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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성인 잡지사 입사에 신난 남자친구가 불안해요

등록 2019-04-11 09:20수정 2019-04-11 20:11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인기가 많아도 너무 많은 남자친구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커져
성인 잡지사서 일할 게 용납이 안 돼

A. 2년 만나고도 불안한 마음을 돌아볼 때
통제하려는 마음이 불안을 부채질해
결국 통제할 수 있는 건 그에 대한 결정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Q 남자친구가 성인 잡지사에 입사한다고 합니다. 작가님 연재 글을 모두 정독했는데, 제 마음에 박힌 표현이 있었습니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과 동일하게 존중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2년째 만나고 있는 이 남자친구의 행복이 도저히 제 행복인 거라고 여기지 못할 일이 생겼습니다. 두 살 연상인 남자친구는 제 상사였습니다. 남자친구는 여자한테 인기가 많습니다. 당시 제가 알고 있는 연애 건수만도 여러 건이었습니다. 사내 여직원 5명 정도가 남자친구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그 중 몇몇은 공공연히 자기들이 제 남자친구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밝히거나 고백하기도 했고요.

저도 남자친구를 짝사랑하던 여느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반년가량 짝사랑하다가 어찌어찌 교제를 시작하게 됐는데, 사실 여전히 왜 제가 남자친구 눈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남자친구가 여자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그와 만나던 중에도 그 주변의 여자 지인들이 남자친구에게 대시를 해서 제 마음이 불편했던 게 몇 번이나 됩니다. 물론 그 뒤로 남자친구는 그런 여자 지인을 잘 정리해주긴 했지만요. 이제 30대인 남자친구는 본인 입으로도 여자친구가 없던 적이 없다고 했어요. 여자와의 관계를 ‘오피셜’(공식)과 ‘비(非) 오피셜’(비공식)로 나누어 만나왔다고 하더군요. ‘오피셜’로만 따지면 저는 그의 세 번째, ‘비 오피셜’까지 합치면 수십 번째입니다.

지금까지 여자들을 만나면서, 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대요. 늘 자기가 먼저 마음이 식어 헤어졌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나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식입니다. 이런 얘기들은 서로 친한 직장 선후배 사이일 때 밝혔던 거예요. 사귀고 나서 들은 건 아니지만, 계속 제 마음 한구석에 남아서 불안감을 형성했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렇게 남자친구의 ‘지나간 여자’가 될 것만 같아서요. 남자친구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불안감이 제대로 해소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이번에 남자친구가 저와 다니던 기존 회사를 그만두고, 성인 잡지사에 입사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남성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잡지사입니다. 성관계와 여성 관련 콘텐츠를 계속 다루면서, 실제 각종 분야의 유명한 여자들을 만나고, 여자 에디터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하며 온종일 보낼 남자친구를 생각하면 벌써 미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게 일이라고 해도요. 저와 남자친구 또한 일하다가 만난 사이기도 하고요. 남자친구도 믿지 못하겠고, 평소 얼마나 인기가 많은 사람인지 아니까 사실 상대 여자 동료들도 제가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잡지 자체의 방향성과 가치관도 저와는 맞지 않고요.

하지만 같은 직종에서 일하셨으니까 아시겠죠? 그런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다들 연애하고 결혼도 할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일이려니, 이해하는데 저는 왜 그게 용납이 안 될까요.

남자친구는 재미있을 것 같다며 당연히 거기서 일하고 싶어 합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네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기 많은 남자친구가 불안한 여자-


A 일단 한 가지 오해를 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과 동일하게 존중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말은 ‘그 사람의 행복이 내 행복이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무조건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을 오랫동안 기울였을 때 결국은 그런 ‘품위 있는 관계’가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두 사람의 상태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면, ‘아 그렇지는 못하구나’라고 알아차리는 지표로서 기능하는 그런 말인 셈이지요. 상대방을 위해 자기 행복의 지향점을 억지로 맞추라는 말과도 거리가 멀고요.

이 사연을 보내셨을 때, 아마도 ‘남자친구를 말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라는 고민이 가장 컸을 것 같습니다. 말리자니 너무 심한 간섭을 하는 것 같고, 그냥 허락하자니 남자친구가 자칫 바람이라도 날까 두려웠을 겁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심정이 되는 겁니다. 남자친구가 성인 잡지사에 입사하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의 삶이 당신에게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통제하고 싶어 하는 이런 삶을 계속 살 거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완벽히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가까운 사람, 사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기대대로 행동해 주길 바랍니다.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 때문이죠. 불안은 기대와 위협의 총량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고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정확히 이 지점을 자극하고 두렵게 만듭니다. 그 사람에 대해 기대도 높고,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갔을 때 내가 받을 타격도 클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수십명의 여자를 ‘비 오피셜’이라는 명목으로 만난 과거가 있고, 차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늘 차는 역할을 맡았다는 남자를 만나면서 조금도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만나는 여자로서 불안한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고르고 곁에 둔 것은 당신의 선택이 아닌가요? 2년이나 만나고도 여전히 불안해한다면 그건 이제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2년이나 만나고도 불안해하는 내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제 초점을 그 남자에게서 나로 돌려야 해요. 불안한 감정이 들었을 때 당신은 그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결정을 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살짝 호소한 것 정도이죠. (사실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그 남자의 말은 당연히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당신이 듣고 싶던 말은 겨우 그런 말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자신의 불안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끼면, 어떤 사람들은 결국 상대방을 통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관계를 결국 악화시키고 불안정하던 연애를 완전히 파괴하죠. 하필이면 그가 당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성인 잡지사에 들어가는 일이 생겨 버렸지만,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다른 부분에서 그를 통제하길 원하지 않았을까요?

불안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결국 우리를 더욱 불안한 상태로 이끄는 셈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일어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성인 잡지사에 ‘들어가고말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내가 먼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당신의 핵심 문제입니다. 하지만 연애의 냉혹하고 슬픈 지점이란 바로 이것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요? 먼저 호감을 표시하고 삶을 다 내어줄 듯 신의를 약속하던 사람도 언젠가 마음이 바뀌어 떠나갈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아무리 노력했어도 그 사람은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라고 차갑게 등 돌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타인과의 사랑은, 그 자체로 불안의 씨앗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하는 거죠. 누구를 만나든 불안이 ‘0’에 수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심리학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 혹은 통제해야만 한다’는 신념은 대표적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말합니다. 슬프지만, 우리는 불안한 감정이 드는 것 자체를 통제할 수 없어요. 다만, 불안한 감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선택할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슬프지만, 당신은 성인 잡지사에 들어가겠다는 그의 결정을 통제할 수 없어요. 다만, 그 남자에 대한 당신의 결정만은 선택할 수 있죠.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선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자,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곽정은(작가)

※ 사랑, 섹스, 연애 등 상담이 필요한 분은 사연을 보내주세요. 곽정은 작가가 직접 상담해 드립니다. 상담 내용은 <한겨레>에 게재됩니다. 보낼 곳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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