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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박보검이 입은 옷 제 손에서 탄생했지요”

등록 2018-11-16 10:07수정 2018-11-16 20:25

라이프레시피┃이기적인 스타일

<구르미 그린 달빛> 등 유명 사극 의상 제작 이진희 감독
최근 패션 브랜드 ‘하무’ 출시···한복의 선 담은 현대적인 의상
“우리 옷의 아름다운 세계에 알리고파”
지난달 26일 이진희 패션 디자이너가 '하무' 매장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옷들 앞에 서 있다. 사진 '하무' 제공
지난달 26일 이진희 패션 디자이너가 '하무' 매장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옷들 앞에 서 있다. 사진 '하무' 제공
영화 <안시성>과 <간신>. <문화방송>(MBC)의 <하얀 거탑>과 <한국방송>(KBS)의 <성균관 스캔들>과 <구르미 그린 달빛>. 이 작품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이진희(40) 의상감독이 의상 제작을 맡은 작품이다. 그가 최근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했다. ‘하무’(河舞)는 20여년간 무대 디자이너·의상감독으로 활동해 온 그가 그동안의 내공을 담아 만든 패션 브랜드다. 오직 드라마나 영화 등의 작품을 통해서만 옷을 선보여 왔던 그가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뭘까.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북촌로에 위치한 ‘하무’ 매장. 이진희 디자이너가 자신의 옷을 세상에 처음 내놓는 날이었다. ‘하무’는 ‘물의 춤’이라는 뜻. 브랜드명처럼 물이 흐르는 듯한 우아한 선을 자랑하는 항공 점퍼, 패딩 코트, 긴 바지 등 30~40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뭔가 독특하다. ‘힙’해 보이는데 어딘가 전통 한복과 닮아 보였다.

‘하무’의 항공 점퍼. ‘하무’ 제공
‘하무’의 항공 점퍼. ‘하무’ 제공

겨울용 외투에서 조선시대의 양반이 입던 저고리 소매 선이 떠오르는 식이었다. 얼핏 보면 패딩 코트 같지만, 가슴 아래 디자인은 한복의 부드러운 선을 살려 마치 양반의 도포 같아 보였다. 일반적인 패딩 코트보다 소매의 폭이 넓었다. 항공 점퍼는 옷감이 일반적인 것과 달랐다. 사극에서나 볼 법한 고급스러운 비단이었다. 배우 박보검의 팬이라면 반색할 만한 옷이었다. 왜냐하면 <한국방송>(KBS)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효명세자 역을 맡아 입었던 ‘반수포’(조선시대 왕이 걸치는 가운 형태의 전통 옷)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항공 점퍼는 박보검이 입었던 사극 의상에서 출발한 디자인이다.

영화 <안시성>의 주인공 조인성. <한겨레> 자료 사진
영화 <안시성>의 주인공 조인성. <한겨레> 자료 사진

이씨가 디자인한 바지도 예사롭지 않다. 단추나 지퍼가 없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입었던 옷처럼 끈으로만 연결돼 있어 어떤 체형에도 잘 맞는다. 그는 “조선시대의 양반이 입었던 단속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옷의 질감도 지금 사람들이 입는 바지와는 차별성을 뒀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옷은 그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20여 년간 사극이나 현대물 드라마의 의상을 담당했던 이다. 그의 옷엔 반수포를 입었던 박보검과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송중기와 유아인의 태가 스며들어 있다.

이미 드라마 의상 감독으로 유명한 그가 경쟁이 치열한 패션계에 출사표를 왜 던졌을까? 이씨는 의상감독으로 유명해질수록 마음의 갈증은 커졌다고 한다. “배우가 입는 한복을 제작할수록 한복만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한복의 장점이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모른다”면서 실제 그런 한복을 파는 곳도 적어 늘 안타까운 마음이 많았다고 한다.

“‘생활 한복’이라는 이름의 변형된 한복은 있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입는 옷’이라는 편견이 있다. 생활 속에서도 누구나 멋스럽게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하무를 만든 이유다. 포부도 크다. “한복의 세계화, 현대화에 앞장서서 우리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출연한 송중기. <한겨레> 자료 사진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출연한 송중기. <한겨레> 자료 사진

하무는 성별이나 치수 표기가 따로 없는 것도 특징이다. 이씨는 “지나치게 마른 모델들이 입고 선보이는 여성복은 실제 입어보면 불편하다. 반면 한복은 입으면 넉넉하고 편안하면서도 입는 사람의 맵시를 살려준다”고 말한다. 강요된 치수를 찾아 입지 않아도 맵시가 나는데 굳이 서양 옷처럼 치수 표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말한다. “치수가 정해진 게 아니기에 10대 청년부터 60대까지 누구나 입을 수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디자인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을 무엇일까? “원단은 옷의 시작이자 끝”이라며 “한국의 전통 원단은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서 격이 높다”고 말한다. 경남 진주의 실크, 경북 안동의 마 등을 주로 쓴다고 한다. “그런 원단에 자수 등을 해 넣으면 소박하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난다.” 그의 원단에 대한 고집은 <성균관 스캔들> 제작에 참여했을 때부터였다. 그저 짧은 시간 촬영하면 그만인 옷이다. 하지만 그는 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원하는 원단을 구하러 다녔다. 그런 노력으로 탄생한 의상은 인기가 바다를 건너갔다. 드라마를 본 해외 팬들이 구입 문의가 들어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 박보검. <한겨레> 자료 사진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 박보검. <한겨레> 자료 사진

유명한 배우들과 작업을 많이 한 그. 에피소드가 적을 리 없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출연한 배우 박보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통 배우는 주어진 의상만을 입는데 박보검은 달랐다. 의상 제작을 앞두고 아이디어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는데 박 배우가 찾아와 의견을 줬다.” 그 결과 국내산 실크의 한 종류인 칠색단(7개의 색실을 사용한 실크)을 원단으로 한 반수포가 탄생됐다. 주인공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성정이 의상을 통해 표현된 사례다.

본래 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그는 졸업하고 주로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2000년대 초반 체코의 한 박물관에 갔다가 인생이 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의 옷이 전시되어 있었다. 군복에 묻어 있는 흙 등에서 그 사람의 인생과 당시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옷 한 벌에도 역사와 개인을 한편의 ‘시’처럼 담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드라마 등의 의상 제작을 의뢰받으면 그가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매장도 경북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북촌으로 정했다. 북촌은 궁궐로 둘러싸인 한국 문화의 메카다. 이씨는 “북촌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면 “그들에게 한국의 정체성을 담은 옷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말했다.

‘하무’ 매장. ‘하무’ 제공
‘하무’ 매장. ‘하무’ 제공

무대·의상감독은 필연적으로 문화를 무대에 축약해 올리는 ‘구현력’과 다양한 작품에서 표현해 내온 ‘역사적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두 가지의 길을 걸어본 이진희 디자이너가 이제는 이곳 북촌에서 한국의 전통 문화를 정성껏 자기만의 옷에 담아 무대에 올렸다.

이날 매장 한쪽에선 전통악기 연주 그룹인 ‘탈각고’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불교의 ‘종’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들이 제작한 창작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옛 음악과 이진희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춤을 췄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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