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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우상화한 성경’은 독…생명 향한 연대감 회복해야

등록 2011-03-30 21:04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강조하며 자기수행 뒷전

세력 불리기 급급한 한국교회 ‘공로신앙’이 지배

자연의 능동성 부정하는 ‘협소한 구원관’ 한계

자본주의에 먹힌 한국 개신교야말로 개혁 대상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➍ 시리즈를 마치며

김경재·이정배 교수가 말하는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과제’

루터, 얀 후스, 칼뱅 등 서구 기독교 개혁사상가들이 활동했던 곳들을 돌아본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연재를 마치며, 종교개혁의 현장인 유럽에서 신학을 연구했던 한국 신학계의 두 거장을 만났다. 김경재(71) 한신대 명예교수와 이정배(56) 감신대 교수다.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과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배운 김 교수는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을 지냈고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크리스천 대학교수들의 모임인 한국기독교자교수협의회 회장이다. 김 교수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이 교수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유럽의 종교개혁 현장을 체험했다. 지난 23일 서울 안암동3가 환희당에서 한자리에 선 두 교수는 한국 교회의 종교개혁을 여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중세 가톨릭교회를 깨고 500년 전 종교개혁을 통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등장한 것이 정신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김경재 “종교개혁은 중세기 1천년간 (가톨릭) 전통이라는 묵은 벽에 갇혀 있는 것을 헐어내고, 본래 생명의 새순을 찾아내려는 운동이었다. 세계 문명사로 보면 개인의 개체성이나 인격, 자유가 망실되던 시대에 자유로운 존재인 개인을 발견한 의미가 컸다.”

이정배 “활자 매체의 발명으로 성서가 번역돼 성서가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계기도 되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주의를 들고 나와 일상의 모든 직업이 귀하고, 하나님과 통한다며, 성직 구조를 깼다. ”

-본래 성서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반지성적으로 흐른 것은 문제 아닌가.

김경재 “서구문명은 그리스의 철학적 사유체계와 이스라엘 히브리민족의 두 사상이 종합이 됐다가 분리됐다가 하는 역사의 반복이다. 중세기는 두 사상의 종합이었지만 종합은 양쪽의 특유성을 무디게 하는 약점이 있다. 루터나 칼뱅의 초기 개혁은 종합을 통해서 잃어버린 본래 성서적 히브리 정신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50이었다면 잃은 것도 50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성서적 맥을 되찾았지만, 철학적·존재론적·인문학적 요소들이 성서적으로 독이라도 되는 양 배타하고 경원시해 천박하고 좁아졌다.”

-14세기 유럽사회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인구의 3분의 1이 죽은 흑사병의 창궐로 사람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중세 교회가 이를 악용할 때 종교개혁가들이 구원의 소식을 준 반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행위나 결과와 책임을 도외시해 인격 수양을 경시케 한 것 아닌가.

김경재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개신교 특징이라지만 그 독 때문에 교회가 죽어버렸다. ‘오직 성서’로 성서주의라는 책 종교가 되었고, ‘오직 믿음’으로 자기 성화(聖化)와 수행과 책임에 대한 열정이 죽어버렸고, 은총 강조로 인간 가능성에 대한 일체의 노력을 터부시하고 정죄하게 돼버렸다. 한국 개신교의 개혁은 우상화한 성경을 인류를 위한 책으로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속에 하나님과 메시아와 진리를 가둬놓고, 우리가 관리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프로테스탄트가 17~18세기 200년간 꽃핀 계몽주의와 손을 맞잡고 더 창조적인 세계로 끌고 나갔어야 했는데, 계몽주의를 정면 돌파할 능력이 없자 적대화해버렸다. 시대를 끌고 가는 거대한 과학사상이나 인문주의, 철학사상과 깊은 대화를 하면서 그리스도 진리를 천명하는 데 실패하고, 그리스도교라는 좁은 영역 속에 갇혀버렸다. 특수한 종파 내지 종단의 종교가 되어 세계사 안에서 자기를 재해석해내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한국 교회는 내면적 성화가 안 보이고, 교묘하게 은폐된 공로신앙이 지배하고 있다. 큰 교회당을 짓고,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교인 수를 불리는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복 받는다는 식이다. 그런 시도를 중단하라는 것이 종교개혁들이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말은 은총을 강조하지만 공로와 행위를 통해 신의 호의를 얻으려는 불신앙적인 태도가 영성을 대신해버렸다.

-지금 4대강 등 환경 문제에 가톨릭이 더 발벗고 나서는 것을 봐도 중세에 그리스 자연철학을 버린 가톨릭의 세계관이 중세 이전으로 넓어진 반면 중세 가톨릭을 깨고 나온 (보수) 개신교의 세계관이 더 협소해진 것 아닌가.

김경재 “성서 안의 두개의 큰 수맥은 ‘계약 전통’과 ‘창조 전통’이다. 계약 전통의 전승은 가난한 자의 해방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고, 창조 전승은 자연이란 생태계에 임재한 신을 훼손하지 말고 찬양하고 노래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가져야 할 것은 계약 전통 못지않게 창조 전통에 입각해서 피조물의 신음에 대해 예민한 감성과 자기 절제, 비움, 고통받는 생명에 대한 연대적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

이정배 종교개혁의 가장 큰 한계는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를 제거한 것이다. 자연이 가진 능동성, 즉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있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이 길에 대해선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중세기의 유기체적인 세계관, 즉 자연의 능동성을 다 부정해버린 것이다. 종교개혁이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만나서 근대 과학 혁명을 일으키는 힘은 됐지만 오늘날 보면 자연의 능등성과, 인간의 가능성과 다른 종교의 가능성을 다 부인해버리는 원초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개체와 전체가 분리된 게 아니기에,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므로 거시적인 차원의 구원도 얘기하고, 더 큰 나의 구원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구원관은 너무 협소하다.

-기독교가 4세기 로마에서 황제의 공인을 받아 세계종교의 기반을 만들었지만 피지배층에서 태동돼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했던 초기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루터가 천년의 어둠을 깨고 개신교를 제도적으로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처음부터 박해받는 자(농노)들의 등을 돌리고 정치 권력의 도움을 받고 출발한 것이 한계가 된 것 아닌가.

김경재 장공 김재준(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자)은 ‘개신교는 루터·칼뱅 이후 시대적 상황에서 근세적 중산 계층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돼, 본래 성서가 늘 관심을 가진, 춥고 배고프고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보다도 중산 계층에 뿌리내리고 안주해버렸다’고 한탄했다. 중산 계층들이 보다 더 높은 경제적, 사회적 부를 창출하려는, 계급 상승적 운동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 개신교가 매몰돼 버렸다. 헌금이 기독교의 확장에만 쓰이고 구제엔 실제 3%도 쓰이지 않는다는 통계가 만인을 위한 복음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국 교회는 75%가 장로교다. 교회 제도를 정비하고 경건성을 강조한 ‘장로교의 아버지’인 칼뱅을 한국 교회가 본받았다는데 술·담배는 안 하는 겉모습을 취한 것과 달리 속내는 부패와 비리로 썩어가는 것 아닌가.

이정배 “중세 교회는 처음에는 고리대금업자들을 비난했다가 나중에 교회 건축을 본격화하면서 그들의 돈이 필요해지자, 결국 그 돈을 받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상인들이 돈으로 영혼도 구원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 돈의 힘이 셌다. 종교개혁은 그런 가치관을 역전시켰기에 문명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오늘날처럼 자본주의에 먹힌 한국 교회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종교개혁의 의미다. ”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인터뷰 전문은 휴심정(we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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