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동메달로 복귀
부상·대표 탈락 뒤 러시아 귀화
“남은 경기 후배들과 즐기며 경쟁”
부상·대표 탈락 뒤 러시아 귀화
“남은 경기 후배들과 즐기며 경쟁”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8년 만의 올림픽 무대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뒤 안현수(29)가 오랜 침묵을 깼다. “소치에서 메달을 따면 인터뷰하겠다”던 그였다. 빅토르 안(Victor An)의 등엔 커다랗게 러시아(RUSSIA)라는 새 국적이 적혀 있었다. 질주를 지켜본 한국 팬들처럼 그 또한 ‘복잡다단한’ 감정에 휩싸인 듯했다.
안현수는 10일 러시아 소치 아이스베르크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에서 2분15초062를 기록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8년의 시간은 틈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과 지치지 않는 지구력을 무디게 했다. 안현수는 “예전에 비해 체력적으로 부족해진 건 사실”이라며 세월을 인정했다. 금빛 메달이 동메달로 바뀌었지만 세계선수권 5연패의 관록은 여전했다.
안현수는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줄곧 7명 중 4위 자리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경기를 펼쳤다. 4바퀴를 남기고 속력을 내 3위로 올라섰지만 샤를 아믈랭(금·캐나다)과 한톈위(은·중국)를 앞지르기엔 힘에 부쳤다. 러시아 관중들은 열정적인 함성으로 안현수가 아닌 빅토르 안의 질주를 응원했다.
경기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안현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동메달을 따게 돼 부담을 덜었다. 러시아에 첫 쇼트트랙 메달을 선사했다는 것도 특별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국적을 바꾸고, 부상에서 회복을 하더라도 다시 올림픽에 나설 수 있을까 걱정했다”는 그는 “이런 무대에 다시 설 수 있게 돼 토리노 대회보다 더 즐기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오랜 부담을 던 듯한 표정엔 이전 대회에선 보이지 않았던 여유가 느껴졌다.
안현수는 2008년 부상에 이어 2010년 밴쿠버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2011년 11월 러시아 국적을 선택했다. 그의 아버지 안기원씨가 인터뷰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밝혔듯이 한국 빙상의 고질적인 파벌 다툼 등에 염증을 느껴 내린 선택이었다. 이런 이력 탓에 그와 한국 선수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추측하는 기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안현수는 “한국 선수들과 불편할 게 없는데 자꾸 언론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며 “경쟁을 해야 하는 후배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과장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후배들과 남은 기간 즐기면서 경쟁하고 싶다”는 그는 “향후 계획은 올림픽이 끝난 뒤 생각해 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한편,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이날 “미국 대신 러시아를 위해 스케이트를 타다”라는 기사를 통해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한 배경을 상세히 소개했다. 신문은 당시 안현수가 귀화를 고려하면서 러시아와 함께 미국을 저울질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전 러시아 쇼트트랙대표팀 코치로 안현수의 귀화를 도왔던 장권옥 현 카자흐스탄 감독은 인터뷰에서 “안현수가 미국으로의 귀화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미국은 시민권을 얻는 과정이 복잡했고 경제적 지원도 받기 어려웠다”며 “반면 러시아는 국적을 얻기가 쉬웠고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러시아 쇼트트랙 수준도 고려했다고 장 감독은 설명했다. 결국 신문은,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하나라도 많은 금메달을 따 국력을 과시하고픈 러시아 정부의 행정·재정적 지원이 안현수가 빅토르 안이 된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박현철 기자, 소치/허승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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