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나이’란 참 이상하다. 시간이 흐르며 나이 먹는 건 어쩔 수 없는데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너 내일모레면 벌써 서른이다’라는 어른들의 핀잔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너 내일 모레면 마흔이다’라는 말을 듣게 생겼다. 2019년이면 ‘내일모레 마흔’인 사람들이 지난 14일 오후 채팅방에 모여들었다. 내년이면 38살(한국 나이 기준)로 고양이 하모와 사는 이정연 기자와 같은 나이의 류○○(직장인)·고○○(작가)·박○○(음악가)의 수다가 시작됐다.
‘마흔이 별 거야?’라며 객기를 부려본다. 그런데 별 거 맞다. 마흔을 대하는 태도가 덤덤하든, 그렇지 않든 ‘별 거 맞다.’
이정연(이하 이) 마흔이라는 나이, 생각해 본 적 있나?
고○○(이하 고) 27살부터 서른에 대해 계속 생각했는데, 마흔도 37살부터 계속 생각했다. ‘7’이 달리면서 급격히 인생의 후반부라는 느낌이어서, 이미 심적으로는 마흔에 가깝다. 그냥 지금이 마흔인 느낌이다.
류○○(이하 류) 예전엔 마흔이 참 많은 나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직도 크게 실감 나지 않는다. 막막하고 닫혀있는 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30대가 되었을 때처럼 막상 지나고 나면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들 것 같지만.
고 처음에 마흔을 떠올렸을 때는 굉장히 조급했다. 인생 제대로 살고 있나 불안했고. 마흔을 불혹(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이라고 하는데, 무슨 개소리인가 싶더라. 도처에 이렇게 유혹이 많은 데 무슨 놈의 불혹이야 싶다. 술도 더 마시고 싶고, 클럽도 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다!
박○○(이하 박) 이제부터라도 개판치지 말고 인생을 좀 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기도 한다.
고 (웃음) 나도 그렇다. 의지를 좀 다지게 되더라.
류 늙었다는 생각은 잘 안 든다. 그렇지만 나이에 비해 쌓아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모터바이크를 탄 지 3년 됐는데, 나이 먹기 전에 이것저것 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그 즈음부터 생겼다.
40대, 인생의 어떤 변곡점인 시기라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기웃거리기를 그만두거나, 기웃거리기를 시작하거나. 누가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고민의 결에는 교차점이 있다.
박 이제 내가 바라는 환경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쓸 데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일이 많이 줄었다.
고 나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좀 더 분명히 구분하게 되더라. 낭비하는 에너지를 줄이려고 하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두고도 ‘이런 영화는 봐봤자 감흥이 없을 텐데 시간 아까우니 보지 말자’, 이렇게 되더라. 예전에는 ‘혹시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일단은 보긴 봤었다.
이 나는 사람에 대해 기웃거리는 게 많이 줄었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 친구들만으로도 평온하게 재미있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류 나는 반대이다. 여태 일에 있어서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최근 회의가 많이 든다. 뭘 해야 좀 더 즐겁고 오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더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20, 30대 위주로 형성된 문화인데 그걸 계속 따라갈 수 있을까 고민도 많다.
박 ‘뭘 해야 좀 더 즐겁고 오래할 수 있을까 싶어’라는 고민, 완전히 공감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욕구불만 덩어리 같은 모습이 많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요즘엔 뭔가 요령껏 힘 빼고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춤을 추더라도 미친 듯이 부서져라 추는 게 아니라 살랑살랑 오래 갈 수 있도록 체력 안배를 해가며 춤을 춘다고 할까?
딱히 염두에 두고 살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40대를 앞두고 인생의 화두가 되는 열쇳말이 있다. 바로 ‘건강’이다. 살아 온대로 건강 성적표를 받기 마련. 그래도 발버둥 쳐본다. 벼락치기 건강 챙기기로 해결되지 않을 걸 분명히 아는데도 뒤늦은 도전에 나서본다.
