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선수 정유인.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미국의 체조 선수 케이틀린 오하시(23). 그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소속이었던 지난해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열린 대학체조대회 단체전 마루 경기에 나섰다. 흥겨운 노래에 맞춰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고 가뿐하게 공중제비를 도는 그의 연기에 관객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결과는 10점 만점에 만점. 춤을 추듯 날아오르는 그의 경기 영상은 지금까지 유튜브에서 조회 수 1억2000만회를 기록하고 있다.
그를 깃털 같고 야리야리한 체조 선수로 상상한다면, 선입견이다. 한때 전도유망한 체조 국가대표 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몸집이 커지던 14살 때부터 “코끼리를 집어삼켰냐”, “돼지 같다”, “체조 선수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코치와 체조 팬들에게서 들어야 했다. 체조 실력과 상관없는 ‘몸평’(몸매 평가)은 섭식 장애까지 유발할 정도로 오하시를 옥죄었다.
오하시는 부상으로 국가대표 자리를 내려놓은 뒤, 대학 체조부에서 숨을 고르면서 자유로워졌다. 사회적 시선에 집착하지 않고 몸을 쓰고, 드러내고, 움직이자 오히려 큰 환호를 받았다. 이제 그의 경기 동영상에는 “날 수 없는 새”라는 혹평이 아닌 “탄탄한 하체 덕분에 착지가 안정적”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그간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지속해서 이어져 왔고, 이제 그 결과가 모든 영역에 스며들고 있다. 운동선수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몸평’에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여성은 더는 예뻐지기 위해서, 살을 빼기 위해서 덤벨을 들지 않는다. 이런 사회적 흐름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예컨대 2018년 출간한 <마녀체력>은 저질 체력의 여성 노동자가 ‘아침형 근육 노동자’로 변신한 과정을 그렸다. 지금도 꾸준히 회자될 정도로 찾는 이가 많다. 시대의 트렌드에 민감한 방송계가 놓칠 리 없다.
케이틀린 오하시를 떠올리게 하는 전·현직 여성 운동선수들이 방송에서 뭉쳤다. 지난 4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케이블 티브이(TV) 이(E)채널의 예능 프로그램 <노는 언니>에선 박세리(골프), 정유인(수영), 남현희(펜싱), 곽민정(피겨), 한유미(배구) 등이 모여 협력하고, 경쟁하고, 미션을 해결한다. 출연자들은 물놀이하며 드러난 ‘쌩얼’을, 우람한 어깨 근육을, 튼튼한 하체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지난 21일 ESC와 전화 인터뷰를 한 방현영 책임 프로듀서(CP)는 “그동안 방송을 제작하면서 (여성인) 나조차도 여성 출연자들은 예능에서 예쁜 모습만 내보내야 하는 게 방송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며 무뎌졌던 것 같다”며 “여성 운동선수만 모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니 오히려 미모나 외모에 대한 화두 자체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뛰고 달리면서 드러나는 박세리 선수의 건장한 하체, 물에서 다진 정유인 선수의 어깨 근육, 순간을 놓치지 않는 남현희 선수의 날렵한 몸놀림 등이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선수들은 에스(S)라인에 집착하는 사회적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훈련을 통해 얻은 근육질의 몸을 개인의 자산으로 당당하게 드러낸다.
지난해부터 출판계에서는 예쁜 몸이 아닌 강한 몸을 지향하며 운동하는 여성에 대한 책이 쏟아졌다. 그 이전에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은 차별과 편견에 대항하는 여성 운동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숱하게 다뤄왔다. 티브이(TV) 예능 프로그램인 <노는 언니>의 탄생은 이런 이야기를 좀 더 대중적으로, 좀 더 폭넓게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주
는 거침없어서 매력 있고, 강해서 더 빠져들게 되는 노는 언니, 운동하는 언니들을 들여다봤다.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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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어벤져스 언니들, 놀 때도 ‘국대’급으로
본격 여성 운동선수 예능 <노는 언니>
박세리·정유인·남현희·곽민정·한유미 등
놀이판에서도 틈만 나면 승부를 겨루는 이들
‘놀며 운동하는 언니’ 능력치 캐릭터 카드
<노는 언니>에 출연한 운동선수들. 사진 왼쪽부터 박세리·곽민정·한유미·남현희·정유인 선수. 사진 이(E)채널 제공
그곳은 승패가 없는 세계다. 케이블 티브이(TV) 채널인 이(E)채널의 예능 프로그램 <노는 언니>는 잔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압박감에 시달렸던 ‘언니’들을 위해 놀이판을 벌였다. 골프 박세리, 수영 정유인, 펜싱 남현희, 피겨 곽민정, 배구 한유미가 그 언니들이다.
