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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관계란 설득과 설명으로 유지할 수 없어요”

등록 2019-02-13 19:43수정 2019-02-13 20:03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몇 번의 다툼 뒤 헤어지자는 여자친구
노력하고 변하는 모습 보여줘도 마음 돌리지 않아
멀어져만 가는 그녀, 내 감정은 식지 않고 커져만 가
A. 힘들었다는 상대방에게 설명과 설득만 반복
다양한 유형의 자아 오가며 유연한 태도 보이는 게 중요
관계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먼저 돌아보길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Q 전 35살의 남자입니다. 여자친구는 31살로, ‘돌싱’(돌아온 싱글)입니다. 아이도 있습니다. 만난 지 5달이 됐는데 지금은 약간 어색한 사이로 관계를 유지 중이죠. 답답한 일은 몇 주 전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사내 커플입니다. 정말이지 만나서 첫 한 달 간은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다 사귄 지 60일 조금 넘는 시점에 크게 싸웠어요. 사적인 일이 아닌 공적인 회사 문제로요. 그날 퇴근준비를 끝낸 후 여자친구의 자리로 갔죠. 그리고 “오늘 많이 힘들었지”하며 토닥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자친구는 “벌써 퇴근준비를 다했느냐”고 저에게 묻더군요. 전 다 했으니 같이 퇴근하자고 했습니다. 여자친구는 일이 내내 많았는데 아직도 남았다면서 “도와줄 것 없냐고 물어봐 주지도 않고 이렇게 퇴근 준비를 해서 왔느냐”며 투덜거리더군요. 전 “몰랐다. 나도 내 업무가 오늘 하루 너무 벅차서 챙길 겨를이 없었다”라고 했더니, “그게 지금 할 말이냐”며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몰아 세웠죠.

전 너무 화가 나서 “나도 일이 많아 힘들었지만, 끝내고 왔는데 네 일까지 꼭 도와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몰아세우면 어떻게 하느냐. 도와주지 않아 섭섭하고 투정부릴 수 있지만, 이렇게까지 화내고 몰아세울 일은 아닌 거 같다. 연인이지만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여자친구는 울면서 그만 이야기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같이 퇴근해서 “서로 미안하다”면서 사과하고 데이트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은 또 더할 나위 없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지냈어요. 그러다 똑같은 문제로 한 번 더 크게 싸웠지만 또 화해하고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 여자친구가 대학교 동아리 모임이 있어 보내고 혼자 퇴근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건 싸우기 전에 미리 이야기한 약속이라 보내줬죠. 하지만 쿨하게 보내주지는 못했습니다. 금요일에 떠나 다음날 돌아온다고 해서 몇 마디 하며 보내줬죠.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빨리 오면 안 되냐. 혹시 안 갈 수는 없냐.” 구시렁거리다가 보내줬죠. 여자친구는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고, 전 보고 싶었다며 달려가서 안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피하더군요. 피곤한가 보다 하고 넘어갔어요. 그리고 그날도 ‘뜨밤’(뜨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 사랑한다고 속삭이더군요.

하지만 바로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걸 느꼈습니다. 이상해서 “무슨 할 말이 있느냐”라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같은 문제로 자주 싸우고 힘들다면 헤어지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싸운 건 맞지만, 화해를 잘했고 조금 전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녀니까요. 전 설득하려고 무수한 말을 했죠. 그리고 우리가 싸웠던 그 문제라면 “내가 달라지겠다. 노력해보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공감은 하지만, 간절히 변하고자 한다면 변할 수도 있다고 전 말했죠. 그리고 전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자 엄청나게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더군요. “노력하고 변해가는 게 보이고 느껴지지만, 안 되겠다. 헤어지자”라고 말이죠. 전 납득할 수 없었어요. 여자친구가 예전에 했던 말을 꺼냈죠. “티격태격 싸우지만 알콩달콩 지낸 적도 많으니 오래오래 사랑하자고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 말처럼 지내오지 않았느냐. 왜 자꾸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일주일간 아무것도 정하지 말고 서로 노력해보자고 하더군요. 전 노력했는데, 일주일이 지나서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전 “노력했는데 왜 답은 똑같은 거냐. 이 문제 말고 진심으로 다른 문제도 있는 거 같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는 거냐”고 물어봤죠. 그런 건 아니라면서 그동안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하더군요.

