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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성학대’ 그 악몽의 밤들을 잊고…

등록 2012-07-27 19:23수정 2012-07-28 14:36

[토요판] 커버스토리
‘아버지 성학대 극복’ 퀸 언더우드
문고리 소리에 치를 떨던 두려운 밤이여 안녕
▶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개가수 유브이(UV)가 응원가를 내놨습니다. 제목은 ‘럭 투 에브리원’. 너나, 엄마·아빠, 옆집 아줌마·아저씨, 김씨 할머니·할아버지 등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두려워하지는 마라. 우리가 뒤봐줄게. 서두르지도 마라 우리가 밀어줄게”라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 실패는 두렵지도 않다는군요. 올림픽의 진짜 메시지는 ‘승리’가 아니라, 모두에 대한 이런 응원 아닐까요?

“시애틀 중심가에 캐피스 복싱 체육관이란 곳이 있는데 말이야….”

미국 여자 복싱 올림픽 국가대표 퀸 언더우드(29·본명 콰니타 언더우드)의 삶을 바꾼 건 무심코 던진, 친구의 말 한마디였다. 달랑 조그만 링 하나에 펀치백 몇 개가 걸린, 별 볼 일 없는 복싱장. 그곳에서 언더우드는 처음으로 ‘의욕’을 느꼈다. “공연히 남들과 싸우는 걸 싫어하고 때리느니 차라리 맞는 편이 낫다”고 움츠러들곤 했지만, 처음 손에 낀 글러브의 느낌이 맘에 들었다. 그의 나이 20살 때. 그해, 복싱을 만나기 전 언더우드는 10여년간 끝이 보이지 않는 ‘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챔피언에 2점차 패배, 가능성을 보다

11살 소녀 콰니타는 밤이 두려웠다. 불 꺼진 방, 얇은 벽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때면 소녀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쳤다. 문고리 돌리는 소리에 이어 ‘삐꺼덕’ 하는 마찰음. 한 살 터울 언니와 함께 자는 콰니타의 방문이 열렸다. 눈을 꼭 감아봐도 머릿속엔 익숙한 실루엣이 선연했다. 아버지다. 콰니타와 언니가 함께 누운 퀸 사이즈 침대가 아버지의 무게에 눌려 풀썩 꺼지면, 곧 이불 속을 헤집어 언니의 몸을 더듬는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지곤 했다.

콰니타는 애써 숨소리를 고르며 자는 척했다. 깨어 있다는 걸 아버지가 눈치챘다간 언니에게 더한 일을 할까봐 두려워서다. 나중엔,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시늉을 해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새어머니가 야간 근무를 시작한 뒤로는 아예 언니를 방에서 끌고 나갔다. 그런 날이면 언니는 훌쩍거리며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콰니타는 밤마다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멈출 수 있을까.’ 정작 자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콰니타가 14살 되던 해, 아버지는 그에게도 손을 뻗쳐왔다. 새어머니와 언니가 집을 비운 날은 지옥이었다.

더럽혀졌다는 수치감, 무력감으로 떨었다. 자매는 아버지를 찌르고 집에서 탈출하는 꿈을 꾸면서도 서로에게조차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러기를 1년여, 무슨 일이었는지 콰니타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분노를 터뜨린 1998년 1월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혹시 아빠가 널 만졌니?” 언니의 물음에 자매는 꾹꾹 눌러왔던 고통스런 비밀을 서로에게 털어놨다. 자매는 10여년 전, 아버지와 이혼한 뒤로 연락이 뜸했던 친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경찰이 출동했고 ‘미성년자 성폭행’, 아버지는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징역 7년, 보호관찰 5년형이었다.

악마 같은 아버지에게서 해방됐지만 자매의 오랜 정신적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자매가 원했던 건 ‘정상적인 삶’이었다. 콰니타는 정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간호학과에 진학한 언니는 아동학대 문제 등을 공부하면서 끔찍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고자 했으나, 그는 좀처럼 길을 찾지 못했다.

