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조선인들이 모래알’이라며 부정적 신념을 주입시켰다. 그러나 3·1운동은 이를 단번에 뒤집고 다른 종교인들이 민족 대의를 위해 협력함으로써 한민족을 하나되게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더욱 빛나고 있는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은 진리 탐구와 민생 구제를 둘로 보지않았던 근세 고준한 종교인들이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1운동에 나선 천도교와 기독교(개신교)에 비해 불교는 대표단에 단 두명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그 역사성에 비해 미미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천도교 중심의 3·1운동 조명에서 아웃사이더였던 불교계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며 33인 중 한명인 백용성 스님(1864~1940)을 중심으로 한 역할을 새롭게 조명한다. 27일 오후 2시 ‘3·1운동100주년기념토론회’ 주최로 서울 조계사에서 열리는 ‘독립운동가 백용성-잊혀진 100년의 진실’토론회에서다. 이 토론회 발제자는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이다. 그는 이 토론회에서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자격으로 발제자로 나서,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와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과 김택근 <용성평전> 저자와 토론을 펼친다. 법륜 스님을 23일 서울 서초동 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먼저 만나 과연 ‘잊혀진 100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들었다. 그는 먼저 “은사 도문 스님(84)으로부터 백용성의 3·1운동과 독립운동 비사를 고교 때 출가한 뒤부터 50년 가까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며 서두를 꺼냈다. 도문 스님은 만석꾼 재산을 날릴 때까지 대대손손 독립운동을 도운 임동수 선생(1865~1945)의 증손자로 젖먹이시절 백용성의 무릎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의 은사 동헌 스님(1896~1983)은 백용성의 독립운동을 가장 가까이서 도운 인물이다. “은사(도문) 스님이 ‘해방 뒤 백범이 귀국하자마자 임시정부 요인 30여명과 함께 대각사를 찾아 5년 전 고인이 된 백용성 스님이 쌀가마니에 넣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귀로 흘려 들었는데, 2년 전 당시 사진이 나타났다.” 김구는 귀국 뒤 군중집회 말고 개인적으로는 손병희 묘소와 도산 안창호 묘소에 이어 백용성이 설립한 대각사를 3번째로 찾았다고 한다. 동헌 스님 회고에 따르면 만해는 백용성을 스승으로 모시며 독립운동을 논의했고, 백용성은 천도교 손병희 교주와 구체적으로 준비해 왔다고 한다. 손병희와 백용성의 각별한 관계는 스승대부터 이어져 왔다고 한다. 동학 1세 교주 최제우가 관에 쫓길 때 전라도 남원 덕밀암 은적당에 1년간 숨겨준 게 백용성의 스승 혜월 스님이라는 것이다. 최제우는 그곳에서 동학 경전 <동경대전>을 썼다. 혜월은 그 대가로 승적을 박탈당했다. 손병희와 백용성의 인연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손병희의 딸(방정환의 부인)이 백용성의 최대 후원자이자 도문스님의 증조부인 임동수의 금강산 별장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법륜 스님이 도문 스님의 5천쪽에 달하는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한 발제문에선 백용성이 3·1운동 거사 전부터 천도교만의 단독 거사를 준비 중이던 손병희를 설득해 동학과는 대척점에 있던 서학(기독교)도 참여케 하고, 개신교계의 5천원 자금 요청에도 응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신들의 세계를 33천이라고 보는 불교적 우주관을 반영해 독립은 인간의 힘만으로 안되고 하늘의 보우하심을 받아야 하니 33인으로 하자’는 제안도 용성 스님이 했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은 “백용성은 전국을 6년 동안 다니며 처음엔 한일합방으로 관직을 빼앗긴 이들이 가장 먼저 나라 찾기를 원하리라 여기고 정승들과 고을 원님들을 찾아다녔으나 하나같이 독립운동에서 발을 빼는데 반해 백성들은 굶주리면서도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다음에 세울 나라는 왕과 귀족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 설파했다.”고 전했다.
또 법륜 스님은 “1922년에 간도 오지인 명월촌과 봉령촌에 700정보(210만평)씩 농장을 만들어 독립운동 후방 거점으로 삼았는데 1941년 안수길의 소설 <원각촌>에 나오는 이상향 공동체가 바로 그 농장이었다”고 말했다. 안수길의 아버지 안용호가 백용성이 용정에 설립한 대각교당의 핵심인물이었고, 안수길은 서울 대각사 일요불교학교 교사였다는 것이다. 발제문엔 백용성이 윤봉길을 김구에게 보내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만나 항일연합군을 제안했다는 부분도 들어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백용성이 3·1운동으로 2년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그가 설립한 대각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등 항일독립운동가로서 분명한 증거들도 있지만, 3·1운동 재판기록엔 단순 가담으로 나와 있고, 이후 상해임시정부 자금지원과 윤봉길 파견, 항일연합군 제안 등은 오직 노스님의 구술 뿐이어서 아직 증거가 없는 주장 수준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민주화 투쟁도 비밀리에 하는데 일제 때 투쟁은 말할 나위가 없다”며 일본인들이 남긴 재판기록만 의존할 경우 실제 역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에게 백용성은 사표다. 백용성의 생가에 은사 도문 스님이 조성한 사찰 죽림정사의 주지이기도 한 그는 정토회원들의 수행을 이끌면서도, 제3세계 구호활동과 환경운동에 이어 평화재단을 설립해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삶에서 수행과 중생구제가 둘이 아니었던 백용성의 대승보살정신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스승 백용성을 넘어 더 많은 이들의 뜻을 새기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백용성의 행적만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렇게 ‘민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마음들이 모아져 3·1운동과 4·19의거, 촛불혁명으로 나타났다. 이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수많은 이들의 숨은 노력에 보답하고,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라’는 그 대의를 완성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남북 동서가 있고,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