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인 감이당 고미숙 연구원. 사진 조현 기자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서 필동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10여분을 걷다 보면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이 나온다. 바닥에서부터 ‘고전’ 공부 바람을 몰고 온 ‘수유+너머’의 전통을 잇는 공부방이다. 감이당은 중년, 남산강학원은 청년 백수가 주축이다.
이곳을 찾은 지난 18일은 아침부터 겨울비가 흩날렸다. 비가 와도 갈아 신을 짚신조차 없어 나막신으로 버틴다 하여 사대문 안 ‘정규직’ 양반들로부터 ‘딸깍발이’로 불렸던 남산골 선비들은 더욱 을씨년스러웠을 법한 날씨다.
그런데 이른 아침 방마다 대여섯명씩 모여 ‘열공’하는 ‘청년 백수들’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다. 더구나 ‘원조 백수’ 고미숙(60) 감이당 연구원이 나타나자 마치 친한 지기를 만난 듯 다정스럽기가 봄 햇살 같다. 가정에서고 직장에서고 세대 간 단절이 심한 시대에, 보기 드문 20대와 60대의 어울림이다.
감이당에서 공부 중인 사람들. 사진 감이당 제공
‘코로나’로 경제적 위기에 처한 이들이 적지 않고, 밥걱정 없는 이들도 ‘거리두기’로 인한 단절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런데 경제적 형편으로 보자면, 궁핍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백수들’이 어떻게 정규직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본주의 상식에 대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고 연구원의 말을 들으면 더욱 가관이다. “난 남 듣기 좋은 말을 못 한다. 사교성 제로다.”
그런데도 “친구가 많다”는 것이다. 불안해서 아파트와 연금, 보험을 늘리고, 외로워서 온갖 모임을 찾아다니고, 에스엔에스에 ‘좋아요’를 아무리 눌러도 정작 ‘내게 진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나’라고 반문하게 되는 정규직에 대한 백수의 ‘똥침’이 아닐 수 없다.
“감이당에도 잘나가는 전문직이나 정규직 중년도 공부하러 온다. 그들 중 쉬지도 못하고 달리느라 번아웃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달리다 결국은 암에 걸려서야 어쩔 수 없이 멈춘다. 주변에서 그런 ‘임상’ 사례가 쏟아지는데도 ‘저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라는 자각도 못 하고 ‘나는 괜찮을 거야’라며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달리는 게 말이 되는가.”
지난 2월 감이당의 ‘대중지성’ 모임. 사진 감이당 제공
‘대한민국처럼 학벌이 높은 나라도 없는데, 사회를 바꾸고 혁명을 하겠다던 민주화 세대가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게 그것밖에 안 되느냐’는 백수의 호통이 이어진다. 그가 겨냥한 것은 ‘코로나19’로 실제 위기에 내몰린 약자들이 아니다.
“약자도 다 팽개치고, ‘나만 뒤처질지 모른다’며 목매는 게 민주화 세대가 가져야 할 프레임인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광장으로 뛰쳐나가라고 훈련받은 민주주의 세대가 맞는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다 잡혀 고문을 받을까 봐 두려운 것도 아니고, 아파트 몇 평 더 늘리지 못해, 친구보다 더 좋은 차를 타지 못해 괴로운 것이 아닌가.”
고 연구원은 “그들의 불안은 실제 생계 위험이 없는데도, 불안이 불안을 낳는 패턴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조국을 위해서도, 혁명을 위해서도 아니고 처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불안, 불안, 불안, 돈, 돈, 돈” 하는 게 제정신이냐는 것이다. 그가 최근작 <고미숙의 인생 특강>(북튜브 펴냄)에서 “코로나 시대엔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닌 ‘욕망과의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물질을 쌓아놓고도 불안이 계속되는 근본 원인을 ‘친구의 부재’로 본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안한 이유는 진정한 친구 한 명이 없어서다. 인생을 함께 공유할 이가 없어 외로워서다.”
고 연구원은 “핵심은 ‘친구’이고 ‘연결’”이라고 말한다. 청년들도 취업이 안 됐다는 것보다 실은 고립감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또 우울증, 자살 충동도 세상과 연결이 끊어졌다는 생각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성공만 강조하지, 정작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친구의 중요성’을 간과해버린다. 이 해법은 1998년 ‘수유+너머’를 시작한 이래 친구들 속에서 공부해 누구보다 행복해진 그와 도반들의 삶이 증명해준다. 고 연구원은 40살이 다 돼 교수직도 얻지 못하고 백수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아파트를 사려고 목매기보단 전 재산 4천만원으로 세를 얻어 공부방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공부방 공동체를 하지 않았으면 절대 이만한 꼬라지도 못 됐을 것”이라며, 공동체가 자신을 구원했음을 밝혔다.
