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1901~89)은 힌수염 휘날리는 도풍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있었다. 박정희 독재시대 <씨알의 소리>로 사자후를 토해낸 언론인이자 민주화운동진영의 선봉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비폭력을 주창한 평화운동가였다. 퀘이커의 크리스찬이자 동서양 종교사상을 회통한 종교영성가였다. 그 함석헌이 오는 2월4일로 서거 30주기를 맞는다. 함석헌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래도록 모신 애제자인 <씨알의소리> 편집주간 박선균 목사(81)를 만났다. 한번도 신문 인터뷰를 하지않을만큼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몇걸음 물러서서 뒷치다꺼리를 해온 그는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에 “다른 분을 하는게 어떠냐”고 거절하다 수줍은 표정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가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양보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 지인들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란 함석헌 시의 ‘그 사람’에 가까운 이로 박 목사를 꼽기도한다. 1971년부터 서울 원효로 함석헌 집의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낸 <씨알의소리>에서 박목사는 편집을, 함석헌기념사업회이사장인 문대골 목사는 업무를 맡았다. 문 목사는 “선생님이 어디에 끌려가거나 죽을 위기 때도 ‘선균이가 있으니까, 선균는 내 맘과 같으니까’라고 말해 샘이 났다”며 농담을 한다.
박목사가 함석헌을 만난 것은 고교 때였다. 박목사는 함석헌이 말한 ‘가장 작고 보잘 것없지만 고귀한’ 씨알이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 산골에서 태어나 세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의집에 양자로 갔으나 제대로 말도 하지못해 파양 당해 돌아올만큼 그의 삶은 고난으로 시작됐다. 중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줄 집안형편이 아니어서 담임선생님이 자기 동생에게 써주는 소개장 하나만 들고 서울로 올라올때만 해도 그는 혈혈단신 무일푼이었지만 기어코 부자가 되거나 고관대작이 되어 금의환향하고야 말겠다는 야망만은 컸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집 책장에 꼿힌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글을 본 순간 그 야망이 산산조각이 났다.
“선생님은 글에서 ‘내가 누군지를 말하라라. 신부 목사 교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풀이다.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 나한테 주지도 않겠지만 준데도 안한다’고 썼다. 그 때는 아이들에게 물으면 하나같이 ‘대통령 될거’라고 했는데, 대통령를 준데도 안한다니, 이 분을 보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자리에 오른다든지하 생각을 버렸다.”
그 뒤 함석헌의 글을 찾아 읽으며 불의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솟아오른 그는 함석헌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기대치않았던 답장이 왔다. ‘새싹이 열정만 갖고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봐야하다’는 내용이었다. 고학생인 그는 장학혜택을 활용해 강남대 전신인 중앙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뜻하지않게 그곳에 함석헌이 강의를 왔고, 곧이어 함석헌의 지음자인 안병무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교장으로 왔다. 그는 신이 났고, 졸업후에도 교직원으로 일했다. 그라나 학내파동으로 함석헌 안병무가 그만두자 그도 사직하고 <씨알의소리>에 가담했다. 그대로있었으면 대학교수로 편케살았을텐데 스스로 고난을 자처한 것이다. 그런 제자의 성품을 애틋하게 여긴 때문일까. 함석헌은 생전에 ‘누군든지 형사와 신부 목사되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겠다’고 했지만, 박목사가 ‘선배가 미아리산동네 교회를 맡으라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하게 되면 해야지’라며 의외의 허락을 했다. 그런 사제지간이었기에 박목사는 산동네 목회 시절과 전두환 정권때 7년간의 폐간 때와 몇번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내년이면 창간 50돌을 맞은 <씨알의소리>를 가장 오래도록 지켜왔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박목사는 37세 늦깍이로 결혼했으나 자녀가 없이 부인은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나 홀로됐다. 동반자도 피붙이도 재산도 없이 자처한 고난이 그를 강고하게 했다.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은 일제시대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를 해서 월급 몇푼 받은 외엔 월남한 이후엔 2남5녀를 키웠지만 한번도 돈벌이를 한 적도 없이 어렵게 살았다. 일제-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 모두 2년4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곳에서 노자, 장자와 불경과 사서삼경을 탐독해 높은 정신세계를 일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를 바보새인 신천이라고 했다. 신천이라는 새는 태풍을 타고 창공을 비상해 널리 날면서도 정작 땅에 내려오면 물고기 하나 잡지못하고 죽은 고기나 주어 먹는 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박목사는 함석헌의 진짜 호는 씨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민(백성)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는 씨알정신은 함석헌의 사상만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고 그는 증언한다.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도 모셨던 유명한 분들도 모두 명령과 지시과 훈육을 좋아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달랐다. 그렇게 오래도록 곁에 있었지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씨알의소리>를 처음 맡았을 때 도무지 지시를 안해주니 답답했다. 그러나 누구든지 씨알을 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일어나 하기를 바랐다. 그는 제자를 기른다든지 자기를 내세운다든지 그런게 없었는데 그 점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점이다.” 말년에 여성 스캔들이 있던 함석헌에 대해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가 공개석상에서 함석헌을 호되게 비판한 것에 대해서 박목사는 안타까워했다."선생님은 공개 강의에서도 '내가 스캔들이 많은 사람이다'고 얘기할만큼 솔직했다. 그러나 그가 남의 가정을 파괴하거나 강제 폭력을 하거나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요즘 미투와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 남의 말만 듣고 류영모 선생님이 함선생님에 대해 공개 망신을 준 것은 말년에 스승 노릇을 제대로 한 것이라고 보지않는다. 함선생님은 오산학교 스승이면서 평생 스승으로 모신 류영모선생님을 깍듯이 대했다. 늘 무릅을 꿇고 모셨다. "
세간에선 고난 받는 이들을 동정하지만 그는 고난의 역설로 말을 맺었다.
“선생님은 고난이 많은 우리나라를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비유했다. 그랬기에 잘만하면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남북한이 선생님의 씨알, 비폭력, 평화정신으로 힘을 합친다면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는 2월4일 오후4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 강당에서 ‘함석헌 선생 서거 30주기 추모회’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