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송년회에 다녀온 친구가 전에 다니던 회사 팀장이 ‘술잔을 돌렸다’라는 얘기를 했다. 악몽 같은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소주잔을 한입에 톡 털어 넣고, 땀에 젖은 드레스 셔츠에 쓱쓱 닦아 내밀며 “한잔 마셔”라고 말하던 10년 전 내 과장님. 그 과장님이 싫기보다는 그렇게 술을 마셔야 하는 회식 문화가 싫었다. 술 돌리기 문화의 정점은 한 달 전부터 공지하고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송년회였다. 신입사원 시절 처음으로 임원이 참석하는 송년회 자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테이블마다 냉면 사발이 놓여 있었다. 전골이 나오는 집이라 음식점 쪽에서 미리 맑은 육수를 준비해 놓은 줄 알았다. 육수가 하도 맑아서 호기심이 많은 나는 ‘이 집 육수는 밴댕이로 우려내는가 보다’ 하고 숟가락으로 슬쩍 떠서 먹었다. 그런데 육수가 아니었다. 그냥 찬물이었다. 잠시 후 냉면 사발의 정체가 밝혀졌다. 회식에 참석한 임원이 자기가 마신 술잔을 거꾸로 잡아 입이 닿았던 부분을 냉면 사발에 담긴 물에 쓱쓱 씻어서 내게 권했다. 잔 돌리기용 간이 세척 용기는 회식이 진행될수록 인간 구강 분비물의 칵테일로 변해갔다. 20명이 모인 송년회는 자리를 바꿔 가며 19명 모두와 한 번씩은 ‘내 잔으로 한잔 네 잔으로 한잔’ 마셔야 하는 리그전 방식이었다. 산술적으로 봤을 때 그런 날의 최소 주량은 소주 38잔이다. 대리 이하 ‘반 잔 금지’라는 암묵적인 불문율도 있었다. 슬쩍 “대체 왜 잔을 돌리느냐”고 묻자 대리 선배가 “그래야 정이 오고 간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회사에서 술자리는 정을 나누는 자리다. 나는 그 회사를 그만뒀지만, 내 친구들과 동기 중에는 아직 현역이 대부분이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서비스를 사는 갑사와 갑사를 접대해야 하는 을사의 사원들은 12월이 오면 정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을사에 다니는 한 차장 친구는 “솔직히 요일 상관없이 한 번에 날을 잡아주는 갑사 직원이 제일 좋다”라며 “‘다음 주 아무 때나’라거나 ‘수요일 지나서 봅시다’라는 식으로 어정쩡하게 확정해주지 않는 게 제일 싫다”고 밝혔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일 봅시다”라거나 “모레 봅시다”라고 말해서 개인 스케줄을 엉망으로 만들면 정말이지 화가 많이 난다고 한다.
송년회 시즌이면 갑을 관계를 따질 것 없이 힘든데, 이걸 서로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한 친구는 “양사의 부장급을 모시는 과장이나 대리급 졸개들끼리 통화를 할 때면 갑사 직원이 먼저 ‘손속에 정을 채워 드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라고 밝혔다. 회사원들 사이에서 ‘손속에 정을 채운다’는 건 술자리에서 술을 조금만 따라 주겠다는 말이다. 갑사와 을사가 만나면 여전히 술잔을 돌린다. 그는 “술잔을 돌리는 사람의 간도 힘들고, 술잔을 받는 사람의 간도 힘들다”라며 “하지만, 잔을 돌리지 않으면 상대와의 관계가 무너졌다고 오해할까 봐 다들 어쩔 수 없이 돌린다. 없어져야 하는 문화는 맞지만, 어쩔 수 없이 돌리는 그 술잔에는 어떤 애잔함이 있다”고 말한다. 송년회 시즌이면 관계사의 과장들끼리 “이번 주에 몇 탕 뛰셨냐”라며 안부를 묻고 술자리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게 진짜 정이다.
외부 업체와의 송년회와는 달리 내부 송년회의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는 게 주변의 증언이다. 한 친구는 “막내급 직원들도 외부 업체 미팅에 가서는 술잔을 열심히 돌린다. 그게 일이기 때문”이라면서도 “다만 내부 회식을 할 때는 임원이 참석해도 막내한테는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막내들이 질색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회사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참석 여부도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한 30대 남성 직장인은 “요새는 송년회가 있다고 미리 공지해도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며 “집에 가기 싫은 사람만 모이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이제 더 이상 ‘회사 송년회’는 집에 늦게 들어가는 절대 핑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또 다른 30대 여성 직장인은 “우리 회사는 아예 12월31일에 송년회를 잡았다”라며 “정말 최악의 날짜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꼭 참석하고 싶은 사람들만 모이기 위해 그리 잡았나 보다, 생각하고 나는 가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12월31일의 서울에서 송년회를 한다면, 집에 걸어가겠다는 각오 정도는 해야 참석할 수 있다.
회사에서 송년회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또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패러다임이 조금은 바뀌어야 한다. 얼마 전 모 잡지사에서 인터뷰 외고 요청을 받아 ‘브라운 아이드 걸스’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르샤는 멤버들과의 관계를 정의하며 ‘일로 만난 사이’라는 표현을 썼다. 멤버들끼리 ‘일로 만난 사이’라는 거리감을 두다 보니 ‘최장수 현역 걸그룹’의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 표현에 마음이 꽂혔다. 일로 만난 사이라도 술잔을 돌리며 정을 쌓을 순 있다. 그러나 굳이 일로 만난 모든 사이가 술잔을 돌려가며 정을 나눠야 하는 건 아니다. 술잔을 돌려가며 정을 쌓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세대가 술잔 돌리기로 정을 쌓는 건 아니다.
글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 에디터),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