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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인왕산 오른다 나는 힙스터니깐

등록 2020-06-04 09:21수정 2020-06-05 15:46

최근 달라진 인왕산 풍경
2030 레깅스족 등 점령하다시피
“낮아 오르기 편하고 야경 등 찍을 거리 많아”
밀레니얼 세대 너도나도 등산 클럽 가입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인왕산은 최근 20~30대 젊은 등산객에게 인기가 많다. 일몰 시간 즈음 오르면 붉은 노을과 도심 야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왼쪽부터 지난달 27일 인왕산에서 만난 김은현∙김현아∙김다희씨.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인왕산은 최근 20~30대 젊은 등산객에게 인기가 많다. 일몰 시간 즈음 오르면 붉은 노을과 도심 야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왼쪽부터 지난달 27일 인왕산에서 만난 김은현∙김현아∙김다희씨.

세 친구가 인왕산 정상에 모였다. 서울에 사는 김다희(19)·김현아(19)·김은현(19)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 정상에서 모임을 갖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처음 시작한 대학 생활은 코로나19로 어영부영 한 학기가 반쯤 지나가 버렸다. 20대의 시작을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인왕산 정상에서 만난 그들에게 등반 배경을 들었다. 어느 날, 셋 중 한명이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인왕산 노을이 정말 아름답더라”고 했단다. 그러자 다른 한명이 “요즘 핫한 산”이라고 말했다. “가자.” 셋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정상에 오른 세 사람은 탄성을 내뱉으며 도시를 내려다봤다. 산 아래에 있을 때는 빼곡하고 정신없어 보이던 세상이 338m 인왕산 해발고도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상 한복판에 솟은 삿갓바위에서 찍는 ‘인증샷’은 필수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면 멀리 북한산부터 더 멀리 남쪽 롯데월드타워까지 서울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색이 붉은색 파스텔을 여러 번 문질러놓은 것처럼 짙어져 갔다. 해가 산 아래로 떨어질수록 노을과 야경을 즐기려는 이들이 정상에 모여들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바람 쐬러 온 청년부터, 위아래 레깅스와 스포츠웨어로 쫙 빼입은 이들까지, 원색의 알록달록한 중장년 등산복이 대세였던 몇 해 전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날 인왕산처럼, 최근 등산 인구 연령대는 대폭 낮아졌다. 한 예로 가입 회원이 15만이 넘는 앱 기반 산행 커뮤니티 ‘블랙 야크 알파인 클럽’(BAC)의 4월 신규 가입자 7400여명 가운데, 20~30대는 60%가 넘는다. 신규 가입자도 지난해 같은 달에 견줘 2배 이상 늘었다. 블랙야크 남윤주 마케팅팀장는 “코로나19가 기폭제이긴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의 등산 열풍은 뉴트로 유행의 정점”이라고 분석한다. 남 팀장은 “고풍스러운 을지로 거리, 건물이나 옛 디자인 등 날것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이 이제 산에 간다”며 “서구 문화의 인공적인 것은 과거 우리가 접할 기회가 적다 보니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는 자연에서 느끼는 낯섦이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야경.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야경.
인왕산은 등산 난도가 높지 않은 데다 서울 지하철 3호선과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용이해 특히 인기가 많다. 하지만 서울 시내 여느 산보다 접근성은 좋지만 개방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1968년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라고 불리는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일반인 통행을 금지했다가, 1993년에야 일부 구역이 개방됐다. 검문 없이 등산로 전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건 2년여에 불과하다.

오래 잠들어 있던 산은 2020년, 20~30대의 새로운 해방구이자 힙스터의 성지로 떠올랐다. 친구들과 계절마다 등산을 즐기는 직장인 이승아(30)씨는 “만만해서 등산하는 기분을 내기 좋은 산인 데다, 내려오면 맛집과 예쁜 카페가 많은 서촌, 북촌, 익선동이라서 놀기에 좋다”고 평했다. 이씨와 같은 이들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 함께 등산할 사람을 모으기도 한다. 오픈 채팅방에 ‘2030 등산’이라는 키워드만 쳐도 200개 이상의 방이 검색된다. 지난 2일 현재 약 200명의 인원이 모여 있는 ‘2030 등산 같이 갈 사람 구하는 방’에서 활동하는 헬스트레이너 김슬기(30)씨는 최근 몇 년 인왕산을 10번 넘게 올랐다. 그에게 인왕산은 “낮은 산인데도 불구하고 얻을 것은 많은, 소위 가성비 좋은 산”이라고 한다. 이번주 ESC는 매력 넘치는 인왕산의 여러 코스와, 패션을 중심으로 등산 문화를 재편한 이들의 트렌드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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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퇴근 후 오른 산, 참 맛있네…인왕산 코스 5선

