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8일 서울 마포구 <청년의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재영 작가.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제공
“여행이 즐거운 건 여행이 곧 끝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는!” 지난해 가을 타이에 동행한 승우여행사 이원근(44) 대표가 말했다. 그 얘길 출장 마지막 날 들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지막 날도 아닌데 일상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할 뻔했다. ‘여행 준비’가 취미인 사람은 어떨까. 지난해 11월 <여행준비의 기술>을 펴낸 박재영(50) 작가는 “마지막 날은 당연히 아쉽지만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는 책 집필 배경을 이렇게 썼다. ‘언제 갈지 기약도 없고 결국 못 가지 싶은 낯선 곳의 지도도 열심히 들여다봤건만, 전 세계의 국경들이 사실상 폐쇄되는 상황에 놓이니, 모든 게 시들해졌다.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취미는 여행 준비이지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지난해 12월28일 서울 마포구 <청년의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재영 작가는 “그냥 웃자고 쓴 책”이라고 말했다.
박재영 작가는 취미만큼이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 인턴 1년, 공중보건의 3년 생활을 마쳤다. 그 뒤 바로 온라인 매체 <청년의사> 편집국장(1999~2011년)에 이어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팟캐스트·유튜브 ‘나는 의사다’, 팟캐스트·네이버 오디오 클립 ‘yg와 jyp의 책걸상’ 프로듀서 겸 진행자이기도 하다.
―의사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정신과 레지던트를 할 생각이었다. 그 무렵 의료 전문 매체 <청년의사>가 본격적으로 언론사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상근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의학을 공부한 저널리스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의사와 환자는 가까워야 하는 관계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그 가교 구실을 하고 싶었다.
덴마크의 새 명물 포레스트 타워에 올라 아래를 찍은 사진. 사진 박재영 제공
그는 작가다. 현재까지 책 8권을 썼다. 1994년, 2008년 방영된 드라마 <종합병원>(MBC) 두 편의 원작인 <종합병원 청년의사들>(공저)과 <종합병원 2.0>을 펴냈다. 1999년엔 요리 에세이도 썼다. “음식에 관심 많고 미각이 예민한 편”인 그는 “평생 전업주부로 산 어머니께 추억을 만들어드릴 겸” “1년간 집중적으로” 작업해 어머니의 레시피 152개와 그의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냈다. 하지만 그는 대표작으론 2013년에 낸 <개념의료>를 꼽는다. 시민, 의사들에게 국내 의료 시스템 역사와 실상을 알리려고 쓴 책이다. 그는 “다른 책에 비해 압도적으로 공을 들인 책”이라며 “아마도 평생 가장 보람찬 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7년 만에 때아닌 ‘여행 준비’를 주제로 책을 낸 이유는?
“약 10년 전부터 쓰려고 했다. 제목까지 정한 책이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여행 못 가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여행 준비 책을 쓰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내 여행담보다 여행 준비 이야기를 즐거워했다. 그들이 ‘재밌는 책이 될 것’이라며 부추겼다.”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등대. 사진 박재영 제공
―나이 서른에야 취미가 ‘여행 준비’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학창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선생님들이 그랬다. ‘독서가 취미라고 하지 마라. 독서는 생활이다.’ 좀 억울했다. 서른살 즈음 누군가 또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불현듯 내가 ‘여행 준비’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10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애독 잡지 <월간 시각표>(기차, 고속·시외버스, 여객선, 비행기 출발·도착 정보와 가격 등 정보를 제공하는 책)를 읽었고 누나의 교과서 ‘사회과 부도’를 누나보다 많이 봤다. 여행 가이드북과 지도책을 사 보곤 했다. 맘에 꽂히는 곳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붙이고 형광펜으로 칠했다.”
요즘 박재영 작가는 매일 수시로 ‘별’을 찍는다. 하늘에 있는 별이 아니라, 구글 지도에 찍는 별(특정 장소를 기억할 목적으로 인터넷 지도 위에 별 모양을 표시하는 기능)이다. 그의 구글 지도엔 천개가 넘는 별이 반짝이고 있다.
―가장 최근 ‘별’ 찍은 장소 중 기억나는 곳은?
“지난주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를 읽다가 ‘별’을 찍었다. 덴마크 북부 해안 도시 스카겐에 있는 한 교회다. 소설은 해풍에 밀려온 모래에 파묻혀 첨탑만 남은 그 교회를 길게 묘사했다. 찾아보니 실제 지명이었고, 예전 덴마크 여행을 준비할 때 ‘별’을 찍어 둔 곳이었다. 짜릿하고 기뻤다.(웃음) 또 한 곳 ‘별’을 찍은 곳은 캐나다 퀘벡주 남부 소도시 ‘셋포드마인즈’다. 소설에서 석면 광산으로 한때 번성했다가 쇠락한 지역으로 나오는데 실제 있는 도시다. 그쪽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들러 볼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표시했다. 외국 소설은 실제 지명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 권 볼 때마다 ‘별’ 한두 개씩은 찍는다.”
