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 현장아카데미에서 이은선·이정배 교수 부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일곱번째는 이정배(67) 목사(전 감신대 교수)와 이은선(64) 세종대 명예교수 부부다.
지난 17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갑천로 760번길 깊은 산골 현장아카데미를 찾았다. 부부 신학자와 인연이 깊던 류승국(1923~2011·전 정신문화연구원장) 교수가 작명한 ‘현장’은 주역 계사전의 현저인(顯諸仁) 장저용(藏諸用)에서 따온 말로, ‘천지의 도는 일상의 쓰임 속에 감춰져 있어서 사람들이 매일 쓰면서도 알지 못하고, 인(仁)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의 진리만을 내세워 다른 주장들을 배척하며 갈등하지 않고, 사람과 삶과 자연의 도와 조화하기 위한 신앙과 학문을 지향하는 곳이 바로 현장아카데미다. 부부가 현직에 있던 20여년 전 화전민이 살던 집과 땅을 인수해 주말마다 땀 흘려 개간하고, 나무를 심어 단장한 이곳은 수도원 문화가 부족한 개신교의 옹달샘이 될 만하다.
이정배 교수는 감신대 교수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장, 한국조직신학회장, 한국문화신학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했다. 이은선 교수는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한국유교학회와 양명학회 부회장을 거쳤다. 부부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계승한 프리츠 부리 교수의 지도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공부한 변선환·신옥희 부부의 뒤를 이어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를 공부했다. 따라서 윤성범(1916~80)과 변선환(1927~95)이 연 토착화 신학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의 보수 신학이 이식돼 주류를 형성해 전세계에서 가장 배타성이 높은 한국 개신교 풍토에서 ‘열린 신학’을 하기란 ‘닫힌 신학’을 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힘이 드는 일이다. 부부의 스승 변선환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며 종교 다원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교회 권력을 쥔 보수 목사들은 1992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한 그의 말만을 부각시켜 그를 ‘적그리스도’, ‘사탄’으로 매도하며 중세식 종교재판을 감행해 감신대 학장과 목사직, 교수직에서 파면당하게 하고 강제출교시켰다. 달걀로 거대한 바위와 싸우던 변선환은 몇년 뒤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변선환은 떠났지만 그가 ‘노다지’(금광)이자 ‘노터치’(내 제자들만은 손대지 마라)라고 한, 부부를 포함한 제자들은 오는 3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어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를 공론화할 계획이다.
이은선 교수의 선친으로 신학자·목사이자 화가, 토착적 영성가였던 이신(1927~81)은 변선환과 ‘절친’이었다. 부부는 변선환과 이신의 주선으로 맺어졌다. 현장아카데미엔 이신이 탐독하던 고서적을 비롯해 동서양을 가리지 않은 수천권의 장서들이 빼곡하다. 크리스천이면서도 동서양 사상의 진수를 꿰뚫었던 유영모(1890~1981)와 함석헌(1901~89) 사제를 따르는 이들답다. 이정배 교수는 다석 유영모의 유고집으로 밤을 지새우며 다석 사상을 정리해 <빈탕한데 맞혀놀이>와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펴낸 바 있고, 이은선 교수는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부부 신학자에게는 외래 종교가 아닌, 한국인의 심성 속에 애초 있었던 기독교를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토착적 기독교 사상·영성가들의 가르침과 삶이 녹아 있다.
부부를 비롯한 한국문화신학회 회원 20명은 한류 초기인 2011년 이미 <한류로 신학하기>란 책을 펴낸 바 있다. 당시 후학들은 한류가 ‘한국적인 본질’보다는 세계의 것을 합친 ‘하이브리드’(혼합물)여서 세계에 잘 먹히는 것 아니냐는 반박을 하기도 했지만, 공간적으로 세계와 혼종된 것도 있으나, 시간적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혼종된 것도 있으니 그 차원에서 한류를 신학적으로 살펴보자는 데는 동의해 논의가 진행되면서 출간에 이르렀다.
“돌덩이처럼 백년 천년 잘 변하지 않을 만큼 자아동일성을 가진 것들도 있지만, 처음엔 조그만 것이 다른 환경과 만나 덧붙여지며 확대되는 동일성도 있다. 그것마저 부인하면 이스라엘 민족에서 시작된 조그만 정체성이 확대되어서 오늘날 거대한 기독교 문명을 이룬 성경도 다 부인할 수밖에 없다.”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산골에 있는 현장아카데미.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런 이정배 교수의 말을 이어 이은선 교수는 “종교학자 황필호 교수가 한국인들은 종교를 바꿔도 개종(改宗)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덧붙인 가종(加宗)이라고 했는데, 유교인이나 불교인이 기독교를 만나면, 불교적으로 생각한 것을 다 버리고 새롭게 기독교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고, 그 이전 것에 새로움을 더했다”고 보았다. 통상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 동학의 개벽사상을 유교와 단절시켜 이해하지만 이은선 교수는 서학도 동학도 모두 유학의 내적 발전으로 본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유교 선비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된 이들은 유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인격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동기를 기독교에서 얻으면서 유교적 이상을 좀 더 빨리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열린 생각은 특정 종교나 종파를 넘어 근원을 찾는 성향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은선 교수는 “죽으면 천당 아니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현대 한국 기독교의 단차원적 신앙이 교권주의자들의 사유 없는 신앙과 목회자 타락을 부추긴 한계를 노출했다”며 “소위 성직자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모두가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는 길을 추구한, 선조들의 유교적 사유를 회복해 사유하는 신학이 될 때 과거의 한국 종교사상뿐 아니라 미래 과학 문명과도 보다 더 잘 회통되는 기독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정배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이 땅을 선교한 것 같지만 이 땅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말처럼,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다가도 본질을 잃으면 거부하는 것처럼 기독교도 받아들였다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적 고유성을 흥과 정으로 정리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엔 단군 신화와 같은 천지강림신화와 박혁거세 신화와 같은 난생설화가 동시에 있다. 산의 수렵문화에서 나온 천신신화와 농경문화에 나온 난생신화가 함께한다. 하나는 초월적이고, 하나는 내재적 발전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정배 교수는 “이 두가지에서 <천부경>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인간이 하늘과 땅과 하나다)이 나왔다”며 “대종교를 연 나철과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가 지닌 한민족 고유사상의 맥을 이은 다석 유영모도 이 사상을 통해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며, ‘없이 계신 하나님’을 인간 개개인의 마음(바탈)에서 찾아 누구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고 전했다.
“우리는 인간이 본래 하늘(하나님)을 품고 있으니, 신(神)이 (안에서) 난다. 신나면 흥이 발동한다. 고통이 심해져 흥이 단절되면 한이 된다. 흥이 깨진 상태가 한인 것이다. 그 한을 치유하는 것이 정이다. 이 정은 기독교적 공동체성과 만난다.”
이정배 교수는 “우리 안에 하늘 의식이 있었기에 기독교의 하늘을 이해하고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며 “초월적 하늘(신)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동학과 같은 내재적 천(天)을 받아들일 때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와 더 깊게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은선 교수는 “흥이나 풍류보다 더 근원적인 한국정신은 생(生·살림)”이라며 “유교에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만물을 살리는 마음)이 있는데, 만물을 관장하는 이치인 리(理)에 대한 우리 민족의 생각은 ‘만물을 살리는 생리(生理)’였다.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도 살아 있는 역동적 살림”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박경리의 <토지>에서 볼 수 있듯이 고난 속에서도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항상 같이하며 어떻게든 살려내 고난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참된 꽃을 피워내는 살림 의식이 우리에겐 있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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