밀레니얼 세대 중심으로 인왕산 ‘야등’ 붐

초급자 코스부터 ‘혼산’ 코스까지

전북 마이산이 따로 없네, 약수터 풍경은 덤

하산 후 마시는 짜릿한 맥주 한잔도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노을.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노을.
혼자도 좋고 함께여도 좋다. 낮도 좋고 밤도 좋다. 접근성이 좋은 인왕산은 경험할 수 있는 경로의 선택지가 넓다. 상황과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인왕산의 매력에 빠져보자.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에서 등산을 주제로 활동하는 이원창 ‘아웃도어큐레이터’ 대장에게 상황별 코스를 추천받았다.

이원창 대장은 현재 프립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호스트다. 그가 꾸린 등산모임 대부분은 오픈과 동시에 ‘완판’ 된다. 등산에 관심이 높아진 밀레니얼 세대를 대상으로 인왕산 야간 등반도 진행한다. 매주 25명 남짓 모인 대원들과 해 질 녘 인왕산에 오른다. 그가 주로 다니는 길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출발해 인왕산 자락길을 지나 정상을 찍고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약 5㎞ 경로다. 해가 져도 자락길을 따라 조명등이 켜져 사고 위험이 없고, 완만한 지형이기에 초심자도 따라가기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한라산 정상 등반이 ‘중상급’이라고 하면 인왕산 야간 등반은 ‘초급 1단계’다.

야간 등산이 초급 1단계라면, 주간은 어쩐지 더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산은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는 초보 단계에서 벗어난 등산 마니아가 즐길 수 있는 경로도 제안했다. 자칫 샛길로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할 경로다. 이 외에도 요즘 유행하는 ‘혼산’(혼자 하는 등산)을 즐길 수 있는 코스, 계곡을 끼고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코스 등도 추천했다.

홍콩 야경 부럽지 않네, 야간 등산 코스

사직단-단군성전-성곽길-범바위-정상-창의문-부암동 (4㎞, 2시간30분)

인왕산은 젊은 등산객들에게 ‘야등(야간 등산)의 성지’로 불린다. 광화문, 을지로 등 서울 시내 직장인들이 퇴근 후 훌쩍 오르기에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이원창 대장은 인왕산을 ‘야경 핫플레이스’로 꼽았다. 일몰 시각에 산 아래서 출발하면 올라가는 동안 해가 진다. 붉게 타는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며 하루를 꽉 채워 보낸 이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정상에서 석양을 구경하고 싶다면 일몰 1시간 전에 출발하면 좋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다음에는 마치 다른 세상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든다. 불 밝힌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 아래에 있을 때는 그토록 분주했는데, 느릿느릿 길을 따라 움직이는 차량 행렬을 보면 이곳과 저곳의 시간이 다르게 느껴진다. 이 대장은 “일에 매몰된 직장인일수록 야경을 바라보며 더 큰 감동을 얻는 듯하다. 분위기에 취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 대장은 내려갈 때는 방향을 북쪽 자락 부암동 쪽으로 틀길 권했다. 하산 직후 마시는 맥주 한잔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에 다다르면 치킨집부터 작은 카페까지 오밀조밀 모여 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택시나 버스를 타고 청운동 윤동주문학관에 내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는 짧은 코스(약 30분 소요)로도 ‘압축 야등’을 즐길 수 있다.

