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시우 명예교수가 본 불교적 깨달음
“세상 모든 것은 주고 받음의 관계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신비를 캐다가 불교 진리를 탐구한 이시우(76) 서울대 천체학과 명예교수는 “불교적 진리의 핵심은 연기(緣起)이며, 연기란 ‘주고 받음의 관계’다”고 간명하게 설명했다.
그는 불교 조사들의 선어록의 정수를 고려말 백운 스님이 정리한 <직지심경>을 풀이한 <직지, 길을 가리키다>(민족사 펴냄)를 썼다. 선(禪)은 스스로 직접 마음을 보도록 이끈다. 따라서 논리나 지식이나 해설을 경계한다. 직접 마음을 보면 곧바로 그 자체로 부처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수의 논리적 해설서는 전통적 선불교엔 반역이다. 오직 주위 세계와의 관계를 외면한 채 오직 내면의 마음만을 보게 해 독불장군식 깨달음만을 지향하는 선승의 풍토에 대한 정면 돌파다.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선승들에 대한 그의 일침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성단(별의 집단)의 생멸을 연구하다가 불교에 심취해 정년을 5년 앞두고 불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서울대 교수직을 조기퇴직하고 출가를 결행하려 했다. 그러나 조계종이 정한 출가 정년 연한이 넘어 출가하지 못하자 1999년 현 종정 진제 스님이 조실인 부산의 해운정사에서 안거(3개월간의 참선)에 참여했다. 그가 본 조실은 한자로 아무도 못알아들을 소리를 혼자 했다. 또 조실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모든 대중들이 왕처럼 큰절을 올려야했다. 그런 풍토는 젊은 선승들에게까지 이어져 20여명의 선승중 연장자인 그가 절을 할 때 답례를 한 이는 한명 뿐이었다. 불교가 사람 됨됨이로부터 시작된다는 보았는데 됨됨이와는 거꾸로가는 무례의 일상화에 실망해 두달만에 절을 나왔다.
그는 선승의 독선과 아집과 무례를 불교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독립적인 존재란 없기에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고, 모든 것은 서로 주고 받는 연기적 관계로 얽혀 있는데도 이를 오해해 자기중심적인 절대적 주체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께나 알려진 스님들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 자랑에 집착심을 부추기는 내용이 많다. 오래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게 불교인가. 그게 아니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동전에 양면처럼 따로 있지않다는 것을 알아 어느 것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 불교다.”
유아독존적으로 자기만이 부처임을 내세우는 일부 선승들의 주장을 가차없이 내치며 그는 ‘나만이 아니라 주위의 하찮아 보이는 사람과 생명은 물론 불행과 죽음까지도 부처라는 것’을 일깨웠다.
그는“수행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삶이 바로 수행”이라고 답했다. 삶과 유리된 채 수행만을 위한 수행을 경계하면서 “보시는 받으면서 하는 수행과 처자식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는 수행 가운데 어떤 쪽이 제대로 공부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삶이 없는 수행은 가짜라는 것이다.
그는 또 선승들이 절대나 순수, 완전 등에 매몰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런 것은 환상 속에만 존재할 뿐 실재에는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조작하지않기 때문에 완전한 동그라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계곡 속에 물결에 휩쓸리고 쓸리다보면 완전한 동그라미가 아니더라도 저마다 둥글둥글해진다. 나만이 주체고 나머지는 모두 객체가 아니라, 그 완전하지 않은 그 본연의 자연물들이 모두 부처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