금성과 장자스쿨 공부모임의 낭송데이에서 낭송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강학생들. 사진 감이당 제공
그는 “공동체라고 같은 공동체가 아니다”며 “가족공동체 안엔 갇히지 말라”고 권한다. ‘가족 안에서 머물 경우 자기의 기가 세면 가족을 누르고, 아니면 자신이 눌려 희생과 헌신을 아무리 해도 확장을 못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란 삶의 기반이므로, 이를 토대로 청년이 되면 박차고 나가 타자와 만나고, 스승을 만나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에게 자기 이야기를 시키면, 하나같이 운다. 겉으로 봤을 때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집에서 돌봄을 잘 받고 살아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운다. 부모의 돌봄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친구가 있어야 한다. 가족이 아닌 타자, 즉 세상과 연결되도록 해줘야 한다. 정치인도 진정한 복지는 연결되도록 돕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친구를 사귀려면 인생에 대해 재밌고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감이당 같은 공부방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마음을 털어놓고, 고전의 지혜와 접목하다 보면 20대와 60대도 세대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년들이 남산강학원 청년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청년 펀드’에 거금을 쾌척해 경제를 선순환시키고, 젊은 친구들도 사귀며 진정한 행복을 구가한다는 것이다.
감이당은 ‘공주’(공부하는 주부)가 중심이었으나 점차 중년 남성 참여가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적대는 중년 남성들에게 그가 묻는다. “돈과 아파트와 질투심, 쾌락에 올인해서 가족조차 반기지 않는 외로운 노년을 맞을 것인지, 고전을 함께 공부하며 친구를 사귀고, 단순 소박함만으로도 충만해지는 내공을 기를 것인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공부모임 낭송대회에서 고전을 낭송하는 청년들. 사진 감이당 제공
강학생들이 보내온 온갖 먹거리들을 들어보이는 청년들. 사진 감이당 제공
매일 강학생들이 식사를 할수 있도록 준비하는 감이당의 주방. 사진 감이당 제공
◇청년 백수에게 바치는 고미숙의 고언
‘어떻게든 취직하라.’ ‘연애나 결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고미숙 연구원은 이런 조언 따위는 귀에 담지 말라고 한다. 부모들이 들으면 기겁할 법하다. 그러나 고 연구원은 활짝 피어야 마땅한 청년의 에로스(사랑)를 파괴한 것은 자본주의의 음모라고 한다. 인간의 삶과 행복보다 노동을 우선하는 자본주의는 20대에 결혼하고 임신하면 노동에 지장을 초래한다며 미루게 하고, 집을 사기 전엔 결혼할 수 없다며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뒷순위로 밀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운동권과 사귀면 인생 망친다고 해도 연애를 말릴 수는 없었다. 이슬람권에선 부모 허락 없이 자유 연애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져도 연애를 한다. 그런데 취직과 집을 핑계로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젊은 날을 다 보내는 게 말이 되냐.” 어떻게든 연애를 하고, 가능하면 동거부터 하고, 아이도 낳으라고 부추긴다. 아기는 누구나 예뻐하니, 아기를 낳으면 엄마 아빠 먹을 것까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성공에 대한 조급증을 버리라고 한다. 20~30대에 삶의 정점을 찍으면, 정작 중장년기에 허무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급증으로 나타난 것이 너나 할 것 없이 식당과 카페를 여는 현상이라고 본다.
“사람이 성형만 한다고 매력적일 수 없듯 자영업은 음식 맛과 인테리어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자영업은 종합예술이다. 손님을 끌려면 자기 존재를 바꿔야 한다.”
고 연구원은 일찍부터 경제적 성공에 목매기보다 진정한 성공을 위해 매력과 끌림을 가질 것을 권한다. 그 방법이 바로 남산강학원 식으로 함께하는 고전 및 인문학 공부다. 그는 이곳에서 중년들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청년 펀드를 조성해 청년 백수의 자립을 돕는다. 또 글쓰기 훈련을 시켜 작가로 데뷔하게 한다. 남산강학원에서 글쓰기 훈련을 받아 작가로 탄생한 청년 백수들이 내놓은 새 책 <청년, 니체를 만나다> <청년, 연암을 만나다>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북드라망 펴냄)를 자랑하는 고 연구원에게서 자부심이 묻어난다. ‘백수도 이 정도 하면 괜찮지 아니한가.’
조현 기자