일본 나오시마의 대표 조형물 `빨간 호박' 안에 들어간 박 작가. 그는 다시 가고 싶은 곳 중 하나로 나오시마를 꼽았다. 사진 박재영 제공
―별을 찍고 나선 뭘 더 하나?
“그때그때 다르다. 캐나다 퀘벡주에 있는 도시라면 직항으로 갈 수 있는 주변 도시부터 찾는다. 근처에 갈 만한 곳을 더 검색하고, 반경 200㎞ 이내로 범위를 넓혀 지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식, 쇼핑, 축구 경기장, 명소 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용 후기를 훑어본다. 그런 장소들이 쌓이고 쌓여서 ‘별’이 많아지면 언젠간 그 지역에 갈 확률이 높아지는 거고, 별 개수가 얼마 안 되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거다.”
그는 ‘여행 준비’를 단지 수단이나 골치 아픈 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적어도 내 생각으론, 여행 준비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는 행위이며, 여러 장점이 있다.”
―여행 준비의 장점은 무엇인가?
“인생은 짧고 여행할 시간은 더 짧고 돈은 늘 모자라다. 여행 준비를 할 땐 수많은 선택지를 놓고 고르는 경험을 한다. 그건 나에게 가장 즐겁고 보람찬 일을 선택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세상의 끝 분위기가 나는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 사진 박재영 제공
그는 취향이 분명하다.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에 두세 차례 방문했을 때 대표 관광지인 영국박물관(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았다. 대신 테이트모던, 퐁피두 센터 등 근현대 미술관이나 축구장을 찾았다. 그는 “고대 미술품이나 유물은 어렵고 관심이 적다. 남들이 좋다는 데 말고 내가 좋은 데를 가야 한다”고 말했다.
―여행 준비라는 취미, 단점은 없나?
“모든 취미가 그렇듯 누군가에겐 즐겁고 누군가에겐 재미없는 일이다. 여행 준비가 즐거운 사람에겐 단점이 없다. 돈도 별로 안 들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유용하다.”
그는 캐나다 밴쿠버 여행을 앞둔 지인들에게 종종 ‘바드 온 더 비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을 체험하길 권한다. 매해 6~9월 바닷가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연극 축제다. 그는 캐나다에 가본 적이 없다. 오로지 ‘여행 준비’로 얻은 정보다. 인터뷰 중 그가 물었다. “최근 가장 맘에 든 여행지는 어디?” 난 얼마 전 전남 신안군 흑산도를 다녀온 얘길 신나게 떠들었다. 적당히 추임새를 넣던 그가 말했다. “역시 아이스 브레이킹(서먹한 분위기를 깨는 일)에는 여행 얘기가 가장 좋다.”
스페인 고속도로의 귀여운 표지판. 사진 박재영 제공
―‘여행 준비’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게 많다.
“후보 여행지를 잔뜩 만드는 게 중요하다. 방송, 책, 신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근사한 곳들을 수집하는 게 첫 단계다. 그중 좋아하는 장소를 추린다. 실제 착수하려면 기념일이나 적금처럼 여행의 명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최종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땐 일정의 20%를 빼서 빈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현지에서 유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도 생기기에. 현지에서 ‘우아하게 돈 쓰는 데 필요한 영어’도 몇 마디 외워두는 게 좋다.”
―여행 기념 자석을 모으는 사람은 봤지만 만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
“여행이 어려운 곳을 다녀온 나만의 징표로 ‘냉장고 자석’이 좋은데 안 파는 여행지가 있다. 처음엔 포기했는데, 가볍고 납작한 물건에 양면테이프로 종이 자석을 붙이니 ‘냉장고 자석’이 됐다. 그 뒤론 미술관이든 식당이든 얇고 예쁜 물건이 있으면 눈여겨본다. 집 벽면에 철판 두장을 붙여 ’냉장고 자석 갤러리’를 만들었다.”
박재영 작가는 여행 기념 자석을 사거나 직접 만들어 집 안 벽 한쪽을 '자석 갤러리'로 꾸몄다. 사진 박재영 제공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에게 사인을 청했다. 그는 책 내지에 ‘일상을 여행처럼 인생은 관광객 모드로’라고 썼다.
―무슨 뜻인가?
“여행을 가면 평소보다 부지런하게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고 예민하게 이것저것을 궁금해한다. 평범한 일요일 하루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한편으론 인생 자체가 긴 여행이니까, 지구별에 몇십년 놀다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너무 집착하지 말고 즐겁게 둘러보고 가자는 취지다.”
처음 <여행준비의 기술>이란 제목을 보고 ‘또 하나의 정신 승리’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유머라는 진통 주사를 맞고 호기심이란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온갖 장벽에 가로막힌 요즘, 그가 매일 여행 책과 지도를 뒤적이며 여행을 상상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놓지 않는 일처럼 보였다. 오늘 할 여행 준비를 내일로 미루지 말지어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yg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