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한담] 성묵 스님 입적
집착 끈 툭 끊어지듯 터지는 웃음 방생 몇 번이던가
산자들에게 남긴 찬 얼음물 같은 말 “살면 더 좋고!”
성묵 스님이 입적했다. 47세다.
성묵 스님은 경북 봉화 태백산 각화사 서암에서 홀로 수행정진하던 중 ‘유행성 출혈열’에 감염돼 지난 30일 안동의 병원에 이어 대구 경북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이미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진 상태여서 손을 쓰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국의 선방에서 안거를 나거나 태백산 정상 부근에서 홀로 생식을 하며 정진하던 성묵 스님은 2년여 전 “조계종 총무원에 선승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총무원 기획국장을 맡아 상경해 조계사 인근의 옥탑방에서 홀로 정진하면서 일했다.
그러던 중 선원에서 수행하다 그를 눈여겨 보았던 서울 강남 삼성동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권유로 봉은사 선원 선감을 맡아 재가자들의 참선을 지도하면서 조계종민족공동체운동본부 사무처장으로서 남북 화해를 이끌었다.
봉은사 선방의 수행 열기가 고조되면서 강남권의 대표적인 수행공간으로 자리매김케 한 그는 2개월 전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이제 수행에 전념하겠다”면서 서암으로 내려가 독살이를 시작했다.
풀을 베는 등 암자를 정비하면서 홀로 살다다 유행성 출혈열에 감염됐으나 감기몸살 정도로 여기고 있다가 치료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빈소는 경북대병원 장례식장 104호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2일 오전 10시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고운사에서 봉행된다. (053)420-6144.
성묵 스님이 홀로 정진했던 태백산 속 외딴 암자 서암.
성묵 스님과 함께 태백산 도솔암을 오르며.
지난겨울, 성묵스님과의 동행
잠들지 못한 10월의 마지막 날.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자연물들의 감응인 것일까.
<하늘이 감춘 땅>의 ‘봉정사 중암’편인 143쪽에 호탕하게 웃으며 “입 벌려 웃을 줄 모르는 이야말로 천치가 아닌가’라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선승이 바로 그다.
성묵 스님은 서울 강남의 천년고찰인 봉은사의 재가 선방을 책임진 선감이었다.1980년대 봉암사 선방 등을 다니면서 선객들 사이에 이름깨나 날렸던 선승인 명진 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선방을 맡을 인물로 그를 스카우트했다.
나는 우연히 두 달 동안 한 선방에서 성묵 스님과 참선 정진한 적이 있다. 아예 선방에서 매일 밤을 보냈기에 그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다. 애초 수십년 동안 전국의 주요 선방을 다니며 참선을 해온 선객이니만큼 성묵 스님의 기상은 활발했다.
그와 오래 대면하면서 들어왔던 그의 말버릇 하나가 뚜렷했다.
“죽어도 좋고!”
그는 무슨 말끝에 늘 “죽어도 좋다”고 했다. 결국 원하던 게 안 돼도 좋고,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집착과 고집을 바라보는 마음이 해탈되었다. 바라보는 이마저 해방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말은 그 뒤에 이어졌다.
봉은사 선방의 성묵 스님.
그가 은사 스님과 함께 살던 경북 안동 봉정사 뒷산에 지었던 중암 앞에서.
“살면 더 좋고!”
죽어도 좋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반전이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죽음’과 비교해서 얼마나 좋은 상태인지 여실히 자족하고 자각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도솔천에 머물렀다.
“죽어도 좋고! 살면 더 좋고!”
그의 말끝에서 무거운 집착의 끈들이 툭 끊어지듯 터지는 웃음을 방생한 것이 몇 번이었던가.
그는 선방 도반이라며 내가 <하늘이 감춘 땅>을 찾아나설 때 눈 쌓인 태백산 일대와 운달산 등을 직접 앞서 안내했다.
한겨울 눈밭을 함께 헤메면서도 한번도 구겨진 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도솔암에서 태백산을 내려다보는 성묵 스님.
운달산 금선대에 홀로 앉아 있는 성묵 스님.
그가 갔다.
‘죽어도 좋은 세상’으로. 그리고 맨날 죽겠다, 못살겠다는 산자들에게 찬 얼음물 같은 축복의 말을 남겼다.
“살면 더 좋고!”
스님! 지금 경계가 어떠하십니까?
“하 하 하…”
글·사진 조현종교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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