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26살 여자입니다. 주로 짝사랑을 하다가 상대 남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해서 사귀는 편입니다. 그러다 대학원생이었던 25살 때 우리 과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남자 네 명 중 두 명의 오빠(A와 B)와 유독 친해졌어요. 우리 셋은 밤마다 함께 야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관계가 됐죠.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이 없던 제게 이런 관계는 굉장히 특별했습니다. 정말 좋았고 행복했어요. 남자인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게요. 그러다가 저는 점점 둘 모두에게 이성으로 호감을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 A가 유독 저에게 굉장히 잘해줬습니다. 어느 순간 B와 있는 걸 질투하고, 맛집을 검색해서 같이 가자고 하고, 영화도 보여줬어요. 술집도 일일이 검색해서 같이 가자고 했지요. 예전의 연애에선 제게 그런 노력을 하는 상대가 없었기에, 저는 A의 행동이 정말 기뻤어요. 그의 노력하는 모습에 제 호감까지 겹쳐 우리는 연인 관계로 발전했지요. 남자친구가 된 A는 처음엔 굉장히 잘해줬어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 배려하고, 제 말에 귀기울여줬죠. 하지만 남자친구에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지요. 질투가 굉장히 심한 A는 제가 B에게 웃어 주거나 얘기에 맞장구쳐주면 정말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래서 저는 B와 점점 멀어졌어요. 그는 제 옷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면 갈아입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관계’를 할 때도 자기가 원하는 ‘자세’로만 사랑을 나눠야 했어요. 거의 모든 면에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이 있었어요. 그 방식대로 안 되면 그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기분이 나빠지는 게 보이니까, 저는 ‘그래, 그냥 맞춰주자’는 마음으로 지냈어요. 거의 모든 면에서 맞추며 지냈죠.
사귀기 전에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저와 영화도 보고 맛집도 가는 등 노력하는 면이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사귄 후에는 데이트 비용을 아까워하는 겁니다. 6개월 사귀는 동안 외식한 날도 손에 꼽아요. 제가 데이트 비용을 거의 냈죠. 전처럼 집착하던 모습도 없어졌고, 자신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겁니다. 점점 달라지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 사람이 저를 사랑하는지 의심스럽고 점점 후회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몇 번 제가 "오빠가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외롭다"했더니 헤어지자는 것이냐면서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 크게 싸운 날 우리는 헤어졌어요. 당시 제가 물었죠. “다른 남자 특히 B와 잘 지내고 웃어줘도 괜찮겠느냐.” A는 이제 헤어지는 것이니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허탈했어요.
그러다가 서먹해진 B에게 연락해서 오랜만에 함께 술도 마시고 영화도 봤어요. B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A와 사귄 게 후회가 됐어요. B와 사귀었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그날 우리 둘은 제 자취방까지 가서 술을 먹게 됐고 함께 잤어요. 그 이후에도 몇 번 ‘관계’를 가지면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했지요. 그래서 B에게 제가 사귀자고 했더니, 그는 친구의 전 여자친구와 사귈 자신은 없다면서 “너는 A에게 미안하지 않냐”는 겁니다. 그 대화를 계기로 연락이 끊겼고, 한 달 뒤 다른 여자와 손잡고 가는 B를 우연히 봤어요. 알고 보니 저와 그러는 동안 그 여자와도 ‘썸’타는 단계였더라고요. 두 남자 모두 가끔 마주치는데, 볼 때마다 화가 납니다. A도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고요. 저만 바보가 된 거 같아요. 제가 문제였던 걸까요?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부끄럽고, 화나고 복잡한 감정입니다. 다시 연애를 시작해도 누구를 100% 좋아하지 못할 거 같아요.
바보가 돼버린 것 같은 여자
A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지요. 당신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인간적인 호감이 있고 밤마다 야식과 술을 먹는 관계라서, 친한 '남사친'이라서 재밌고 좋은 건 당연하지만,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여자로서도 관심 받고 싶다'는 감정이 생겼을 겁니다. 말씀하셨듯이 둘 다 모두에게요. 하지만 그렇게 애매한 감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유독 잘해주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꼬였던 것 같습니다. 이전에 연애에서 나에게 노력하는 상대가 없었다는 이유로, 당신은 사실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감지덕지했던 것이죠. 사소한 것 하나하나 챙겨주는 것이 애인에게 기대하는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맛집, 술집 검색하는 것을 가지고 애정을 가늠하다니요. 그건 그냥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 사이에서도 하는 기능적인 일이 아닌가요? 나와 사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는 것과, 의미를 두기에는 참 당연하고 별 것 아닌 일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거기까지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칩시다. 당신의 가장 큰 잘못은 그가 애인으로서 중대한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관계에서 스스로 나오지 않은 데에 있어요.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질투가 심했던, 그런 정도의 남자도 못 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당신을 통제하려고 하고, 이기적으로 구는 아주 이상한 남자였을 뿐이죠.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기분이 나빠지면 '아 이 사람은 이상하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당장 그 관계를 끝내야지, '그냥 맞춰주자'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 사람은 이상하구나'라는 알아차림이 일어나지 않고, 말하자면 당신의 기본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발동되지 않고 '그냥 맞춰주자'로 생각이 점프해 버린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 사랑하니까 그랬네'라고 쉽게 말해버리고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 그냥 사귀라'고 말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하향평준화 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사랑이 원래 그런 거라며 당신의 삶이 망가지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상한 사람에게 당신을 허락한 그 마음을 돌아보아야 할 때라는 겁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감이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감정'으로 보았습니다. 저도 열등감이 있고, 당신에게도 다른 종류의 열등감이 존재하겠지요. 그런데 성장 과정에서 양육자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했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 만나는 사람과 건강한 애착관계를 만드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흔합니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어'라는 생각보다는 '나는 사랑받기 힘들 거야'라는 생각, 즉 관계에서의 열등감이 마음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내가 고르는 사람조차 불안정한 내면의 소유자일 때가 많죠. 그리고 내가 상대를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냥 나를 좋다고 해주는 사람을 찾는 데에 온 안테나를 맞춥니다, 그러고 나서 '오 나를 좋아해주다니! 이제 제가 다 맞출게요'라는 태도로 흘러갑니다. A와 끝나고 곧장 B에게 향했던 당신의 행동이 이 모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채우지요. 당신에게 필요했던 건 '내가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 '나를 좋다고 해줄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굳건한 믿음-나는 사랑받기 힘든 인간이야-은 당신이 두 남자와 겪었던 일련의 상황처럼 '부끄럽고, 화나고,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센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쉽게 자각하기 힘듭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 열심히 하고, 돈 잘 버는 사람으로 잘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시간이 꽤 지났지만 계속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고 하셨죠. 당신의 깊은 내면은 이미 느끼고 있는 겁니다. 관계에 대해 이런 식의 자세를 가지고 살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요. 따뜻한 관심이 고프고 늘 감정적으로 허기져있던 당신도 존재하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당신도 존재하기 때문이죠. 당신은 바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바보처럼 굴었다는 걸 깨닫기 직전일 뿐입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세요. 방법은 스스로 찾는 것이고, 선택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도 하나 묻고 싶네요. 누구를 꼭 100% 좋아해야 하나요? 아니, 꼭 연애를 해야 하나요? 좋은 남자를 만난다고 달라지는 것이 삶이 아니라,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애써야 달라지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곽정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