빼어난 운동 실력 덕분에 고교 시절 농구·육상(단거리)·역도 선수로 뛰었고, 대학 몇 곳에서 장학금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우울증에 빠진 콰니타에겐 만사가 귀찮았다. 고교 졸업 뒤에도 목표 없이, 미래 없이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냈다’. 공군에 자원 입대하려고 했다가 신병훈련소 입소 전날 철회하기도 했고, 다량의 진통제를 삼켜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마리화나를 구할 수 있을까” “어디 파티 열리는 데 없나?” 황폐해진 콰니타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만 가득했다. 캐피스 복싱 체육관에서 캐피 코츠(56)란 코치를 만난 건 ‘운명’이었다. 그는 콰니타에게 ‘미키 골드밀’(영화 <록키> 속 록키의 코치)이었고, 또 ‘프랭키 던’(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 속 코치)이었다. 잘 단련된 근육과 정제된 몸놀림, 빠른 속도…. 그는 콰니타가 타고난 복싱 선수감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다. ‘싸움을 두려워한다.’ 복싱 선수로서 최고의 약점. 콰니타를 억누르고 있는 게 어린 시절 입은 상처라는 것도 그는 간파해냈다.

복싱을 시작한 이후 친구들은 그를 ‘퀸’(여왕)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링 위의 여왕’이 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첫 경기에서 보기 좋게 깨진 건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패배했다. “아홉번 진 뒤론 세는 것을 그만뒀다.” 퀸은 2006년 전미 선수권 대회 때 마치 물속에 있는 듯 굼뜬 몸짓으로 대회 첫날 탈락하는 고배를 마셨다. 성이 치밀었다. 며칠 동안 관중석에 앉아 다른 선수들의 몸놀림을 연구했다. ‘실망’을 ‘결단’으로 바꾸는 데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껍질을 깨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 같았다.” 코츠 코치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가 안겨준 악몽의 밤들
수치심으로 10대를 보내고
우연히 찾은 허름한 체육관에서
처음으로 의욕을 느꼈다

전미 챔피언 5관왕 이어
2010년 월드챔피언십 동메달
“런던에서 금메달 따서
같은 아픔 가진 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싶어”

‘와일드카드’라는 기적 같은 행운

달라진 퀸은 이듬해를 시작으로 다섯번이나 전미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고, 2010년 월드챔피언십에서는 미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2010년 월드챔피언십은 그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경기였다. 세계 여자 복싱 챔피언 케이티 테일러(아일랜드)를 상대로 10-2의 엄청난 점수차로 뒤지고 있던 그는 녹아웃 펀치를 날리며 18-16까지 점수차를 좁혔다. 아쉬운 패배였다. 형편없이 두드려맞고 있던 그때, 퀸을 깨웠던 건 바시르 압둘라 전 미국 올림픽 코치의 외침이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냐.”

29살. 퀸은 이제 글러브를 탄탄히 조여 매고 전세계 이목이 집중된 런던올림픽 링 위에서 공이 울리길 기다린다. 복싱을 시작한 이후 내내 꿈꿔왔던 순간이다. 케이티 테일러와 만나서 2010년의 패배를 씻는 것은 물론, 이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여성 복싱에서 챔피언이 되겠다고 벼르고 있다.

물론, 런던까지 오는 길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지난 2월 미국 워싱턴 스포캔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지만, 5월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세계복싱선수권대회에서 상대 선수에게 1점차로 밀리면서 올림픽 자동출전권을 놓쳤기 때문이다.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이 퀸에게 와일드카드를 부여할 때까지 그는 한달간 피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올림픽 출전이 결정되자 퀸은 뛸 듯이 기뻐했다. “평생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런던에 관광 온 게 아닌 만큼,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꿈을 지탱해온 원동력은 불행했던 ‘과거’였다.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고통이 시작될 거란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는 밤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링의 여왕’이 돼서 다시는 누구도 나를 상처주지 못하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이 꿈으로 오늘 여기까지 왔다.” 퀸이 말했다.

당연히 목표는 금메달이다. 그에게 금메달은 명예와 성공의 상징, 그 이상의 의미다. 퀸은 이번 금메달 도전을 고통스럽던 어린 시절과 이별하고 제2의 인생으로 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또 금메달 획득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는 용기를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나처럼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 (올림픽에서) 꿈을 이룰 수 있다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지난해 ‘리빙아웃더드림’(livingoutthedream.org)이란 누리집과 트위터 계정(@QueenUnderwood)을 만들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세상에 털어놓은 것도 이런 꿈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나는 (성적 학대) 피해자(survivor)지만, 나 스스로를 극복자(overcomer)라 부르고 싶다.” 퀸은 트위터 계정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링 위에서도 링 밖에서도 여왕이 되기 위해, 그는 오늘도 외친다. “멈출 수도 없고 멈추지도 않을 거야!”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참고: <뉴욕 타임스>, <유에스에이투데이>, <시애틀 타임스>, <석세스 매거진>, 미국 올림픽위원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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