사색하며 즐기는 ‘혼산’ 코스

사직단-단군성전-성곽길-범바위-정상-원점 회기 (3.7㎞, 2시간30분)

‘짧고 굵게’ 산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는 코스다. 구간마다 표지판이 잘 설치가 되어 있어서 산에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서울성곽길 인왕산 구간(창의문~돈의문 터) 가운데 일부를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수백 년 전 한양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시 서울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서울시청 한양도성도감에 쓰인 설명에 따르면 한양도성은 태조 5년인 1396년, 총 98일 동안 백성 19만7천여명을 동원해 쌓아 올렸다고 한다. 길을 따라 쌓인 돌담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한양의 ‘우백호’로 여겨졌던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기로도 유명했는데, 범바위 또한 호랑이 닮은꼴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범바위를 지나 정상까지 약 200m 구간은 암반을 따라 올라가는 길로 가파르고 숨이 찬다. 정상에 오르면 숨을 고른 뒤, 엎어놓은 삿갓처럼 생긴 삿갓바위에도 올라보자.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서 보는 전경과 바로 그 아래서 보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동서남북으로 탁 트인 인왕산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서울 도심 전경은 비교적 쉬운 등산 코스에 비하면 ‘공짜’에 가깝다.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도심의 불빛.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도심의 불빛.
내 기분 마치 마이산, 마니아 코스

독립문-국사당-선바위-범바위-정상-기차바위-석파정 (5.5㎞, 3시간30분)

다섯 코스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문에서 출발한다. 이 대장은 “산을 비켜 올라가는 코스로 길이 덜 다듬어져 있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등산하는 기분이 드는 코스”라고 소개했다. 하산길에 있는 기차바위를 지날 때는 암반을 따라 밧줄을 잡고 내려가기도 한다.

이 대장은 “멀리 전북 진안의 마이산 같은 느낌이 드는 코스”라고 설명했다. 이 코스를 지나며 만나는 선바위는 스님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국내 타포니 지형(암석의 약한 부분이 풍화하면서 둥그런 모양으로 떨어져 나가 벌집 형상을 이루는 것)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된다. 마이산 또한 이런 지형이 발달했다. 두 산 모두 옛 문인과 선비들이 사랑한 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독립문 출발 코스는 다른 코스보다 샛길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혹시 길을 잃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장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네이버나 카카오 지도 앱을 일단 클릭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지도 앱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을 표시한 굵은 선을 따라가라”는 것이 그의 팁이다. 불안에 잠식되면 자칫 더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일상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왕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왕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쉬엄쉬엄 갑시다, 초심자 코스

사직단-수성동 계곡-둘레길-창의문 (2.5㎞, 1시간30분)

정상까지 약 200m, 가파른 구간을 피한 코스다.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어차피 다시 내려올 건데 힘들게 왜 올라가?”라는 물음을 절묘하게 비껴가는 코스다. 정상에 오르진 않지만, 전설이 깃든 기기묘묘한 암석들과 눈길을 사로잡는 풍성한 산세는 충분히 즐길 만하다.

인왕산 둘레길은 성곽길과 다르게 숲을 끼고 도로를 따라 조용히 걷는 길이다. 도심에서 숲으로 순간 이동한 듯한 느낌이 든다. 전체 구간이 완만해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이 대장은 “밤중에는 마치 서울 아닌 곳 같다. 적막해서 밤 산책 코스로도 추천한다”고 말했다.

인왕산 정상에서 직접 싸온 도시락을 먹는 김은현∙김다희∙김현아씨.
인왕산 정상에서 직접 싸온 도시락을 먹는 김은현∙김다희∙김현아씨.
계곡에 발 담그는 피크닉 코스

사직단-황학정-인왕천 약수터-수성동 계곡-통인시장 (3㎞, 2시간)

대체로 완만한 코스지만, 황학정에서 인왕천 약수터까지 약 20분간 구간은 살짝 가파른 길이라서 ‘맛보기 등반’을 할 수 있다. 등반 후 좀 더 짜릿한 계곡의 맛을 만끽하고 싶다면 인왕천 약수터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 정상을 찍고 수성동 계곡 쪽으로 내려와도 좋다.

수성동 계곡은 복원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2011년 5월 지금의 계곡 자리에 있던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됐다. 난개발로 ‘찌그러져’ 있던 역사 속 돌다리인 기린교가 복원 사업과 함께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중 한 작품인 ‘수성동’과 같은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바위에 걸터앉아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다 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소풍을 주제로 한 코스인 만큼 통인시장 방향으로 내려와 즐길 거리 많은 서촌 여행을 겸하길 추천한다.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스튜디오어댑터 윤동길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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