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오른쪽)이 지난 1월 스프링캠프 때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1998년)에 자신을 맞혔던 가와지리 데쓰로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종범 제공
[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야구 해설위원 이종범
야구 해설위원 이종범
이종범의 야구는 과거다.
이종범의 야구는 현재다.
이종범의 야구는 미래다.
왜냐고? 그의 삶 속에는 ‘야구’, 그리고 ‘야구 선수’의 외길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종범(46· 해설위원)이 아마추어 선수, 해외리그에서 뛰는 후배,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베테랑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희로애락’으로 풀어본다.
희(喜)-기쁨
“어머니 우리 이제 빚 없어요?”
“그래, 이제 다 갚았다.”
그 순간이 야구를 시작하고 가장 기뻤다고 했다. 야구로 땀 흘린 만큼 대가를 받아 집안의 빚을 몇 년에 걸쳐 다 갚았다. 1988년 광주일고 졸업 후 대학(건국대) 진로를 택한 것도 사실 “국가대표를 하고 나면 프로 계약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젊은 시절 수많은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야구에만 몰두한 것도 뚜렷한 동기가 있어서였다. “집안 막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현실에 펼쳐지니까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운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돈을 많이 벌자는 게 목표였고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게 프로였으니까 더 악착같이 했다.”
이종범은 프로 데뷔 해(1993년)에 득점 1위(85개), 최다 안타 2위(133개), 도루 2위(73개)와 함께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 선정됐다. 1994년에는 타격 5관왕(타율·안타·득점·도루·출루율)에 올랐다. 당시 기록한 타율 0.393(124경기 출장)은 케이비오(KBO)리그 유일한 4할 타자인 백인천(80경기 타율 0.412·당시 MBC) 이후 가장 높은 성적이었다. 100경기 이상 출장에서 4할 타율을 유지하고 있던 선수는 지난해까지 이종범(104경기)이 유일했다. 일본 진출 전 규정 타석을 채운 4시즌(전체 5시즌) 동안 그는 꾸준하게 도루왕에 올랐다. 이종범은 “밖에 나갔을 때 ‘이종범’이라는 사람을 알아보는 게 참 뿌듯했다”고 했다.
그의 야구 열정은 고스란히 큰아들, 정후(휘문고 3)가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바람의 아들’이다 보니 ‘바람의 손자’로 불린다. 이종범은 “정후는 ‘바람의 손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면서도 “큰 키(185㎝) 때문에 겅중겅중 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잔 근육이 좋다”고 했다. 집안 형편상 어렵게 야구를 했던 자신과는 달리 “아주 편안하게 야구를 한 금수저”라고 직설도 날린다. 아들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로” 많이 하는 이야기는 ‘정신력’이다. “요즘 아마추어 선수들을 보면 멘탈적으로 약한데 정후에게도 정신력을 계속 강조한다. 그래도 집 앞 주차장에서 혼자 야구 방망이 돌리고 개인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 보면 기특하다. 정후에게 고마운 점은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해 지금껏 ‘후회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2학년 때 타율 5할을 기록했던 정후는 올해 신인드래프트 시장에 나온다. 6월 중 구단별 우선지명이 있고 8월22일 드래프트가 열린다. 이종범은 “프로에서 자기 야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아버지다.
프로 계약금 더 받고자 대학 선택
데뷔 이듬해 5관왕, 0.393 타율
1998년 일본 진출 첫해 팔꿈치 부상
류현진·강정호와 같은 28살의 악연
3~4개월 쉬는 동안 타격감 잃어 2007년 은퇴 권유받았으나 거부
10번째 우승, 2년 뒤 유니폼 벗어
레전드 대우 부족한 풍토에 아쉬움
예능프로 출연해 노래 불러 화제
“지도자 제의 오면 가고 싶다” 노(怒)-노여움 1998년 6월23일. 절대 잊히지 않는 날짜다. 이종범은 이날 한신 타이거스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진 공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았다. 맞는 순간부터 부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큰 부상이었다. 그때 그는 병원에서, 집에서 펑펑 울었다. “이전까지 큰 부상도 없었고 뼈가 부러지지 않는 한 경기에 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봉 8000만엔(8억5000만원)이면 옵션이 8000만엔이던 시절이어서 5년 정도 풀타임을 뛰면 우리 가족 평생 돈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모든 게 어긋났다. 일본 진출 첫해에 많은 것을 못 보여주고 다쳐서 더 분노한 것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한동안 못 한다는 것도 화가 너무 났다.” 국제통화기금(IMF) 시대, 일본프로야구는 그야말로 황금의 땅이었다. 하지만 몸에맞는공 하나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돌이켜 보면 과욕이 화를 부른 것도 같다. “28~29살 때는 의욕이 완전 충만하고 겁도 없는 나이다. 