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 셔츠, 면바지, 옥스포드 셔츠 등 대한 20여년 전 유행했던 옷차림이 ‘랄뽕룩’이란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올 봄·여름 타미힐피거에서 내세운 스타일. 사진 타미힐피거 제공
유행 없는 유행이 다시 돌아왔다. 로고가 박힌 피케(가로 고랑이 있거나 무늬가 도드라진 면직물) 셔츠, 옥스퍼드 셔츠 등 약 20년 전 크게 유행했지만, 어쩐지 너무 무난해서 옷장에 고이 넣어둔 옷 같은 것 말이다. 아직 처분하지 않았을 법한 이런 옷들이 다시 유행의 물결에 올라섰다. 199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폴로 랄프로렌 룩’은 더는 ‘아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뉴트로’(new+retro·새로움과 복고를 합성한 신조어) 바람을 타고 1990~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이 옷차림이 ‘랄뽕룩’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와 20~30대를 중심으로 인기몰이 중이다.
20~30대가 즐겨 쓰는 에스엔에스(SNS) 인스타그램에서 ‘랄뽕’을 검색하면 11만건 이상의 게시물을 발견하게 된다. 유튜브에서는 50만 구독자에 육박하는 패션 유튜버 ‘디렉터 짱구대디’, ‘깡스타일리스트’ 등이 랄뽕룩으로 옷 입는 법을 공유한다.
‘랄뽕룩’은 의류 브랜드 ‘폴로 랄프로렌’의 ‘랄’과 농담 삼아 하는 말 ‘뽕 맞은 것처럼 멋지다’의 ‘뽕’을 합쳐 고색창연한 듯하지만 힙한 옷을 뜻한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퍼진 이 신조어가 빈티지 패션의 또 다른 흐름을 만들고 있다. 브랜드를 대놓고 드러내는 큰 글자, 눈에 띄는 문양, 누가 입어도 정돈된 느낌을 주는 스타일 등이 특징이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서 10~20대에게 인기가 많은 폴로 랄프로렌의 ‘치노 베이스볼 캡’. 사진 무신사 제공
‘랄뽕룩’은 누구나 옷장 속에 한벌쯤 가지고 있을 법한 옷을 기본 아이템으로 한다. 옥스퍼드 셔츠에 청바지나 면바지, 럭비 티셔츠나 피케 티셔츠에 반바지, 꽈배기 모양 짜임의 니트 스웨터에 면 스커트, 어느 옷과도 잘 맞는 남색과 베이지색 블레이저 재킷 등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유행의 최첨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촌스럽지는 않은, 입으면 어쩐지 말쑥해지는 스타일이다.
옷장 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이 옷들이 어떻게 다시 유행되어 돌아온 걸까. 첫 번째로 뉴트로의 유행을 이유로 꼽힌다. 스타일링 서비스 업체 ‘콜리젯’ 배문주 대표는 “뉴트로 트렌드와 맞물려 과거에 유행했던 스타일이 다시 돌아왔는데, 약 20년 전 유행했던 폴로 랄프로렌 역시 그렇게 귀환한 브랜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민혜성 엘에프(LF) 패션리서치앤컨설팅팀 과장 또한 “뉴트로의 영향으로 과거 인기였던 브랜드들이 다시 소환됐다. 폴로 랄프로렌·타미힐피거 등이 그렇고, 헤지스·빈폴 등도 젊은 층을 겨냥한 디자인을 내놓으면서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폴로 랄프로렌이 고급화 전략을 강화했을 때는 소비자들에게 다가서지 못했는데, 오히려 젊은 층에게 호소하면서 다시 인기를 얻었다. 10~20대가 주요한 소비층인 온라인 플랫폼 ‘무신사’에 입점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올 봄·여름 타미힐피거에서 내세운 스타일. 사진 타미힐피커 제공
이에 대해 무신사의 마케팅 담당자는 “뉴트로의 인기와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디자인이 맞물려 젊은 세대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특히 폴로 랄프로렌의 ‘치노 베이스볼 캡’은 무신사에서 구매 순위 상위권에 한결같이 오르고, 3000건이 넘는 구매 후기가 이어질 정도로 인기다. 옥스퍼드 셔츠, 럭비 셔츠도 판매율이 높고, 여름을 맞아 무릎길이의 반바지인 ‘프렙스터’, 메시 소재의 피케 셔츠도 인기라고 한다. 대표적인 프레피룩(미국 명문 고등학교 교복 혹은 그 학생들이 입는 옷차림·모범생 옷차림)이다.
