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8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국가대표팀 대한민국-온두라스 친선 경기에서 신태용(맨왼쪽) 감독 등 코치진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구/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축구팬들은 4년마다 ‘월드컵 스트레스’를 겪는다. 평생 축구만 했으면서 ‘공을 그렇게 못 차냐’라는 선수 비난에서부터 감독이나 대한축구협회를 향한 분노가 폭발한다. 하지만, 투혼과 체력만을 앞세우고 승부에 집착하는 한국식 축구로는 기술축구를 구사하는 유럽과 남미팀을 넘어설 수 없다. 일대일 대결에서 상대를 따돌릴 기술이 없다면 1등급 축구대표팀은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니즈니노브고로드, 로스토프나도누, 카잔에서 이뤄진 대표팀의 월드컵 여정을 현지에서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보름간의 월드컵 ‘희망고문’이 끝났다. 성적표는 1승2패, 16강 탈락이다. 1차전 스웨덴, 2차전 멕시코와 경기에서는 개인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기력의 차이를 절감했다. 투혼과 열정으로 3차전 독일전 승리를 거뒀지만, 한국 축구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서는 선수의 일대일 능력 등 개인기 수준에 주목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그 기초인 ‘유소년 축구 육성’에 대해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신력과 체력’에서 ‘기술축구’로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기술의 부족
아시아권의 이란,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16강에서 탈락했으니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정이 다르다. A조에서 막판 역전승으로 승점 3을 챙긴 사우디아라비아나, 포르투갈을 탈락 위기로 몰아쳤던 B조의 이란, C조에서 탄탄한 전력을 보여준 호주는 일대일 능력에서 한국보다 우위였다. 일본은 훌쩍 달아난 느낌이다.
한국은 악조건 속에서 투혼을 발휘했지만, 자기 위안일 뿐이다. 월드컵에 출전한 32개국 선수 가운데 열정 없는 선수는 없다. 단판 경기는 선수단의 투혼으로 승패가 갈릴 수 있지만, 팀간 경기력의 차이는 선수의 기술력에 크게 의존한다. 감독의 전술 운용도 선수의 개인 능력이 없으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기본기는 어려서부터 닦아야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으로 성인이 돼서 기술을 장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동력을 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개인 기술의 부족 등에서 비롯된 실력 차이”라고 단언했다.
기술적 차이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다. 상대의 강한 압박이 들어오면 수비수는 허둥지둥 공을 걷어낸다.(한국 축구팬들은 우리 수비수가 공을 잡을 때 빼앗길까봐 불안감을 느낀다) 선수들은 전방이나 측면으로 공을 돌리거나 롱패스를 하는데, 일대일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건네는 공은 성공률이 떨어진다. F조 1차전에서 한국(79%)과 스웨덴(84%), 2차전 한국(82%)과 멕시코(89%)전을 보면, 한국의 패스 성공률이 더 낮았다. 3차전 한국(74%)과 독일(88%)의 격차는 더 컸다. 특히 현대 축구의 승패가 결정나는 미드필드에서의 공 점유율 열세는 한국 축구의 취약점을 보여준다. 한국은 미드필드를 왼쪽, 가운데, 오른쪽으로 3등분해 측정한 1차전 공 점유율(12%-19%-17%)에서 스웨덴(15%-33%-13%)에 뒤졌다. 2차전에서도 한국의 미드필드 공 점유율(12%-16%-18%)은 멕시코(15%-24%-20%)에 비해 열세다. 3차전에서도 한국(12%-13%-14%)이 독일(11%-22%-13%)보다 낮았다. 보통 200~700번의 패스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중원에서의 패스 하나는 골을 만드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한국 축구의 기본기 약점은 A매치(국가대표팀간 경기)와 청소년팀 경기 전적의 차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부터 이번 대회까지 3번의 월드컵에서 한국이 만난 조별 리그와 16강전 상대 10개팀을 보자. 한국은 이들 나라와 벌인 월드컵 경기 등 A매치 전적에서 대부분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23살 이하 올림픽 대표팀이나 20살 이하 청소년대표팀 등 연령별 무대에서는 대등하거나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독일과 역대 대표팀 A매치 전적은 2승2패이지만, 20살 이하 대표팀 전적(2승2무)은 한국이 우월하다. 멕시코도 마찬가지다. A매치에서는 한국(4승2무7패)이 열세이지만, 20살 이하 대표팀(3승2패)과 올림픽 대표팀(3승4무1패)에서는 멕시코는 한국보다 아래다. 아르헨티나와의 대결에서도 A매치는 한국(3패)이 고전하지만, 20살 이하팀(4승3무1패)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것은 청소년기의 강도 높은 체력훈련과 맞춤형 득점방식, 스파르타식 조직력 훈련이 불러온 ‘반짝효과’일 수 있다(이런 반짝효과도 한계에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가대표팀에서는 개인 기술 완성의 정점에 오른 유럽과 남미 선수들을 만나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창의적 플레이와 뛰어난 개인기에 맞닥뜨리는 순간 청소년 시절과는 다른 벽을 느끼게 된다. 