맞는 게 두렵지 않은 시기이고 눈앞에 성공이 보이니까 타자 박스 안쪽으로 더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초반에 그렇게 해서 성적이 났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결정을 했던 게 후회되지는 않는다.” 팔꿈치 골절 이후 3~4개월을 쉬면서 타격감을 완전히 잃었다. “안쪽에 핀을 박은 게 부담스러웠는지 방망이가 계속 가슴에 못 붙여 나왔다. 인코스에서 아웃코스로 방망이를 끌고 나와야 하는데, 아웃코스에서 인코스로 들어왔다. 타격 메커니즘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타격 리듬감이 흐트러졌고 자신감도 떨어져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 ‘아차’ 하는 한순간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 생각했던 모든 게 무너졌다.” 이종범은 지난 1월 스프링캠프 때 한화 투수 인스트럭터로 와 있던 가와지리와 조우했다.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이제 괜찮다”며 묵은 감정을 털어냈다. “일부러 맞힌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종범도 알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미국프로야구에 진출한 류현진(29·LA 다저스)도, 강정호(29·피츠버그 파이리츠)도 이종범처럼 의욕 충만한 28살에 수술대에 올랐다. 류현진은 왼쪽 어깨 수술을, 강정호는 무릎 수술을 했다. 국내리그가 아닌 해외리그에서 다치고 재활까지 이어가니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 이어진다. 이종범이 느꼈던 감정을 그들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을 터. 이종범은 “부상을 당하면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이 뚝뚝 떨어지게 마련이다. 류현진이나 강정호도 그런 위험요소가 있다”며 “당장 복귀하면 아마 맨 처음에는 두렵겠지만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한 단계 더 올라선다”고 조언했다.
애(哀)-슬픔
2007년 시즌 타율 0.174(84경기). 시즌 중반 이후 2군에도 내려갔다. 그의 전매특허인 도루는 3개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구단은 그에게 은퇴를 권유했다. 하지만 초라한 모습으로 타이거즈 유니폼을 벗기는 싫었다. ‘그라운드에 못 나갈 수도 있겠다’는 서글픔이 그를 엄습했다. 연봉(5억원→2억원)은 삭둑 잘렸다. 이듬해 절치부심하며 타율을 0.284까지 끌어올렸지만 그래도 구단의 시선은 차가웠다. 거듭 플레잉코치직을 제안했다. 그는 거절했다. 고맙게도 여론 또한 그의 편이었다.
2009년, 그는 더그아웃의 리더로 ‘팀보다 앞선 개인은 없다’는 전통의 타이거즈 정신을 앞세워 팀의 10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기아’라는 이름을 달고는 첫 우승이었다. 123경기 출장, 타율 0.273으로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이후 은퇴 이야기는 한동안 사그라들었다. ‘이종범’이라는 이름에 맞게 은퇴 시기는 그가 정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결론이 났다.
그리고 2012년, 개막을 1주일 앞두고 그는 스스로 유니폼을 벗었다. 팀 선배이기도 했던 선동열 감독 부임과 함께 “1년 더 해보자”는 말을 들었고 캠프에 참가해 열심히 몸을 만들었으나 막상 1군 엔트리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타월을 던질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42살 된 선수가 2군에서 아들뻘 되는 선수들과 경쟁한다면 말이 안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2007~2008년 은퇴 권유를 받았을 때는 ‘이제 선수 끝자락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면 2012년 은퇴 발표 때는 과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했기에 조금은 황당하고 열도 받았다.”
이종범은 지금 이병규(41·LG)나 홍성흔(39·두산)에게서 2007~2008년 때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한발 앞서 경험을 했던 선배로서 이종범은 “(이)병규나 (홍)성흔이나 공정한 경쟁 끝에 실력에서 밀리면 납득이라도 할텐데 기회조차 없으니까 본인들이 꽤 답답할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짜증도 나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4일 현재 이병규는 아직도 2군에 머물고 있으며 홍성흔은 외국인선수 닉 에반스가 타격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올라왔다. 이병규와 홍성흔의 모습은 과거 이종범의 모습이었고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의 미래일 수도 있다. “한국 야구의 레전드 대우는 미국, 일본과 비교해 많이 아쉽다. 미국 같은 경우는 30~4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레전드 대우를 해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레전드가 버려지는지 모르겠다. 야구 레전드의 10개 구단 캠프 투어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
락(樂)-즐거움
“날 위해 힘들다 말해줘. 내가 기다릴 수 있게 해줄래~.”
이종범은 지난 3월 <복면가왕>(문화방송)에 출연해 감수성이 풍부한 목소리로 조용필의 ‘기다리는 아픔’을 불렀다. “야구 개막식에 맞춰 붐을 이뤄보고 싶은 마음”에서 출연을 결심했고, “가면 쓰고 부르니 창피한 것도 몰랐다”고 했다. 주변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은 이대진 기아 코치라고 한다. ‘하트브레이커’(지드래곤) 랩까지 소화한다고. 입담 좋은 그에게는 각종 예능프로그램 섭외가 줄을 잇지만 야구 시즌에는 야구에만 전념하고 싶다.