박 올해 여름 통풍 진단을 받았다. 벌써 약봉지 하나를 달고 산다.
고 난 사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일할 때 빼놓고는 병원 다니는 게 일이다. 요즘은 치아까지 안 좋다. 마흔에 더 심해질까 걱정이다.
이 혈액순환이나 관절, 임플란트 등의 정보를 예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요즘엔 유심히 본다.(웃음)
박 건강을 위해서 술도 ‘힘을 빼고’ 먹는다. 연일 마셨었는데 요즘은 간격을 좀 두고 마시게 되고, 술은 적게 안주는 맛있는 거로 챙겨 먹는다. 술 종류도 예전에 소주, 맥주 위주로 마셨는데 요즘엔 하수오주 같은 약주로 대체했다.
이 술을 끊을 생각은 안 하고, 건강하게 마시기로 결심했나 보다. ‘건강한 술’이라는 게 말이 되나!(웃음)
고 스트레칭, 절주, 영양제 챙겨먹기 정도가 건강을 위해 챙기는 것들이다. 성인 아토피까지 생겨서 먹는 음식도 신경 쓴다. 원래 라면 좋아하고, 군것질도 좋아했는데….이런 게 마흔의 징후인가!
류 2년 전부터 애써 외면하던 영양제들 조금씩 챙겨 먹는다. 운동을 했었는데 일이 바빠 반년 쯤 쉬고 있다. 술은 원래 거의 안 마셨는데, 지난해부터 위스키나 와인을 가끔 찾아 마시고 있다. 이건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경험을 위해서.(웃음) 더 늦기 전에 30대에 할 만한 경험 해보고 싶다.
박 운동을 잘 안하는데, 올해 따릉이(서울시 공유자전거 브랜드) 정기권 끊어서 타고 다녔다. 건강해져서 더 알차게 놀고 싶다.(웃음)
고 노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틈틈이 잘 놀아보겠다 결심했다.
‘중년’이라는 말에 담긴 이미지는 도무지 달갑지가 않다. ‘아차!’하면 ‘아재’,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본래 ‘중년’이라는 말 자체에 밉상인 이미지는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중년’을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또는 그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 중년은 마흔 안팎의 나이을 일컫는 말이다. 마흔에 대한 다른 표현은 별 감정이 안 드는데, 이 중년이라는 단어는 유독 멀리하고 싶더라.
박 ‘중년 남성’때문에 그러는 건가?(웃음)
류 그래도 ‘영 포티’(젊게 살고 싶어 하는 40대를 일컫는 말)라는 말보다는 중년이 낫다.
이 나도 그 말이 제일 싫긴 하다.(웃음) 젊은 40대라면 좋겠지만, 젊어지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40대는 좀 추해 보인다.
고 (웃음) 저도 ‘극혐’(극한 혐오)하는 말이다. 영 포티!
‘젊음’이 최고고, ‘나이 듦’이 최악이던 시대가 지났다. ‘더 젊게 살자!’라고 주장하기보다는 느는 주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시대다. <마흔에 관하여> 같은 책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다.
류 중년이라는 이미지도 싫지만, 그 나이가 사회적인 포지션(위치)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고 밖으로 표출해 내면 젊음을 강조하는 ‘영 포티’를 내세우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굳이 ‘젊다’는 티는 내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박 마흔 하면 원래 ‘아저씨’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주변 친구들을 둘러봐도 그렇고. 크게 의식 안 하고 ‘40살인데 뭐 어쩌란 말이냐’하며 그냥 살던 대로 살자고 한다.
고 요즘 나이 계산법은 다르다고들 한다. 원래 나이에 0.7을 곱해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예전 서른과 요즘 서른이 다른 것처럼 마흔도 예전 마흔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 그 계산법으로 치면 우리 나이가 20대 후반이다. 그런데 또 딱히 20대 후반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웃음)
류 중년에 들어서면 행동에 나잇값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는 시기이기도 할 텐데, 그 부분을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후배들 사이에서 덜 나대면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고 20대 때를 돌이켜보면 40대 누군가가 ‘투머치 토커’(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면 그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말을 많이 안하려고 한다.
