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통] 선수들과 도박
젊은 나이에 성공 거뒀지만 스트레스 해소법 몰라
선배 등 권유에 ‘짜릿한 배팅 유혹’ 빠지기 일수
“개인적 일탈 치부 안돼…엘리트 육성 시스템 개선해야” 스포츠 선수들이 유독 도박의 유혹에 잘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프로구단 감독은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스포츠 선수들도 경기 안팎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데 해소 창구는 마땅치 않다. 음주, 섹스를 거쳐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결국에는 도박으로 빠지는 선수가 더러 나온다. 도박만큼 짜릿한 게 없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공인’으로 인식되는 스포츠 선수들은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 스트레스를 풀게 되고 저절로 음성적인 환경에 놓이게 된다. 파친코, 카지노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에서 전지훈련을 하다 보니 도박에 거부감이 없어진 이유도 있다. 전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영국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박성희 퍼포먼스 심리연구소 소장은 폐쇄적인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에서 원인을 찾는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엘리트 선수들이 발굴돼 키워지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운동에만 치우쳐 생활하게 된다. 삶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20대 안팎의 어린 나이에 프로의 길로 접어들면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약간의 운동장 밖 자유도 주어지면서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온다.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스스로 결정을 안 해왔기 때문에 결정에 대한 미숙함으로 도박 등 음성적인 것의 유혹을 받았을 때 뿌리치거나 상황에 맞는 좋은 선택을 하기 힘들다.” 박 소장은 더불어 “도박 등에 빠질 때 혼자서 결정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팀 선배나 또래집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스포츠심리학자인 정용철 서강대 교수 또한 학습권의 박탈과 더불어 롤모델이 되는 지도자들의 그릇된 습관 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학생 선수들은 구조적으로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가 박탈돼 있어 고립된 섬 같은 위치에 있다. 감독, 코치 등에 의한 제한된 교육에 노출돼 있는데 그들이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것은 감독, 코치가 모여 고스톱이나 카드를 치는 모습들이다. 어린 선수들에게 어른들이 좋지 못한 롤모델이 되는 것”이라며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스포츠 집단 문화에서 개인적으로 ‘아니다’ 싶어도 선배가 하자고 했을 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후배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도박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박 과정에서 불법 스포츠 베팅 사이트를 운영하는 조직과 친분관계를 쌓게 되면서 경기조작, 승부조작의 유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내재돼 있다. 축구 국가대표로도 뛰었던 최성국, 김동현이 불법 스포츠 베팅 업체의 사주로 승부조작에 가담했다가 영구 제명되고, 프로야구에서도 박현준, 김성현이 초구 볼·스트라이크와 관련한 불법 스포츠 베팅에 가담해 역시나 영구 제명의 철퇴를 맞은 게 단적인 예다. 프로배구에서도 박준범, 임시형 등 기대주들이 선배들의 유혹에 잘못된 선택을 해 프로배구에서 추방됐다. 정용철 교수는 “개인적인 도박은 나중에 승부조작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며 “일부 실업리그에서는 자신의 연봉 절반을 불법 스포츠 베팅에 거는 선수들도 있다고 들었다. 일부 선수들이 생계형 도박인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스포츠 도박의 심각성을 꼬집었다. 한국체육학회지 제54권 6호(지난 10월 말 발행)에 게재된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승부조작에 대한 인식과 예방교육 전략 연구’에 따르면 국내 4대 프로 스포츠 선수들 가운데 5.5% 정도가 승부조작 제안을 받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정영열·김진국 고려대 체육학과 강사는 2015년 등록된 선수들을 종목별로 75명 내외의 표본으로 할당해 설문조사를 했고 ‘나는 승부조작을 제안받은 경험이 있다’는 설문에 전체 응답자의 274명 가운데 15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농구 선수들이 11.5%(78명 중 9명)로 가장 높았다. ‘나는 승부조작 방법을 동료 선수한테서 들어본 경험이 있다’는 항목에서도 농구 선수의 30.8%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선수들을 상대로 한 도박 예방 교육은 수시로 이뤄지고 있으나 도덕불감증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승부조작이 법률적 범죄라고 생각한다’와 ‘나는 승부조작이 스포츠 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는 물음에 8% 정도는 법률이나 윤리 측면에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부 선수들이 승부조작 등으로 영구제명됐는데도 불감증이 여전한 것이다. 정용철 교수는 “도박을 개인적 일탈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엘리트 교육 시스템부터 개선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박성희 소장 또한 “선수들에게 어릴 때부터 삶의 균형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만 한다. 여유시간에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지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며 “봉사활동이나 다른 좋은 쪽으로 승부의 세계에서 동반되는 두려움이나 허무감을 달랠 수 있게 교육자가 도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포츠 도박의 문제는 개인, 구단의 책임에 국한되지 않고 아마추어, 프로 단체 전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 구조적인 것부터 고민해야 될 사안이라는 뜻이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