조긍연 프로축구 전북 현대의 테크니컬 디렉터는 “요즘은 유소년부터 중고등학교 축구까지 일본에 밀린다. 그들이 수십년간 철저한 개인기 중심의 훈련을 받아왔다. 일대일에서 뚫지 못하니까 체력적으로 힘들다. 아시아에서도 한국 축구의 위상이 갈수록 떨어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일본 축구는 러시아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 최고의 성적을 냈다. 한-일 축구 전적 비교에서도 일본의 전력 강화가 엿보인다. 1954년부터 시작된 한일전 A매치에서 한국(41승23무14패)은 절대 우위다. 하지만, 2000년 이후 A매치만 보면 한국과 일본이 4승7무4패로 백중세다. 연령별 대표팀 축구에서도 일본의 반격이 시작됐다. 1992년 이래 23살 이하 올림픽 대표팀 전적은 한국이 6승4무5패이고, 1959년 이래 20살 이하 대표팀은 28승9무6패로 우위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는 올림픽팀(3승4무3패)과 20살 이하팀(12승6무4패) 대결에서 한-일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다.
입시에 목매는 축구
개인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지녔더라도 지도자나 시설, 프로그램 등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대성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한국에서 나온 기술형 선수들은 국내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거나, 나라 밖의 시스템에 의존한 특이한 사례가 많다.
한국 최고의 공격수 손흥민(토트넘)의 경우 아버지 손웅정씨가 만든 ‘자가 교육형’ 천재다. 프로축구 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하루 수천개의 공 리프팅을 시키는 등 지독하게 아들을 다그치는 한편, 틀에 박힌 공격수를 만드는 승부지상주의 학원 축구의 폐해에서 아들을 비켜가도록 했다. 시야와 패스에서 발군인 기성용(스완지시티) 역시 중학 시절 호주 유학을 통해 선진 축구의 시스템을 경험했다. 월드컵에서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이승우(엘라스 베로나) 역시 FC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육성학교인 ‘라 마시아’의 세례를 받았다. 포항 유스클럽에서 고교를 마치고 유럽 무대로 옮겨간 황희찬(잘츠부르크)도 소속 클럽의 교육환경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소속팀에서 확실히 스프린트(단거리 전력질주) 연습을 많이 한다. 그런 식의 훈련에 집중한다”고 했는데, 이번 월드컵 기간에 황희찬의 스프린트는 가장 많았고 영양가도 높았다. 유럽파인 구자철 역시 “확실히 월드컵에서 만난 상대와 기술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전술적인 준비를 잘해야 한다. 또 한국 축구에 맞는 좋은 시스템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소년 축구 육성이나 축구 기본기 교육, 저변 확대 등은 축구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지속된 말이다. 문제는 알면서도 바꾸지 않은 것이지, 몰라서가 아니다. 이슬기 해설위원은 “확실히 외국에서 배운 선수들은 시스템을 얘기한다. 외국의 시스템이 갖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이제는 말로만 하지 말고 실행에 옮겨 토양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축구협회도 움직이고 있다. 협회는 지난 4월 독일 출신의 미하엘 뮐러(53)를 ‘지도자 수석강사 겸 유소년 정책수석’으로 3년 영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독일 축구에서 20년 경력을 쌓은 뮐러 강사는 지도자 교육 방향과 유소년 육성 정책을 수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뮐러 강사는 “유소년 축구의 핵심은 즐기는 것이다.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협회는 또 초등학교에서는 11대 11이 아니라, 8대8 방식으로 경기하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8인제는 작은 경기장에서 수시로 선수를 교체할 수 있다. 지도자는 경기 중에 일절 선수들에게 큰소리를 칠 수 없다. 선수들이 알아서 상황을 관리하도록 만든다. 다만 전·후반 각 2분씩 코칭 타임을 둬 작전 지시를 할 수 있다. 실수하면 감독이 앉아 있는 벤치 쪽 눈치를 보는 수동적인 축구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주체성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유소년 지도자 한 명을 데려오고 8대8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만으로 유소년 축구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은 프로구단이나 지역 차원에서 축구클럽 문화가 정착된 독일과 달리 학원 축구 중심이다. 