이와 관련해 랄프로렌 코리아는 공식적인 매출 추이와 소비자 반응 등을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알려왔지만, 프레피룩을 선보이는 다른 국내외 브랜드들은 전반적인 상승세를 보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타미힐피거의 경우 매출이 1950억원이었던 2017년에 견줘 2019년엔 25% 이상 상승해 2500억원에 이르렀다. 이정환 타미힐피거 홍보팀 과장은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시즌과 시즌 사이에 이슈성 컬렉션을 출시하고, 다른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며 젊은 층을 공략하는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30~40대가 주 소비층이었던 빈폴은 온라인 전용 라인을 강화하고, 일상에서 즐겨 입는 기본 아이템의 고급화를 강조하며 밀레니얼 세대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헤지스 또한 온라인 전용 브랜드인 피즈라인을 통해 젊은 세대를 공략하고 있다. 김형범 엘에프(LF) 홍보팀 과장은 “2017년 피즈라인 론칭 후 매년 두 자릿수 퍼센티지로 성장률을 보인다”고 밝혔다.
헤지스에서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피즈라인. 사진 엘에프 패션 제공
단기간 유행하는 옷들로 꾸려진 패스트 패션에 대한 소비자의 피로감도 랄뽕룩 유행의 배경으로 분석된다. 배문주 콜리젯 대표는 스타일링 상담을 할 때 “확실히 예전보다 에스피에이(SPA·디자인 제조 유통 판매 일괄형)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줄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속가능한 패션이라는 측면에서, 폴로 랄프로렌은 환경적으로는 엄밀하게 지속가능한 패션 철학을 적용하고 있지 않지만, 스타일에서만큼은 오래전부터 지속가능한 것을 추구해왔다”며 “클래식하면서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은 것 같은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면서 이런 옷차림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벌을 구매해도 여기저기 활용하며 과장 없는 옷맵시와 단정한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어 합리적 소비를 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가치 소비를 지향하는 밀레니얼들의 소비 특성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무신사 마케팅 담당자는 “돈을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상품을 구매하는 방향으로 소비 추세가 변화하고 있는 점”이 랄뽕룩의 인기 요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헤지스가 내놓은 피즈라인. 사진 엘에프 패션 제공
잘못 입으면 아재룩, 잘 입으면 스마트한 옷차림이 되는 랄뽕룩, 어떻게 하면 잘 입을 수 있을까. 배문주 클로짓 대표에게 조언을 얻었다. 여성의 경우 흰색 피케 셔츠 한 장이면 여러 옷차림에 활용이 가능하다. 배 대표는 “흰색 피케 셔츠에 남색이나 검은색 반바지를 매치하면 어려 보이면서도 시원해 보인다. 단추를 끝까지 잠그지 않아 답답한 느낌을 배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남성의 경우, 계절에 맞춰 리넨 셔츠에 면바지 정도로 깔끔하고 기본적인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다. 배 대표는 “여기에 뭔가 허전해서 다른 아이템을 더하면 오히려 촌스러워질 수 있다”며 “옷에 박힌 자수 로고의 색상에서 힌트를 얻으라”고 말했다. 그는 “옷의 로고는 옷의 메인 색상과 어울리는 색으로 배색 되니 그 색상에 맞춰 포인트를 주는 것은 괜찮다. 그런데 예를 들어 옷의 로고 색상은 초록색인데 여기에 빨간색 포인트 아이템 등을 매치한다면 실패한 코디가 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