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은 작가가 상담을 이성 관계, 사랑, 연애뿐만 아니라 ‘관계’ 전반으로 확장합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여러분이 맺는 수많은 관계에서 고민이 생겼다면 이제 ‘곽정은의 단호한 관계 클리닉’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물론 이성 관계, 연애 고민 상담도 진행합니다. 사연은 200자 원고지 5매 가량(A4 용지 1/2)으로 갈무리해 보내주세요! 보낼 곳 :
esc@hani.co.kr
Q1 전 30대 후반 여성인데요, 회사 남자 선배 때문에 고민입니다. 자상한 선배는 늘 제게 잘해줬어요.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 성격상 일이 많아도, 짜증나는 상황이라도 꾹 참는데요, 다른 이들은 그런 점을 잘 모르던데 그는 잘 알고 “힘내”라고 얘기해주곤 했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하는 태도도 어째 쌀쌀맞고요. 제가 뭘 실수했나 싶어서 엄청 고민했어요. 저를 좋게 봐준 선배라도 상사인데 버릇없이 대했나 싶기도 해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요.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데 있었어요. 중요한 계약이 성사된 날이었어요. 모두 기분이 좋아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술을 마셨는데요, 제가 그 선배한테 물었죠. 잘못한 게 있으면 알려 달라, 고치겠다고 말이죠. 살짝 취기가 돈 그 선배는 뜸을 들이더니 이유를 말했어요. 어느 날부터 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피한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겁니다. 전 더 고민이 됐어요. 저는 그 선배가 남자로는 안 보여요.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사람인데, 제 취향은 아닙니다.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전 곧 결혼해요. 하지만 그 선배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기에 예전처럼 좋은 관계로 가깝게 지내고 싶어요. 그는 절 계속 피하겠죠. 저는 정말 그 선배를 인간적으로 놓치고 싶지 않아요. 순수한 선·후배 관계로 제 곁에 있게 할 묘책이 없을까요? 방법을 알려주세요.
‘고백남’과 순수한 선·후배 관계이고 싶은 여자
A1 자상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회사 선배, 그러나 나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고 이제는 돌연 태도가 변해 나에게 대해 차갑게 굴어서 당황스럽고 아쉬운 마음이 크겠네요. 사실 내가 잘못한 것은 딱히 없는데,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감정 때문에 억울함도 있을 것이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아쉽게도 당신에게는 이 관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순수한 선후배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당신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만들어지기 힘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인지 설명해 드릴게요. 자상한 그 선배가 보여주었던 배려와 격려는, 초반에는 그저 후배를 향한 순수한 무엇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자상함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신에 대해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죠. 단지 후배였기 때문에 잘해준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마음을 품었기에 잘해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당신과의 관계란, 처음엔 그저 직장 내 선·후배 관계로 시작했으나 특정한 목적이 있는 관계로 변화했습니다. 관계의 기반이 완전히 바뀐 것이죠. 선배로서의 호의가 남자로서의 호감으로 바뀌는 것은 아마도 아주 빠른 과정이었을 것이고요. 선배는 결혼할 사람이 있는 당신에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히 힘들었을 텐데, 결국 감정을 거두는 과정에서 선배로서의 호의도 모두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선배의 호의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던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함께 일하다 감정이 커져 버리고 그 감정을 털어놓아 버린 그 선배에게도 아주 큰 잘못은 없어요. 일하다 보면 서로를 관찰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감정이 커지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뿐이죠. 다만 크게 잘못한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관계 속의 어떤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있지요. 당신이 원하는 순수한 선·후배 관계는 사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당신이 아무리 평범한 관계를 원한다고 해도, 그건 그가 당신에 대한 감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건 당장 다음 주가 될 수도 있지만,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일 수도 있어요. 당신은 후배로서 격려와 배려를 바랄 뿐이지만, 그는 ‘좋아해 봤자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 든 직원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태도를 선택하는 사람’일 수 있고 그건 당신 선택 밖의 일이니까요. 선택권이 없으므로, 묘책도 없습니다. 살가운 선배를 잃는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언제나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당신이 선배를 대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어도, 그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작가
Q2 저는 28살 여성입니다. 대학 졸업 후 방송국 피디가 되고 싶어서 준비 중이에요. 2살 많은 애인은 직장인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을 했고, 성실하고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철저한 사람입니다.
남자친구는 연애를 저와 처음 했어요. 그래서인지 좀 서툴지만 한편으로는 감정에 솔직하고 저와 함께하는 무엇이든 설렌다고 하고 즐거워해요. 그런데 가끔은 저와 하는 모든 것에 의미 부여를 해서 좀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저는 좀 털털한 편이고, 감정적인 사람인데 그는 꼼꼼하고 냉철해요. 이렇게 다른 성격이 때때로 보완이 되기도 하는데, 어떨 때는 좀 집요한 면이 있어서 숨이 막혀요. 전에 한번은 저와 연락이 안 된 적이 있는데 제가 있는 곳에 찾아와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언론고시생이다 보니 제 동선이 대체로 일정하긴 하지만 그날은 친구와 새로 생긴 카페에서 모처럼 바람을 쐬고 있었거든요.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탐색해 저를 추적한 느낌이었어요. 그는 평소에 에스엔에스(SNS)를 안 해요.
저와 너무 다른 이 사람이 좀 버거워서 정리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마음인지 자꾸만 저 스스로 합리화를 해요. 그래도 참 착한 사람인데 상처주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지지 않은 부분을 보완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새로운 연애를 하기 귀찮다 등등.
취업 문제도 그렇고, 제 상황이 답답해 뭐라도 정리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님 진심으로 마음이 식은 건지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막상 만나면 또 재밌고 하하호호 웃음은 나거든요.
나와 다른 그가 부담스러운 여자
A2 털털하고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자신에 대해 표현하셨고, 또한 방송국 프로듀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신은 평범한 직장생활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조금은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성향도 아마 당신의 기질 중 하나일 것 같고요. 자신의 성향은 그러한데, 매일 다소 일정한 동선을 그리며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 당신에게는 모종의 자유와 해방감, 일탈감을 느끼게 해주는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수 있죠.
그 사람이 처음엔 나와 다른 점이 보이니 쉽게 끌렸을 거예요. 그러나 조금 만나다 보니 달라서 신선한 게 아니라 달라서 피곤하게 되었죠. 연애가 처음이라 때때로 서툴고, 은근히 부담을 느끼게 하고, 가끔 집요한 점이 보일 때 당신은 생각했을 거예요.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라고요. 상대를 얄팍하게 알 때는 장점으로 보이던 어떤 점들이, 조금만 함께 지내봐도 단점으로 변하는 것은 아주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지요. 당신이 혼란스러운 것은, 이렇게 자기 마음에 대해 객관적으로 돌아볼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가 보여준 모습들이 괜찮은지 아닌지는 논할 필요가 없어요. 이건 당신 마음만 고려해도 결론이 나오는 문제니까요. 어떤 이유로든 나와는 맞지 않아 이미 싫어지고 부담스러워진 사람을 억지로 만날 이유가 있나요? 스트레스 받는 일상에 대한 타협이, 어느 한 사람의 시간을 내가 점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연애’여서는 곤란해요. 많이들 그렇게 연애하고 결혼도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그리 아름답지가 않죠. 정리를 하지 말자며 생각하는 당신의 이유들이란 하나같이 이기적인 것이 보이시나요? 사랑하지도 않고 더 이상 당신에게 매력적이지도 않은 그 사람을 당신의 일시적인 피난처로 이용하지 마세요.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예의이자, 당신 인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