최근엔 클럽축구가 확산되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입시 제도, 학부모와 지도자의 관계, 축구협회나 프로연맹의 재정 문제 등 한꺼번에 풀기 힘든 여러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정부는 ‘공부하는 선수’ 정책으로 축구 주말 리그를 시행했지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주말에 운동장을 구하기도 힘들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지자체 교육청에 따라서는 학원 운동부의 학교 내 합숙소를 인정하지 않고, 학교 밖에서 클럽 형태로 선수단을 운용하도록 하는 등 완전히 새로운 축구 문화를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과도기적 상황에서 불안한 학원 축구 지도자들은 학교 운동장도 돈 내고 사용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선수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감독이 종속적 위치에 놓인 것도 학원에서 기술 축구의 문화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조건이다. 급여를 학부모의 회비에 의존하는 지도자들은 전국대회 8강·4강 입상에 올인해야 한다. 학부모는 대학 입시에서 좀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성적을 원한다. 감독이 자기 철학을 갖고 선수들의 개인 역량을 끌어올리기보다는 약속된 플레이로 득점하는 방식에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 대학 축구 감독은 “유소년 축구나 기술 축구를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지도자의 복지와 처우 개선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수익금 중 일정 부분을 고정적으로 떼어내 기금을 조성해 지도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일정 평가 기준을 만들어 유소년 축구에 공헌한 지도자들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고, 장기적으로 이들의 복리후생을 위한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막판 투혼으로 독일전 이겼지만
선수 기술력 없이는 한계 뚜렷
패스 성공률 낮고 점유율 열세
스파르타식·맞춤형 훈련 탓
연령별 대표팀 성적 좋지만
국가대표팀 가선 한계 부딪혀
한국 유소년 축구는 입시 중심
감독, 학부모 눈치 보며 성적 연연
기술형 선수는 다 비제도권 출신
정신력·체력 강조하는 축구 넘어
기술력·창의성 중심 ‘기술축구’로
“기초부터 하나씩 제대로 할 필요”
프로축구단이 운영하는 산하의 연령별 클럽도 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찌감치 축구 선수의 길로 접어든 뛰어난 재능의 프로구단 유스 선수조차 프로팀 입단을 장담할 수 없다. 때문에 이들 역시 4강, 8강 등 팀 성적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공격적이고 자유롭게, 선수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지 못한다. 지도자가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지시하면 선수들은 짜여진 기계적인 축구를 할 수밖에 없다. 조연상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국장은 “특기자 제도에 팀 성적보다는 개인 기술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든가, 아예 특기자 제도를 손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8강이나 4강이니 하는 청소년 축구의 승부지상주의 폐해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프로팀 소속 유스 선수들이 대학 진학에 신경쓰지 않도록 23살 이하 팀을 운영해 이들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런 경우엔 구단에 재정적 부담이 따르게 된다”고 덧붙였다.
축구협회의 전략부재
단기적 문제를 푸는 방식에서도 아쉬움은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4년 주기의 월드컵이 축구 시장을 넓히고, 저변을 확대하고, 축구 붐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전략을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은 평소 “최상위 팀인 대표팀의 축구를 통해서 축구팬들에게 재미를 주고, 축구에 대한 관심을 높여 팬들이 국내 K리그(프로축구)를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강조해 왔다. 월드컵 대표팀의 성적은 한국 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외부효과다. 대표팀 모델을 통해 유·청소년 기술 축구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의 국가대표 감독 선임 과정을 보면 전략 부재가 드러난다. 신태용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것은 지난해 7월이다. 전문가들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을 경질하려면 진즉에 해야 했다. 시기를 놓치면서 신 감독이 더 어려운 상황에서 대표팀을 맡게 됐다”고 말한다. 대표팀이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에 이란,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 무승부로 본선행 티켓을 따자 또 문제가 불거졌다. 갑자기 터져나온 거스 히딩크 감독의 ‘대표팀 사령탑 관심’ 논란으로 신 감독의 지도력이 흔들린 것이다. 그를 뽑고 호흡을 맞추며 대표팀 전략 향상을 위해 자문을 해오던 김호곤 부회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월드컵을 처음 경험하는 신 감독에게 매우 필요한 참모 하나를 날린 것이다.
