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테레사’ 엠마 프라이징거 수녀
20대에 오스트리아에서 건너와 ‘흰옷천사 50년’
병원 열어 간호사 겸 후견인…‘천형’ 굴레 벗겨
엠마 프라이징거는 아름다웠다. 그가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이국의 한센병자들을 돌보겠다며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한국에 온 지 50년이 다됐다. 하지만 지난 20일 경북 칠곡의 한 아파트에 있는 릴리회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맞닥뜨린 76살 이방인 수녀의 모습은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을 당시 그대로인 듯했다. 어쩌면 이토록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을까? 삶의 향기는 얼굴에 묻어난다고 했던가?
그의 남다운 아름다움은 남다른 삶에서 연유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엠마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었다. 그에겐 서로 사랑해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다. 잘 생기고 자상한 의사였다. 선진국에선 피부병 정도로 여기는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이 후진국에선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버림 받은 삶을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죽기 전에 그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했다.
“‘우리 사람’들에겐 병 없다, 다만 사람들 편견 속에만 있을뿐”
그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로 갈 생각을 하던 중 한국에 나가있던 가톨릭 신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곳이야말로 한센병자들에게 엠마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1961년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1~2년 동안 봉사한 뒤 고국에 돌아가 자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남자친구와 결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센인들의 상황을 본 뒤 그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남자친구에겐 자신 말고도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국에선 한센병 환자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머물며 1965년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지원을 받아 대구 칠곡가톨릭피부과병원을 열어 원장 겸 간호사 겸 환자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코와 귀가 사라져버린 채 고름이 낀 환자들의 환부를 어루만지던 그는 한센병자들에게 그야말로 ‘하얀옷을 입은 천사’였다. 그래서 환자들은 그를 ‘엠마’ 대신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머문 뒤 가장 친한 친구의 성이 배씨여서 그도 한국성을 배씨로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배복녀라고 불렀다. 복녀는 ‘복이 많은 여자’라는 뜻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늘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처럼 마음이 부유하고 행복한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인도에 세르비아 출신의 이방인 데레사수녀가 있었다면 한국엔 엠마가 있었다.
그는 1996년 칠곡가톨릭피부과병원에서 은퇴한 뒤 한센인들을 돕던 후원단체인 릴리회에서 일하다 지난 3월 모든 공식적인 일에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칠곡가톨릭피부과병원 치료를 거쳐 고령 은양원 등 29개 정착촌에 서 살아가는 한센인들을 찾아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가 다니는 정착촌에 살아가는 이들은 65살이 넘은 고령들이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한센병에 걸리면 위로와 보살핌은 커녕 ‘천형’이라며 돌팔매질을 하는 무지몽매함이 판치던 시절이어서 발병 초기에 쉬쉬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 불구의 몸이 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에겐 상처의 치료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의 치유가 필요하다.
마음까지 어루만지며 ‘의사 남편’ 대신 평생 ‘반려’
엠마는 “‘우리 사람들’ 중에 현재 병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했다. “지금은 2개월이면 완치되기 때문에 그 병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는데, 다만 사람들의 편견 속에만 큰 병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중에도 그는 나환자의 ‘나’자는 커녕 ‘한센병자’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오직 ‘우리 사람’ ‘마을 사람’이라고 표현할 뿐이었다. 그동안 한센인들을 돕는 후원이 절실한데도 이를 알리는 인터넷 홈페이지 하나 만들지 않고, 홍보하지 않은 것도 한센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의사 남편’ 대신 그가 선택한 평생의 반려자들에 대한 각별한 배려의 마음이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2002년 그의 칠순 때는 전국의 환우 정착촌에서 30대의 버스가 올라와 잔치를 벌였다.
그는 요즘은 릴리회를 통해 중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한센병이 ‘추억속의 병’이 되어가고 있지만, 중국엔 현재 60여만명이 이 병에 시달리고 있어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처럼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불구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불철주야 달려온 그 가난한 나라에 왔던 그는 “가난해도 서로 나눌 줄 알았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성모님도 사람으로 사셨고, 예수님도 33년간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사셨지요. 그들이 살았던 세상에 고통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사람들 아닌가요?” 소박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미소짓던 ‘복녀’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행복은 늘 자기 밖에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행복 안에 있게 된다”고 했다. 릴리회 (053)322-9697, lilyasso@hanmail.net.
대구/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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