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택배 건수는 27억9000만개. 생활폐기물의 40%가 포장 폐기물이다. 불필요한 포장을 줄이는 적정 포장에 동참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형님 식물입니다. 오늘 살아서 갈 수 있을까요?” 택배로 받은 골판지 상자에 인쇄된 애절한 문구에 웃음이 터졌다. 얼른 포장을 풀어 주문한 테이블 야자 화분의 생사를 확인했다. 택배 기사를 향한 식물의 호소가 없어도 화분은 무사히 왔을 테지만, ‘취급주의’라는 딱딱한 명령보다 훨씬 온기가 돈다. 전남 해남군에서 온 고구마 택배 상자를 여니 상자 날개에 고구마 관리법이 적혀있다. 고구마는 차가운 냉장고에 보관하면 죽는단다.(고구마도 살아있다!)
전자상거래 시대의 판매자와 소비자는 골판지 상자로 만난다. 상자가 말을 걸고, 정보를 전달한다. 무엇이든 비대면으로 처리하는 요즘, 멀리 떨어진 누군가와 접점이 되는 택배와 포장에 담긴 메시지 한 줄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런 박스를 또 만났다. 재생지로 만든 포장 박스에 노인의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자주자주 통화하자’는 문구가 담겼다. 지난 4월 알뜰폰 브랜드 에스케이(SK) 세븐모바일이 예비 사회적기업 ‘아립앤위립’과 손잡고 휴대전화 배송 박스와 유심칩이 담긴 봉투를 친환경 소재로 교체한 패키지를 선보였다. 아립앤위립은 골판지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리는 노인들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 대체 일감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골판지를 이용한 페이퍼 트레이와 인테리어 소품으로 출발한 이 업체는 노인들의 손 그림엽서와 노트, 마스킹테이프 굿즈 등을 내놓았다. 노인들이 만들고 저작권료도 노인에게 돌아간다. 이들이 참여한 단말기 상자는 포장과 배송의 역할을 다 하면 필기구 정리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상자 옆면 절취선대로 자르고 접으면 완성이다.
플라스틱, 비닐 팩 등에 담겼던 상품의 포장재가 바뀌는 중이다. 온라인으로 이동한 구매 형태가 포장 방식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체감한다. 알약의 개별 포장 용도로 1960년대 초 처음 고안된 포장법인 ‘블리스터 팩’이 있다. 건전지나 문구류, 컴퓨터 마우스나 유에스비 저장장치, 스마트폰 충전기 등을 감싼 투명 플라스틱 포장을 떠올리면 된다. 뒷면에 종이나 필름지를 부착한 경우면 그나마 낫지만, 앞뒷면 모두 플라스틱으로 맞물린 포장은 울화통이 터진다. 뜯다 보면 인내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영미권에는 ‘포장 분노’(Wrap rage)라는 표현도 있다. 매장 진열의 편의성을 높이고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데는 유용한 포장법이었으나 택배 상품이라면 굳이 뜯기 힘든 포장재를 사용해 플라스틱 공해를 더할 이유가 없다. 이전에 분명 블리스터 팩으로 포장했던 물건이 최근엔 종이상자에 담겨 온다.
알약을 제외하고 가장 늦게까지 블리스터 팩 포장을 고수할 물건이 뭘까 생각해본다. 마트나 슈퍼마켓 등 오프라인 매장의 필수품이며 포장이 벗겨져 위생 문제가 생기면 곤란한 제품. 칫솔이다. 뜯기는 수월해도 뒷면 종이나 필름이 깔끔하게 벗겨지지 않아 분리배출 때마다 시험에 들게 한다. 재활용 스트레스도 ‘포장 분노’에 포함될까? 기업들이 포장재 변경과 포장 다이어트로 친환경 홍보에 한창인 요즘, 국내 생수 브랜드 최초의 무라벨 페트병 ‘아이시스8.0 에코’ 소식이 상쾌하다. 무색・투명 페트병의 재활용 품질을 높이려면 소비자가 라벨을 제거해 배출해야 하는데, 제거가 쉬운 포장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5년마다 실시하는 ‘전국폐기물통계조사’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연간 국내 발생 생활폐기물 약 1900만t 중 약 40%가 포장 폐기물이었다. 한국통합물류협회는 2019년 총 택배물량을 27억9000만개, 국민 1인당 택배 이용횟수는 연 53.8회로 집계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는 이를 크게 웃돌 전망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탱하는 택배. 요즘은 사람보다 더 자주 만나는 택배 상자의 포장 폐기물이다. 이젠 좀 더 가벼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골판지 상자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박스테이프를 뜯고 그 안을 들여다볼 차례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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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종이테이프, 날개박스…친환경 포장재 시대 열리나?
