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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등록 2019-03-27 19:54수정 2019-04-16 18:31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입원했는데도 찾아오지 않던 그
참다가 폭발해 문자로 이별 통보
‘이기적’이라는 그의 말에 또 상처받아
A. 상대방이 떠나는 두려움이 컸을 것
‘미안하다’는 말 듣는 게 진정한 욕구였을까
이제 ‘싫어’라고 말하는 법을 익힐 때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Q 저는 20대 끝자락에 서 있는,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3살 많은 그 사람과 처음 만난 때는 재작년 가을이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는 모습을 정말 좋게 봤고, 그 사람 역시 제가 또래보다 소신 있는 모습에 끌렸다고 합니다. 참 행복했지만, 제겐 말 못 할 고충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안정적인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었고, 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퇴사한 뒤 웹 소설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제 선택은 무모했지만, 자신 있었죠. 하지만 무지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어요. 친구 만나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남자친구에게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야만 했고, 늘 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그를 보며 자존감이 떨어졌어요. 그러나 절대 티 내지 않았어요. 그사이 저는 외로워졌습니다. 그는 저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늘 친구와 함께였거든요. 성향이 다르겠거니 싶어 그냥 참았지만요. 건강도 잃어 병원 신세도 지었어요. 입원한 날 그는 찾아오겠다고 하고는 결국 회식이 있다며 오지 않았습니다. 절대 섭섭하거나 서운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음날은 좀 섭섭했죠. 혼자 퇴원했는데, 그는 친구와 술을 마셨다고 했어요.

그 순간 모든 게 터졌습니다.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고, 스스로 하찮게 느껴졌어요. 말도 직접 못 하고 ‘지역에 계신 부모님께 가 있을 거야’라고 문자를 보낸 뒤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문자로 헤어지자고 한 건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나 하나 그의 곁에 없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죠. 그래서 예의를 지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기적일지 모르지만, 저부터 살아야 했거든요.

많이 좋아하는 감정을 가진 채 매끄럽지 못한 이별을 해서 그런지 신경이 쓰였습니다. 여러 가지가 정리되어 서울에 간다면 그때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저는 연락하지 못했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게다가 그도 헤어지던 날, ‘만나서 말하자’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건강과 경제 여건 등의 상황이 많이 좋아지고 나서야 고민 끝에 그에게 연락했습니다. 더는 힘들어하지 않고,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그에게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했습니다. 그땐 내가 참 상황이 좋지 못했고,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전했죠. 그러나 그는 이기적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고, 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상처를 받은 채 뒤로 물러났습니다.

아직도 먹먹하고 마음이 아파요. 3달 한 짧은 연애지만, 3년 연애하고 헤어졌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모든 면에서 제 이상형이었기에 더 아쉬움이 남아서 힘든 걸까요? 지금은 무던해지는 중입니다. 그 남자에게 (병원 일 등에 관해)‘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들었다면 정리하기 참 쉬웠을 텐데요.

친구들은 열이면 열 “좋은 남자가 아닌데 그를 만나 무슨 말이 듣고 싶었느냐”며 질책합니다. 그래서 더 말 못 할 고민이 됐어요. 이제 와 그 사람과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던 그때의 내가 그립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여자

A 사랑의 정의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기에,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와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의가 각자 다르다고 해도, 사랑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편안한 교류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와 사귀면서 분명 행복하긴 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불행함을 느꼈어요. 그리고 불편했지요. 단순히 두 사람의 처지나 성향이 달라서가 아니에요. 당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에게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티 내지 않았고, 참았다’고 표현했고, 그 과정에서 당신은 그에 대한 원망을 조금씩 쌓아갔을 겁니다.

어쩌면 아쉬운 소리를 하고 불만을 말하면 ‘상대방이 떠나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언제나 웃는 모습만 보이려고 하다가는 입 주변에 경련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그에게 싫은 소리를 아예 하지 않으려는 당신의 어떤 노력은 결국 관계에 긴장을 쌓았던 것 같아요. 마음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던 긴장감과 불만은, 결국 퇴원 날 터져 버리고 말았죠.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억압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터져 버린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 순간까지도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싫은 소리를 해서 그가 떠나가는 것보다, 그냥 도망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는 그 순간 어떻게든 달아나고 싶었던 걸까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도망쳐버린 결과는 그렇게 좋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별의 모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관계는 그렇게 끝나 버렸으니까요.

당신은 말했습니다.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던 그때가 그립다’, ‘그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요. 하지만 당신에게 이토록 선명한 상처로 남은 일에 대해, 당신의 통찰이 고작 거기까지만 머무르는 것은 좀 많이 아쉬운 일이 아닙니까?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어요. 그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기회를 애초에 계속 차 버렸던 건 당신이고요. 다시 물읍시다, 그것이 당신의 진정한 욕구가 맞습니까? 이제는 불가능한 일들을 선택지로 정해 놓고, 정말 중요한 당신 인생의 과제를 덮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당신의 인생은 지금 당신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 태도를 계속 갖고 살 것인지를, 타인이 내게 관심을 덜 가지는 것 때문에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이 태도를 계속 갖고 살길 원하는지를 말입니다. 당신은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지나가 버린 연애가 당신에게 건네는 커다란 삶의 질문을 외면하고 있는 것뿐이죠. 하나의 사건이 내 삶에 건네는 화두를 외면할 때, 우리는 그저 그런 넋두리와 후회감에 젖어드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런 성향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싫어”라고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그래도 버림받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가 온 것이고요.

나는 당신이 다음번에 만나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울하고 슬픈 모습도 때때로 드러내고, 친구 좀 그만 만나고 나 좀 만나라며 툴툴거리기도 하고, 퇴원한 날 어떻게 안 찾아올 수가 있느냐고 고래고래 역정을 내는 그런 연애를 하기 바랍니다. 역정을 내도 이해받을 수 있는 편안한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만 저는 또한 진심으로 바랍니다. 애인이 건강을 잃어 입원하고 퇴원할 땐 정말 급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닌 한, 옆에서 손 꼭 잡아주고 수속도 도와주는 그런 사람하고 연애하시기를 말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따뜻하고 또한 관대해질 때, 당신도 당신에게 따뜻하고 관대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안정적이고 따뜻한 연애를 하기 바라면서, 사실은 곁을 제대로 내어주지 않는 차가운 남자만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또한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곽정은 작가

※ 사랑, 섹스, 연애 등 상담이 필요한 분은 사연을 보내주세요. 곽정은 작가가 직접 상담해 드립니다. 보낼 곳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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