전 세계 라이벌과 금·은·동을 놓고 숨 막히는 대결을 펼쳤던 그들. 이제 선수들은 골프채나 펜싱 검을 놓고, 얼음을 지치는 스케이트의 날 위에서도 내려와 게임이든 운동이든 그저 즐기면 된다. 하지만 ‘노는 언니’ 디엔에이(DNA)보다 운동하는 언니 디엔에이가 강한 이들은 틈만 나면 대결을 펼친다. 난생처음 해보는 게임에서도 혼신의 힘을 쏟는다. 족구를 할 땐 공중부양하고, 마룻바닥 수영 경기를 하며 온몸의 근육을 최대치로 쓴다.
그동안 제대로 못 놀아본 한이 큰 언니들은 카메라가 돌든 말든 있는 힘껏 논다. 물놀이를 마친 뒤 메이크업을 다시 손볼 틈도 없이, 엉덩이로 카메라를 가리든 말든 신나게 논다. 놀이판에서 좌충우돌하며 만들어지는 재미가 이 프로그램의 힘이다. 제대로 운동했던 언니들, 그 운동으로 최고가 된 언니들. 그런 언니들의 놀이판에 20~30대 여성들이 환호하고 있다. “본인 분야 톱 찍은 건강한 여성 운동선수들이 나와서 노는 것만 봐도 내가 다 행복하다”거나 “근육이 있으면 뭐든 잘하는 것 같은 근육 만능설을 믿게 된다”는 등의 소감이 트위터 등 에스엔에스(SNS)을 달구고 있다. 인형처럼 예뻐 보이기 위해 하는 운동은 과거의 유물이다. 근육과 힘을 키워 일상을 튼튼하게 영위하려는 운동이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대세다.
놀이조차 국가대표급인 언니들의 캐릭터를 정리해봤다. 운동밖에 모르던 언니들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한 이 프로그램의 결말 즈음엔 누가 얼마만큼 더 능력치를 갱신해 있을까. 선수들은 부상 등의 위험으로 자기 종목 외에는 운동 경험이 많지 않지만, 그들의 능력치가 투영될 만한 운동도 매칭해봤다. 신나는 놀이판에 함께 뛰어들어 막강한 캐릭터 카드들을 꺼내 펼쳐보자. 번외 편으로 <노는 언니> 외에도 운동하는 여성의 세계를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책,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콘텐츠도 함께 정리했다.
운동하는 언니들의 세계가 궁금해
여성 운동선수들을 포함한 체력을 키우려는 여성들이 주목받으면서, 기존의 억압 받는 몸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책과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운동하는 여성을 다각도의 시선으로 다룬 이들 콘텐츠는 본격 ‘여성 운동 예능’인 <노는 언니>에도 투영되고 있다.
튼튼해지는 책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신한슬 지음·휴머니스트) 에스(S) 라인 몸매, 다이어트가 목표가 아닌 일상을 살아갈 힘을 기르기 위해 운동하는 주간지 기자의 생존 운동 에세이.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이진송 지음·다산책방) 여러 운동을 전전하던 만년 운동 새싹인 작가의 일상 운동 도전기. 숱한 운동 경험마다 별책부록처럼 딸려 오던 여성 혐오와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이정연 지음·웅진지식하우스) 15년간 운동 방랑기를 거쳐 근력 운동에 정착한 저자가 체력 곳간을 채우며 느낀 변화와 성취를 다정하게 써내려간다.
영화
<당갈>(니테쉬 티와리 감독·인도·2018) 남성 중심의 레슬링판 역사를 다시 쓴 두 인도 여성 선수의 뒤집기 한판승.
<나는 스모선수입니다>(맷 케이 감독·미국, 영국, 일본·2019) 스모는 일본의 국민 스포츠이지만 여성에게는 프로 선수 자격을 주지 않는다. 20살의 여성 스모선수 곤 히요리의 도전기. 넷플릭스에서 영상을 서비스하고 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조나단 데이턴∙발레리 페리스 감독·영국, 미국·2017) 남녀 경기의 상금부터 달랐던 1970년대 남성 중심의 미국 프로 테니스계에 이의를 제기한 선수 빌리 진 킹이 펼친 세기의 대결을 그렸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