회사 일에 과부하가 걸렸는데, 엄마 역할도 하고 저도 신경 쓰면서 여자친구 역할까지 하려니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말이죠. “그런 문제라면 과부하일 때 나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아이에게 신경 쓰는 부분은 내가 서운해 하거나 나도 챙겨달라고 한 적 없지 않으냐. 과부하 걸린 업무에 집중해라. 내가 그냥 업무에 지쳤을 때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겠다. 꼭 하나를 놓아야만 힘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냐. 그 놓는 대상이 꼭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냐”라고 울며 말했죠. 여자친구는 놓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며 말했어요. 전 다시 생각해보라면서 대화를 마쳤어요. 지금 어색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힘들다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싶다면서 약속을 만들어 가더군요. 전 아무런 군소리 없이 보내주고 있어요. 그녀는 새벽에 귀가하는 일 잦아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전 감정이 식지 않았는데, 도리어 너무 커지고 있는데 말이죠.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정이 식지 않은 남자

A 당신은 굉장히 설명과 설득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네요.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날, 당신의 이런 성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죠. 오늘 많이 힘들었느냐고 물으며 토닥여 주었는데 투덜거리고 나에게 어깃장을 놓기까지 하는 여자친구에게, 당신은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완벽한 자기변호의 말들을 쏟아냅니다. 당신이 했던 말 중에 사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잘못한 것이 없는 것’과 ‘잘한 것’이 늘 같지는 않다는 게 문제죠. 여자친구가 잘했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유독 힘들고 지친 날, 정말 아이처럼 주저앉아 울고 싶을 만큼 힘든 날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그런 날은 가까운 사람에게 괜히 심술도 부리고, 양껏 투정도 부리고 싶어지고 그러잖아요. 여자친구는 당신에게 딱히 말하기도 모호한 그런 일 때문에 속 썩었던 날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도 업무가 산더미인데 집에 돌아가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을 처리할 생각에 괴로웠을 수도 있죠. 그저 뭔가 다 엉망진창처럼 느껴졌던 그날 그 순간, 당신 앞에서 잠시 아이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은 잠시 토닥여 주는 듯하더니, 그 뒤로는 그 토닥여 주는 태도를 완벽히 거뒀어요. 그녀가 ‘그게 지금 할 말이야?’라고 당신에게 원망을 추가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거죠. 바로 이 순간을, 여자친구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래저래 힘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짜증과 원망을 털어놓았는데, 잠시 토닥여 주던 내 남자친구가 소리 높여서 나의 행동을 맹비난한다면 말이에요. 아마도 여자친구는, 한편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도 했겠지만 당신에 대해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좋을 때 좋은 사람이야 많지만, 안 좋을 때도 나쁘지 않을 사람은 자주 보기 힘들죠. 당신의 논리는 완벽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당신을 더는 ‘안전하거나 기댈 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거란 이야깁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았겠지만, 여기엔 제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심리학 지식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이 갈등의 핵심은 심리학의 ‘교류분석’이라는 틀로 설명할 수 있어요. 교류분석에서는 사람이 가진 자아가 부모 자아, 어른 자아, 아이 자아로 나뉜다고 설명해요. 부모 자아는 꾸짖고 설명하는 경향(비판적인 부모 자아) 혹은 너그럽고 타인을 돌보는 경향(양육적인 부모 자아)으로 나뉘고, 아이 자아는 사회적인 요구에 순응하는 경향(순응하는 아이 자아)과 천진난만하고 자유로운 감정표현을 하는 경향(자유로운 어린이 자아) 등으로 나뉘죠. 교류분석에서는 사람은 다양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다양한 자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람직한데, 어떤 한 자아의 경향에만 머물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해요.

다양한 상황으로 짐작해보건대 당신은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비판적인 부모 자아’의 역할에 몰입한 것처럼 보여요. 여자친구가 투덜거리는 것에 대해 조금 달래주는 듯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공과 사까지 운운하며 상대에게 옳고 바름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대표적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외출해야 할 때 ‘보내주었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여자친구가 힘들다고 할 때도 설득을 거듭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했다는 것이 그 증거에요. 인생은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 때문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네 살이라도 많기 때문일까요? 여자친구 앞에서 당신은 언제나 강하고 공정한 어버이의 모습으로 존재하려고 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교류분석이라는 틀에서 보면, 여자친구는 그날 그저 ‘자유로운 어린이 자아’로서 당신 앞에 존재하고 싶어 했어요. 보통의 경우, 엄마로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부모 자아와 어른 자아 사이를 왕복했겠지만, 너무 힘든 날은 당신에게 ‘양육적인 부모 자아’를 기대했던 거겠죠. 당신과 여자친구의 관계는, ‘뜨거운 밤’이나 ‘사랑한다는 말’이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설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두 사람이 관계에 있어 보여주는 자신의 성향과 그로 인한 역학관계가 존재하기에, 싸움은 필연적이었으며 이별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처음에 관계가 좋을 때는 이런 부정적 역학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우울감에 빠질 만한 상황이 있을 때, 사소한 오해가 누적되었을 때 비로소 둘의 관계는 안 좋은 쪽으로 급물살을 타게 되지요.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저는 먼저 당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뭔가 가르치고, 이끌고, 내 뜻을 관철하는 식으로만 지낸다면 그것은 관계보다 당신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에요. 때론 천진난만한 아이도 되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힘듦과 슬픔을 따스하게 받아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상의하는 다양한 역할을 오가야 당신의 인생도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변화 없이는 당신의 식지 않은 감정은 갈 곳을 잃고 말겠죠. 기억하세요. 관계란 설득과 설명으로 유지하지 않습니다. 나를 깊이 성찰하고, 상대에 깊이 공감해주는 노력으로 유지하는 것이겠죠.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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