박 난 오히려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모르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
나이가 든다 해도 바뀌지 않을 게 분명히 많다. 그러나 희망과 기대를 놓기엔 40대는 아직 충분히 늙었다 할 수 없다. 덜 일하고 더 받는 삶,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어린 자녀와도 행복한 삶을 바라본다.
이 마흔 되면, 앞으로 뭐든 좀 달라졌으면 하는 것들이 있나?
류 개인적으로는 어서 삶의 다음 방향을 찾고 싶고, 환경면에서는 지금 일하는 곳이 좀 덜 일하고 더 받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업무 시간은 적으면서 삶의 질은 더 높은 곳들이 많지 않나. 유럽 어느 나라의 관공서 일처리가 느리다 엉망이다 말하지만, 반면에 그 정도로 일해도 살 만하다는 뜻도 되니까.
이 고○○씨는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있는 마흔의 삶은 결이 또 다를 것 같다.
고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 많이 한다. 아이를 키우는 환경을 생각해도 한국은 ‘헬’(지옥)이고.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엄마가 학교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많다던데 걱정이다.
이 나는 이제 출산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마흔 넘으면 노산이라고 하는데 자신 없다.
박 나도 회의적이다.
류 나도 결혼과 출산은 전혀 계획이 없다.
고 주변에 비혼이거나 결혼했더라도 아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날 보며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시 아이는 낳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더라.(웃음) 50살 넘은 딩크족 중에는 부러워하는 이가 있긴 하더라.
이 나는 꼭 바뀌었으면 하는 게 ‘생활동반자법’(혈연관계 아닌 동거가족도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법)이 도입됐으면 하는 거다. 요즘 에이(A)형 독감에 쓰러지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혼자 응급실에라도 실려 갈 생각을 하면 겁이 난다.
마흔을 앞두고 꿈을 꾼다. 거창한 꿈도, 소소한 꿈도 좋다. 꿈을 꾸는 데는 돈이 들지 않으니까. 인생 후반전의 설렘은 여전히 꿈에서 출발한다.
박 나는 음악을 하다 보니 더 이상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을 때 좀 우울하더라. 그런데 예전에는 자책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그냥 조금씩 수정해가고, 공연 한 번에 더 감사하고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보니 우울한 기분이 좀 없어졌다. 별거 아니지만, 손버릇 때문에 항상 똑같이 기타 연주하던 걸 조금 바꿔 해보고 난 뒤 ‘좀 좋아졌네?’하는 생각이 들면 기분도 좋아지곤 한다. 이렇게 작은 것에 즐거움을 느낄 때 행복해진다. 내일모레 마흔이어도 참 괜찮다 싶은 변화다.
류 마흔이 되면 모터바이크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겠다는 꿈이 있다. 지난해부터 생각해오던 마흔살 프로젝트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터키를 거쳐 영국 같은 곳을 가보고 싶다.
고 마흔의 꿈이라기보단, 설레는 지점이 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려놓는 게 많아지니 마음이 더 편해질 거라 기대하곤 한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설렘. 편안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또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기다려진다.
이 꿈이 있기는 있다. 요즘 꿈에 자꾸 이상형의 배우가 출연한다. 이건 정말 꿈 이야기가 돼버렸는데, 꿈속에서처럼 연애를 하고 싶다.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고 싶다. 꿈이 너무 큰가?(웃음)
진행·정리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마흔 40살. 공자는 40살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며 ‘불혹’이라 일컬었다. 40살 안팎의 사람을 ‘중년’이라고도 한다. 정여울 작가는 <마흔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마흔은 멀리서 그저 아련히 반짝이기만 했던 삶의 숨은 가능성들이 이제야 그 빛을 발하는 시기다’라고 한다. 설렘과 불안 사이 어디엔가 선 사람들, 마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