이제 방송 해설위원 2년차. 이종범은 “작년보다 훨씬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선수 출신들은 경기 때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해설위원은 머릿속에 먼저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내야 한다. 초보운전자가 쉽게 차선 변경을 못하는 것처럼 작년에는 ‘따까리’ 같은 비속어도 쓰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래도 해설의 ‘기승전’이 가능해졌다. 1년차 때 해설 점수가 55점이라면 지금은 70점 정도? 허구연 선배를 보면서 경험이라는 게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현장 해설 때는 오후 3시까지 야구장으로 나가고, 스튜디오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베이스볼 투나잇>) 녹화를 위해서는 오후 4시까지 방송사로 출근한다. 그날의 짝을 이루는 다른 해설위원과 각자 2경기씩 맡아서 분석을 한다. 관심도가 떨어지는 1경기는 포기한다. 이종범은 “요즘에는 해설할 때 기술적인 면보다는 선수들의 심리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면을 많이 부각시켜 주려고 한다. 해설자는 시청자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현장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하다. 2013~2014년 2년 동안 한화 이글스 코치를 하면서 느낀 점도 많다. “현장 쪽에서 지도자 제의가 있다면 가고 싶다. 선배들이 현장에 오면 나만의 야구를 할 수 없다고도 말씀하시는데 속 시원히 나만의 야구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야구 지도자로서의 희로애락을 현장에서 느끼고 싶다.”
‘바람의 아들’. 신인 시절 그의 도루하는 모습을 본 방송인 하청일이 “뛸 때마다 바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에게 지어준 별명이다. 열정의 야구 바람은 소멸하지 않는다. 잠시 다른 색깔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휘몰아칠 때를 기다리면서.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 김양희 맨 처음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보면 꼭 그날의 야구 스코어가 적혀 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맨 먼저 가고팠던 곳이 잠실야구장이었다. 혼자서 잠실야구장 구석에 앉아 캔맥주 들이켜면서 경기를 보곤 했다. 지금은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장을 찾고는 한다. 어쩌다 아들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동화도 썼다. ‘김창금의 축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데뷔 이듬해 5관왕, 0.393 타율
1998년 일본 진출 첫해 팔꿈치 부상
류현진·강정호와 같은 28살의 악연
3~4개월 쉬는 동안 타격감 잃어 2007년 은퇴 권유받았으나 거부
10번째 우승, 2년 뒤 유니폼 벗어
레전드 대우 부족한 풍토에 아쉬움
예능프로 출연해 노래 불러 화제
“지도자 제의 오면 가고 싶다” 노(怒)-노여움 1998년 6월23일. 절대 잊히지 않는 날짜다. 이종범은 이날 한신 타이거스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진 공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았다. 맞는 순간부터 부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큰 부상이었다. 그때 그는 병원에서, 집에서 펑펑 울었다. “이전까지 큰 부상도 없었고 뼈가 부러지지 않는 한 경기에 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봉 8000만엔(8억5000만원)이면 옵션이 8000만엔이던 시절이어서 5년 정도 풀타임을 뛰면 우리 가족 평생 돈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모든 게 어긋났다. 일본 진출 첫해에 많은 것을 못 보여주고 다쳐서 더 분노한 것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한동안 못 한다는 것도 화가 너무 났다.” 국제통화기금(IMF) 시대, 일본프로야구는 그야말로 황금의 땅이었다. 하지만 몸에맞는공 하나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돌이켜 보면 과욕이 화를 부른 것도 같다. “28~29살 때는 의욕이 완전 충만하고 겁도 없는 나이다. 맞는 게 두렵지 않은 시기이고 눈앞에 성공이 보이니까 타자 박스 안쪽으로 더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초반에 그렇게 해서 성적이 났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결정을 했던 게 후회되지는 않는다.” 팔꿈치 골절 이후 3~4개월을 쉬면서 타격감을 완전히 잃었다. “안쪽에 핀을 박은 게 부담스러웠는지 방망이가 계속 가슴에 못 붙여 나왔다. 인코스에서 아웃코스로 방망이를 끌고 나와야 하는데, 아웃코스에서 인코스로 들어왔다. 타격 메커니즘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타격 리듬감이 흐트러졌고 자신감도 떨어져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 ‘아차’ 하는 한순간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 생각했던 모든 게 무너졌다.” 이종범은 지난 1월 스프링캠프 때 한화 투수 인스트럭터로 와 있던 가와지리와 조우했다.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이제 괜찮다”며 묵은 감정을 털어냈다. “일부러 맞힌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종범도 알기 때문이다.
이종범(오른쪽)이 지난 1월 스프링캠프 때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1998년)에 자신을 맞혔던 가와지리 데쓰로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종범 제공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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