이영표 해설위원은 좀 더 직선적이다. 그는 “현재 한국 축구의 문제는 2011년 조광래 국가대표팀 감독을 경질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꼬집었다. 대한축구협회는 허정무호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 뒤 기술 축구의 신념이 강한 조광래 감독을 영입했다. 기술 축구를 신봉하고, 선수 장악력이 뛰어난 그는 2014 브라질 월드컵 목표를 16강 성적 뿐만 아니라 ‘세대교체’로 잡았다. 선수간 경쟁체제가 강화됐고, ‘생각의 속도’를 강조하면서 많이 뛰고 빨리 뛰는 축구로 대표팀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이청용(크리스털 팰리스)은 상대 압박에도 패스 게임으로 돌파하는 조광래식 축구를 ‘만화축구’라고 표현했다. 조 감독의 대표팀은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승점을 쌓았지만, 2011년 11월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레바논 원정에서 패배(1-2)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임됐다. 브라질 월드컵 본선까지 일관된 전망으로 기술 축구의 디엔에이(DNA)를 대표팀에 이식할 기회도 사라졌다.
여론이나 권력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인사를 하는 조직에서 장기 구상은 불가능하다.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의 몰락과 복권은 한 사례다. 1990년 월드컵부터 2002년 월드컵까지 4차례 월드컵에 출전했고, 2012 런던올림픽에서는 감독으로 나가 동메달을 일궜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는 대표팀 사령탑으로 출전했다. 국내 축구 발전을 위한 내공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지명도를 갖췄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 16강 실패 뒤 가혹한 여론의 비판을 받았고, 한 순간에 축구 무대에서 매몰된 것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영표 해설위원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옷을 벗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20년, 30년이 걸리더라도 한 자리에서 한국 축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해법을 찾는 것이 진정 책임을 지는 일이다. 책임을 묻는 게 경질이고, 책임지기 위해 떠나겠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축구국가대표팀 선수들이 27일 오후(현지시각) 러시아 카잔아레나에서 열린 독일전에 앞서 함께 모여 격려하고 있다. 카잔/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새로운 패러다임 향해
기술 축구라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 경기 특유의 팀워크, 희생, 끈끈한 팀 분위기, 조직력 등 축구의 경기력 요소는 다양하다. 하지만, 일대일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개인기 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다. 더욱이 한국 축구는 투혼이나 체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과 창의성 등 새로운 축구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상품을 내놔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J리그나 중국의 슈퍼리그 등에 비해 관중수가 2분의1~3분의1인 K리그도 흥행의 계기를 잡을 수 있다. 또 월드컵에 출전한 대표팀 경기를 불안해하지 않고 여유있게 즐길 수 있다.
“우리 선수들은 공을 빼앗기면 무의식적으로 벤치를 봐요. 유럽 아이들은 공을 빼앗기면 공 뺏은 놈을 무의식적으로 쫓아다니거든요.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유소년 축구의 현실은 지금까지 이렇게 진행됐다. 앞으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아이들이 제 멋대로 축구해요. 그래도 개인기는 끝내줘요.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어요. 요리조리 제끼는 것 보면 축구가 너무 재밌어요.”(대한축구협회 조준헌 팀장)
스포츠는 여흥이고 놀이고 재미다. 텔레비전이나 경기장에서 관전하거나, 직접 참여할 때라도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건축물을 축조하듯 기초부터 하나하나씩 쌓아가면서 제대로 할 필요는 있다.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이냐, 탈락이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4년마다 찾아오는 월드컵 축구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이제는 세계 흐름인 개인기, 기본기를 중심으로 한국 축구를 리부팅(rebooting·다시 시작) 해야 한다. 축구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카잔/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