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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탁 트인 벌판…고사리 한 줄기, 봄이 왔네!

등록 2020-04-09 09:37수정 2020-04-09 09:41

커버스토리 | 제주는 이제 ‘고사리 계절’
뜯고 맛보는 동안 즐거움 커져
서구에서도 채집은 트렌드
어른들의 레포츠 나물 채집
3월말 ‘고사리 장마’가 내린 제주는 이미 고사리 채취가 한창이다. 지난 2일 제주 서귀포시 제2산록도로 주변의 고사리 터에선 빼꼼히 고개를 내민 고사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송호균 객원기자
3월말 ‘고사리 장마’가 내린 제주는 이미 고사리 채취가 한창이다. 지난 2일 제주 서귀포시 제2산록도로 주변의 고사리 터에선 빼꼼히 고개를 내민 고사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송호균 객원기자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 많은 양의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시기가 있다. 제주에선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며칠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나면 겨우내 얼어붙은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사리가 고개를 빼꼼히 들기 시작한다. 산 중턱까지 잡풀과 이끼가 돋고, 바다 건너 가파도에는 청보리 물결이 일렁인다. 전 지구적인 감염병의 위기 속에서도 기어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뒤로는 한라산이, 앞으로는 서귀포 앞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봄의 기운이 눈부시다. 신중하게 옮기는 발걸음마다 촉촉한 봄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고사리가 차인다. 이름 모를 산새가 노래하고, 덤불 속에서 장끼와 까투리 부부가 퍼덕거린다.

거무튀튀한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돋은 고사리 한 줄기를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 본다. 어디쯤을 끊을지 가늠하는 움직임이다. 뿌리 부분에서 끊으면 전체적으로 질겨진다. 반대로 지나치게 위쪽을 뚝 끊어내면 가치가 떨어진다. 엄지와 검지로 살살 만져보다가 적당한 지점을 가운뎃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뜯어낸다. ‘톡’. 통통하면서도 허물어지듯 연약하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을 잃지 않는 고사리 한 줄기를 취하는 그 순간의 느낌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그 여린 생명이 비로소 내 손 안에서 ‘톡’하고 끊어지는 순간 비로소 온전한 봄이 왔음을 깨닫는 것이다.

고사리를 삶는 냄새는 또 어떤가. 두어 시간 산속에서 따낸 고사리를 담은 가방을 턱 하니 뒤집어놓고 대충 흐르는 물에 씻어낸 뒤 불에 올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온 집안은 쌉쌀하면서도 구수한 산 내음으로 가득해진다. 부드럽게 물러진 고사리를 따사로운 봄볕에 널어 말리고, 먼지를 머금은 옷가지를 털었다.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워진 고사리를 1년 내내 꺼내먹어도 좋고, 한번 삶은 것들을 생나물로 바로 볶아내면 알싸하면서도 녹진한 특유의 향취가 입안 가득 퍼진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채집’은 서구 문화권에서도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친환경적인 먹거리를 직접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푸드 마일리지’(식품이 생산지에서 소비자 식탁에 오르기까지 이동 거리)를 줄일 수 있는 데다 육식 일변도의 식습관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도 채집이 갖는 매력이다.

제주 서귀포시에 사는 이시형(32)씨와 홍송(32)씨 부부도 매년 봄이면 고사리를 따러 다닌다. 이씨는 “탁 트인 벌판에서 고사리를 따는 일 자체가 일단 재미있고, 적당한 운동도 되는 데다 반찬거리까지 생기니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앞으로 한 달. 바야흐로 ‘고사리의 시간’이다. 등산화나 장화, 장갑과 손가방 등으로 무장하고 볕을 가릴 수 있는 챙 넓은 모자까지 눌러쓴 사람들이 한라산 중산간 일대로 모여드는 시점도 이때다. 지리산 일대, 서산, 안면도 등의 너른 들에도 ‘고사리의 시간’을 맞는 이들이 있다. 전문적으로 고사리를 취급하는 ‘꾼’들만의 잔치일까? 천만의 말씀.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든 하고 있다. 발견의 기쁨, 따내는 과정의 역동성, 맛있게 먹는 즐거움이 모두 여기에 있다. ‘고사리 따기’는 시각·촉각·청각·후각·미각 등 오감을 모두 자극하는, ‘어른들의 레포츠’다.

제주/글·사진 송호균 객원기자 gothroug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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