택배 늘면서 포장 폐기물도 느는 현실
최근 혁신소재와 아이디어로 탄생한 포장재들
무음·종이·검 테이프, 친환경 접착제 사용 ‘날개박스’
옥수수 전분 추출물 활용한 포장재 등
비대면 시대, 택배가 쏟아지는 요즘 필환경 포장재도 중요한 화두다. 클립아트코리아
반가운 택배에 애물단지 포장 폐기물이 따른다. 첫 등장 때는 혁신적인 소재였어도 시간이 흐르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밝혀지면서 “이제 그만!”을 외치게 된 소재도 많다. 익숙한 포장재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았다.
택배 상자의 윗면을 밀봉하는 박스테이프 한쪽 끝을 살짝 접어 붙인 포장 상자를 받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테이프 모서리를 찾아 손톱으로 긁거나 칼을 대지 않고도 테이프를 깔끔하게 뜯는 방식이다. 사려 깊은 어떤 이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주문한 상품을 기분 좋게 마주할 수 있게 하는 ‘테이프 끝 접기’ 포장법은 인터넷 쇼핑업계에 꽤 널리 퍼졌다. 재활용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골판지 박스는 테이프나 송장 등을 깨끗이 제거해 펼쳐서 버리는 게 올바른 분리 배출법이다.
뿌드득. 찌이이익. 박스테이프를 뜯는 소리를 매일 들어야 하는 포장 작업자에게는 그 소리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터. 무소음 테이프 제조사가 있다. 중소기업 럭키는 테이프를 사용할 때 나는 소음을 측정했는데, 76㏈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나 전화벨 소리와 비슷한 정도란다. 럭키가 생산하는 스트레치 필름은 사용할 때 박스테이프 특유의 소리가 거의 안 난다.
사용할 때 소리 나는 박스테이프의 정식 명칭은 오피피(OPP·연신폴리프로필렌) 테이프다. 오피피 필름이 개발된 1950년대 이전에는 식물 셀룰로스를 화학 처리한 최초의 합성 포장재인 셀로판이 있었다. 1909년 개발된 셀로판에 접착제를 바른 것이 1930년 리처드 드루가 발명한 셀로판테이프다. 스카치 테이프라는 상품명으로 널리 알려진 제품이다. 각종 물건을 수리하고 의료 분야에도 쓰이는 테이프는 우리 삶에 빠질 수 없는 발명품이 됐다. 스마트폰 안에도 수십개의 테이프가 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박스테이프의 운명은 포장을 풀면 역할을 다하고 폐기물이 되는 순서를 밟는다.
기존 소재와 결을 달리하는 박스테이프를 포장에 쓰는 곳이 늘고 있다. 크라프트지에 접착제를 바른 종이테이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종이테이프도 겉면에 필름을 부착한 제품은 택배 상자와 분리해 배출해야 한다. 포장 부자재를 생산하는 서경테이프는 접착제와 테이프 필름을 유기물과 생분해가 가능한 필름을 이용해 만든 제품을 내놓았다. 우표처럼 물로 붙이는 테이프도 있다. 검 테이프(gummed tape) 혹은 물 활성화 테이프(water activated tape)는 크라프트지에 전분 등의 수용성 고분자를 발라둔 것으로 물을 묻혀 부착한다. 따로 폐기할 필요가 없는 친환경 포장재로 주목받고 있다.
박스테이프를 아예 쓰지 않는 조립식과 접착식 포장 박스도 있다. 12년차 택배 기사였던 황금찬(48)씨와 중소기업에서 기계설계를 하던 동생 황규찬(44)씨가 협력해 2018년 출시한 날개박스는 테이프 뜯는 소음과 테이프 폐기물이 ‘제로’다. 테이프 없이 조립하는 데, 벌어지는 건 친환경 ‘핫멜트’ 접착제를 사용해 보완했다. 일반 상자보다 80~90% 비싸지만, 최근 친환경 배송에 관심 갖는 업체들의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록시땅코리아 등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객을 상대하는 화장품업체가 날개박스의 고객이다. 한진택배는 자사 택배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날개박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휴를 맺었다. 황금찬씨는 개발 계기를 말했다. “택배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테이프 소음 문제를 접했다. 전화로 고객을 상대하는 이들은 테이프로 포장하는 소리가 고객에게 전달될까 노심초사한했다.” 황씨는 모니터, 수박, 와인병 등 취급이 까다롭고 무거운 제품을 보호하는 종이 완충제 포장도 개발을 마치고 곧 상품화를 앞두고 있다.
