

당신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무협소설 10선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2.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타는 듯한 가슴 통증...과도한 음주, 바로 취침 피해야 [ESC] 3.

타는 듯한 가슴 통증...과도한 음주, 바로 취침 피해야 [ESC]

그의 체육관엔 샌드백이 열네개 4.

그의 체육관엔 샌드백이 열네개

[ESC] 향, 향, 향, 인공지능이 만든 향 5.

[ESC] 향, 향, 향, 인공지능이 만든 향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