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가톨릭 안동교구엔 주교 2명, 신부 90명 등 92명의 성직자가 있다. 서울대교구가 주교 6명, 신부 912명인것과 비교해보면 안동교구가 얼마나 작은 교구인지 알 수 있다. 국내 16개 교구 가운데 가장 작다. 규모가 작다고 아름다운것은 아니다. 작음에도 사랑이 무한정 샘솟는 신비가 비로소 아름다움을 준다.
현대 50년간 급격한 이농으로 교구민이 138만명에서 71만명으로 오히려 절반 가량이 줄어든 안동교구가 50돌을 맞았다. 교구 성직자와 신자들은 지난 26일 오후 2시 안동실내체육관에서 7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세례를 수많은 이들에게 주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도시로 떠나버렸으니 감사함보다는 쓸쓸함이 맴돌법할듯한 교구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구장 두봉 주교와 현 교구장 권혁주 주교를 24일 안동 안기산 숲으로 둘러싸인 안동교구청에서 만나자마자 숫자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프랑스인 두봉 주교는 작은 키와 90세라는 노구를 무색케할만큼 천의무봉의 꾸밈없는 발랄함으로 사랑의 아우라를 방사했다. 청년시절부터 자신을 멘토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한 권혁주(64) 주교를 바라보는 눈에도 사랑과 신뢰가 가득했다.
두봉 주교가 이른바 ‘잘 나가는’ 큰 교구가 아닌 안동교구에 자리잡은 것은 운명같은 것이다. 그는 잔다르크의 땅으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농사를 지어 채소를 팔아 생계를 꾸렸고, 형제 자매 5형제뿐 아니라 자기 부모가 맡아 돌본 사촌형제들까지 7형제가 복닦대며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한국에 파견됐다. 파견 전 프랑스에서 군복무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고아였던 전우가 한국에 파병돼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파견을 명 받았을 때 친구가 목숨을 바친 땅이자 너무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어서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대전에서 15년을 지낸 뒤 1969년 안동교구가 설립되면서 첫교구장으로 부임받을 때는 오고싶지않았다고 한다. 교황청 주도로 연 제2바티칸공의회에 따라 기존의 닫힌 교회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상에 활짝 열린 교회를 할 꿈에 부풀었는데, 유교의 고장 안동은 옛날방식만을 고집해 좀체 열린 교회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온 그는 유림들과 첫상봉에서부터 ‘공자님 말씀’을 외워가 언급하며, 자기부터 열린 모습을 보여주며 지역민들의 마음을 열었다.
안동교구가 1973년 건립한 안동문화회관이야말로 열린 교회의 마중물이었다. 재정이 자립이 안돼 겨우 외국의 원조에 의해 살아가고 안동 내에 성당이 하나뿐인 허약한 교구 여건에 이제 그럴듯한 성당 하나 가져보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오랜 바람을 제치고, 두봉주교는 ‘가톨릭’이란 이름도 들어가지않은 문화회관을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안동에서 가장 높은 6층에, 최초로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이 건물은 예식장과 음악다방까지 갖춘 안동시민의 안식처가 되었다.
무엇보다 두봉주교는 농촌사목의 대부였다. 1978년 안동가톨릭농민회가 창립됐고, 다음해엔 ‘오원춘 사건’으로 알려진 ‘씨감자 피해보상 농민운동’에서 고문 당한 농민편을 들었다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기도 했다. 한국 교구의 교구장은 한국인 주교가 맡아야 한다며 교구장 교체를 4번이나 교황청에 요구했던 그였지만, ‘괜한 말썽을 일으킨다’는 교황청의 사임 요구에 ‘그런 이유로 사임할 수 없다’고 버틴 강단을 내보이기도 했다.
1990년 퇴임 뒤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지않기 위해 경기도 고양 행주산성 부근 조립식가건물 공소에서 지내다가 2004년 권 주교의 간청으로 의성의 작은 공소에 머물며 70여평의 텃밭을 직접 가꾸고, 지금도 전국 곳곳에 피정 강연을 다니고 있다. 2012년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3천만원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까지 모두 안동교구에 기증할 정도로 두봉주교의 교구 사랑은 지극하다.
권 주교는 “취임 후 사목표어로 정하고, 50돌을 맞아 다시 다짐하는 표어 ‘기쁘고 떳떳하게’는 늘 입에 달고 사는 두봉 주교님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권 주교는 “안동교구에서 가난하고 작았기에 가족처럼 서로 알고 함께 할 수 있었다”며 “부족한 가운데도 나누면 기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