테이프가 필요없는 ‘날개박스’의 포장재. 에코라이프패키징 제공
2016년 김수일 포장개발 연구소가 농림부에 제출한 ‘택배유통 중 클레임 발생 최소화를 위한 사과, 배 택배 포장 시스템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택배 수송 환경을 계측한 결과, 배송 과정 중 17~27회의 진동·충격·낙하가 발생하고 있었다. 유리나 액체류처럼 파손되기 쉬운 물품이나 충격을 받아 가치가 떨어지는 농산물의 경우 완충재가 필요하다. 에어캡(버블랩), 일명 ‘뽁뽁이’가 사용된다. 하지만 제품 손상 방지 용도인 에어캡을 풀다 보면 고개가 갸웃한다. 에어캡을 포함한 비닐봉지로 가득한 박스를 보면 말이다. 보호 대상인 제품보다 포장재에 압도된다.
에어캡을 창문에 붙여서 단열용으로 쓰는 게 기발한 생활의 지혜로 알려졌지만, 애초 에어캡을 발명한 이들이 생각한 용도도 벽지와 단열재였다. 1957년 마크 샤반와 앨프리드 필딩은 플라스틱으로 된 새로운 벽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공기를 품은 포일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이것의 쓸모가 포장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실드에어사를 설립해 1960년 버블랩이란 이름으로 홍보에 나섰다. 아이비엠의 대형 컴퓨터인 1401 모델이 처음 에어캡을 두르고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이후 벽지로는 호응이 없었던 에어캡이 포장재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에어캡을 대신하는 종이 완충재. 사진 지구를 지켜라 리팩 오랩 제공
완충재로 익숙한 또 하나의 소재는 스티로폼이다. 정식 이름은 발포 폴리스티렌 (EPS· expanded polystyrene)으로 미국의 화학기업 다우케미컬과 독일 바스프사의 상품명이 해당 제품군의 호칭으로 굳어진 경우다. 1950년대 초 두 기업이 상업화를 시작하며 단열재와 포장재 등에 이용되었다. 발포제를 함유한 작은 구슬 형태의 폴리스티렌을 증기로 가열하면 원래 크기의 40배까지 팽창한다. 이처럼 경제적이고 무게가 가벼우며, 성형이 쉽고 단열 효과를 내며, 곰팡이가 피지 않는 재질이라서 스티로폼은 그야말로 완벽한 포장재로 보였다. 하지만 스티로폼 박스는 부서져 조각나기 쉽고, 큰비가 오면 물에 떠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그물의 부표로 매달던 스티로폼은 햇빛에 오래 노출되면 가루처럼 부스러지고 해양생물이 섭취해 생태계 교란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올 우려도 있다. 결국 스티로폼 등으로 바다로 흘러들어 간 환경호르몬은 인간에게도 치명적인 해가 된다. 세계 각 도시와 국내 기업들이 스티로폼 사용을 적극적으로 줄이는 이유다.
생분해성 소재로 만든 쇼핑 봉투. 사진 프로팩 제공
기업들이 포장재를 친환경 소재로 바꿀 때 자주 등장하는 게 있다. 식물자원에서 추출한 젖산을 이용한 피엘에이(PLA)나 생분해성 고분자(PBAT) 등이다. 이를 이용한 플라스틱 대체품이나 에어캡 등이 이미 시중에 있다. 이런 소재가 생분해되기 위해서는 58℃ 전후의 온도와 일정한 습도 등의 환경이 필요한데, 자연적으로 분해 조건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대부분 일반 쓰레기로 분리 배출해야 한다. 에어캡 대신 옥수수 전분 100%를 사용한 동글동글한 친환경 완충제도 시중에 출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땅에서 썩고 물에 금방 녹는다.
최근 생분해 봉투 생산업체 프로팩이 별도의 퇴비화 시설이 없어도 상온과 습도에서 100% 분해가 가능한 원료의 특허를 취득했다. 프로팩은 국내 대표적인 친환경 봉투 생산업체다. 10년 전 코리아바이오폼(현 비지에프 에코바이오)은 폴리스티렌 대신 피엘에이에 발포기술을 적용해 기존의 스티로폼이 가진 장점을 살리고 환경호르몬 용출 등의 문제점을 개선한 바이오폼을 개발했다. 해외에서는 해초, 갑각류 껍질, 버섯 균사체 등을 활용한 스티로폼 대체제로 소개된 바 있다.
생분해성 소재로 만든 쇼핑 봉투. 사진 프로팩 제공
택배 상자에 에어캡 대신 딸려온 동글동글한 옥수수 전분 완충제을 물에 녹이거나 크라프트지 완충제를 골판지 상자와 함께 정리하다 보면 덜 쓰고 아낄 궁리를 하게 된다. 최근 옥수수 전분 완충제를 화분에 거름용으로 쓸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플라스틱으로 누렸던 풍요와 편리 속에서 잊힌 감각이 피어난다. 오염과 폐기물을 줄이는 기술을 반기는 한편, 걱정은 남는다. 소비하고 버리는 양과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참고 자료 <이러다 지구에 플라스틱만 남겠어> <쓰레기, 문명의 그림자> <역사를 수놓은 발명 250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