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남자 국가대표 김정환이 지난 24일 저녁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 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지바/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라는 질문에 김정환(37·국민체육진흥공단)의 답은 이랬다. “노장은 살아 있다.”
자신에게 걸었던 주문이었을까. 그는 지난 24일 남자 펜싱 사브르 개인전에서 14-11로 앞서가던 순간, 과감한 런지 동작(펜싱에서 찌르기 또는 베기 자세)으로 상대를 찔러 베테랑의 진가를 증명했다. 펜싱 선수단의 ‘맏형’인 그는 이날 동메달을 거머쥐면서 한국 펜싱사 처음으로 ‘올림픽 3연속 메달 획득’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2012 런던올림픽 단체전(사브르) 금메달, 2016 리우올림픽 개인전(사브르) 동메달에 이어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동메달(사브르)을 목에 걸 만큼 오랜 기간 발군의 실력을 유지해온 선수지만,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펜싱을 시작해 한국체대 졸업반이던 2005년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된 김정환은 같은 해 서울 국제 그랑프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한국 펜싱계의 신예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경기 직후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약물이 검출돼 1년간 선수 자격을 정지당하고 메달을 박탈당했다. 당시 김정환은 불면증이 심해 수면제를 먹은 탓이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아버지였다. 아들이 출전하는 대회마다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경기장을 찾았던 아버지의 지지와 격려 속에 그는 마음을 다잡고 선수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자격정지’라는 딱지가 붙은 자신을 스카우트해간 서범석 감독의 배려로 2005년 12월 실업팀에 입단할 수 있었고 이듬해 7월 한국실업연맹회장배 전국남녀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쥐며 재기에 성공했다. 김정환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는다.
2006년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국제대회에서 좀처럼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고 에이스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아들의 올림픽 출전이 소원이었던 아버지는 2009년 심장마비로 떠나 김정환의 런던올림픽 출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런던올림픽 남자 펜싱 사브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귀국 직후 아버지의 묘를 찾아 “저보다도 제가 뭘 잘하는지 잘 아시던 분이 지금 이걸(금메달) 못 보셨다는 게 너무 속상하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펜싱 사브르 국가대표 김정환(왼쪽)이 지난 24일 일본 마쿠하리 메세 홀에서 산드로 바자제(조지아)와 도쿄올림픽 동메달결정전을 하고 있다. 바자제는 이날 오상욱을 8강에서 이긴 선수다. 지바/연합뉴스
김정환의 기량은 30대에 진입하면서부터 만개하기 시작했다. 순발력과 체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주변의 우려 속에서도 그는 2015년 싱가포르 아시아선수권에서 2관왕(단체전·개인전)을 차지하면서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10살 이상 어린 후배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노장의 뚝심과 노련함을 무기로 고된 훈련 과정을 버텨냈다.
그는 결국 서른세살의 나이로 2016년 리우올림픽에 출전해 한국 펜싱 역사상 처음으로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뒤 은퇴를 선언한 김정환은 서른일곱살의 나이에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인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은퇴를 번복했다.
김정환은 3·4위전에서 세계 1위인 후배 오상욱(25)을 8강전에서 꺾은 산드로 바자제(조지아)를 상대로 15-11로 승리해 리우올림픽에 이어 두번째 개인전 동메달을 획득했다. 함께 출전한 후배들이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30대 후반에 접어든 노장이 한국 펜싱의 자존심을 지켰다.
김정환은 경기 뒤 “개인전은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목표는 단체전 금메달이다. (개인전을 치르며) 선수들의 멘탈이 조금 흔들렸을 것이기에 맏형이자 주장으로서 잘 맞추겠다”고 말했다. 28일 김정환은 후배들을 이끌고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 출격한다.
장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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